사진을 쫓고 쫓다가 어느새 15년이 넘어가고 있네요. 사진동아리 시절에는 여자만 쫓다가 전역 후 '안셀 아담스' 사진으로 사진에 빠진 후 사진에 눈을 떴습니다. 마침 블로그라는 내 이야기를 텍스트와 사진으로 적는 플랫폼이 나와서 13년 넘게 이 블로그에서 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고백합니다. 솔직히 요즘 사진 이야기를 계속 하긴 하지만 예전만큼의 열정은 없습니다. 뭐든 많이 접하고 오래 접하면 무뎌지게 되고 뻔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 사진가 또는 사진작가에게는 수년 또는 수개월을 고생한 전시회지만 단 10초도 안 보게 되기도 하죠.
그럼에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성 언론을 넘어 많은 블로거들이 많은 매체들이 사진전들을 단 한 줄도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나마 한국에는 한국 사진전시회 아카이브를 꾸준하게 하고 있는 곽명우의 사진바다(blog.naver.com/foto3570)가 지금도 사진작가들의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사진전시회 정보를 이 사진바다에서 섭취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열정입니다.
잠이 안 오는 밤 사진바다를 항해하다가 한 사진전에 멈췄습니다. 강원도 속초의 울산바위입니다. 5년 전에 전국의 5대 명산을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울산바위를 봤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추억이 지금 사는데 큰 영향과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경험이 적은 어린 사람들을 보면 항상 국외든 국내든 여행을 많이 해보라고 합니다.
여행은 나를 잊고 내 일상을 지우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이야기를 가장 쉽게 먹을 수 있는 도구입니다. 울산바위를 낮에 봤는데 이 사진은 밤 그것도 합성인가? 할 정도로 울산 바위 두로 흐르는 은하수를 담고 있습니다.
삼청동 한벽원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요즘 서울 종로구 삼청동은 2005년 내가 처음 갔던 그 삼청동이 아닙니다. 당시는 한적한 한옥이 참 많은 한옥 마을이자 인사동 뒤편 저렴한 임대료로 각종 공방과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 아뜰리에나 전시공간이 있던 여유가 넘치는 아름다운 삼청동이 아닙니다.
높은 임대료로 인해 경리단길과 함께 젠트리피케이션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상점들이 임대한다는 빈 상가들이 가득합니다. 그나마 최근에 다시 2009년 이전의 갤러리가 많은 삼청동이 되고 있습니다. 저기도 새로 생긴 10평도 안 되는 작은 갤러리입니다.
얼어붙은 삼총동이지만 몇몇 상가에 다시 불이 켜지면서 봄이 오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리모델링이나 재건축을 하고 있는 곳이 늘고 있네요. 부디 2021년을 지나 2022년에는 예전의 삼청동이 다시 돌아왔으면 합니다.
한벽원 미술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은행 바로 옆에 있는 미술관입니다. 한국 전통미술을 육성하기 위해 세운 미술관인데 가끔 사진전도 합니다. 여기는 몇 년 전에 한 번 왔던 기억이 나네요.
안에 들어가면 서양식 정자인 가보제가 있고
뒤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날이 많이 풀렸는데도 음지라서 그런지 얼음이 꽝꽝 얼었네요.
참 결이 예쁜 큰 소나무도 있습니다.
입구에서 연락처를 적고 입장했습니다. 마침 다른 관람객 분이 있어서 뒤에서 설명을 조용히 들었습니다. 젊은 여자분이 설명을 하는데 처음에는 도슨트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진가 본인이시네요.
전 은퇴한 중년 분이 사진을 취미로 배운 후에 사진 전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사진 배우고 촬영한 지 3년밖에 안 되었다는 말에 중년 분 인줄 알았네요. 중노년 풍경 사진가들이 참 많고 지금도 많은 사진을 취미로 하거나 사진을 업으로 하는 풍경 사진가 분들이 많습니다.
윤재선 사진가는 사진작가라고 소개하지 않고 사진가라고 소개하네요. 서문에 '사진가 윤재선'으로 나옵니다. 사진가와 사진작가 별 차이 없이 사용하지만 좀 차이가 있습니다. 사진가는 기록 사진이든 상업 사진이든 내 생각과 사상이나 들어가지 않고 어쩐 주제의식도 없는 사진을 찍는 사람을 사진가라고 하고
사진을 통해서 어떤 주제와 내 주관과 사상과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목적으로 촬영한 사진은 작품 사진이고 그 작품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사진작가입니다. 따라서 전 사진을 찍지만 사진작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냥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기록 사진을 담는 분을 사진작가라고 하긴 어렵죠. 그냥 풍경 사진가, 풍경 기록 사진가입니다.
그런 면에서 윤재선 사진가는 스스로 사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전시회 둘러보니까 사진작가님이시더라고요. 제가 이 사진전에서 크게 놀란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2017년부터 카메라를 들었는데 이렇게 사진을 잘 찍다니
윤재선 사진작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 그냥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가 사진작가가 된 분 인줄 알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카메라를 본격적으로 든 것이 2017년입니다. 2015년 6월 북유럽 백야를 보고 2017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 수화통역사 일을 그만둡니다.
이후 2017년 북유럽, 동남아시아, 일본, 한국을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사진은 덴마크 페로 제도입니다. 여기는 갤럭시 노트 8 광고에 나오고 많은 여행가들이 좋아하는 대서양 한가운데 떠 있는 섬으로 1년 300일 비가 옵니다.
한국의 성산일출봉 같이 낮은 풀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날씨 변화가 심해서 다이내믹한 풍경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 페로제도를 촬영한 사진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이 윤재선 사진작가는 독립출판사 사장님이시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캘리그래피까지 합니다. 그냥 사진 시화집을 혼자 다 만드는 분이시네요.
윤재선 사진작가의 블로그에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예쁜 사진들과 캘리그래피가 가득하네요
이런 걸 보면 사진은 오래 공부하고 오래 찍는다고 모두 잘 찍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사진을 자세히 보면 기술적인 보강이 필요한 사진들이 있긴 합니다만 사진 품질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사진은 찍어야 합니다. 찍고 찍고 찍으면 실력이 금방 금방 너네요.
이 사진은 울산바위를 촬영한 사진인데 주유소가 있는 도로변에서 새벽 시간에 촬영한 사진으로 3시간 이상 걸렸다고 하네요. 참 대단하죠.
시각과 후각을 공유하는 사진전 '밤, 향기'
사진들은 큰 사진도 있지만 태블릿 크기만큼 작은 사진들이 가득 붙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액자에 넣고 사진을 전시하는 사진전이 줄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유리 액자는 사진 보는데 방해되는 요소입니다. 사진 보려고 딱 섰더니 내 얼굴이 비추면 흠찟 놀라죠. TV 보는데 어두운 장면에서 TV에 내 얼굴이 나오면 기분이 좋겠어요?
그래도 액자만 두른 사진전이 있지만 그 액자도 솔직히 꽤 비쌉니다. 그런데 사진을 인화가 아닌 프린팅 하는 시대가 되고 액자 없이 전시를 하고 그중 구매자가 나타나면 원하는 사이즈와 액자에 담아서 판매하기도 합니다.
이 '밤, 향기' 사진전이 놀라웠던 점은 사진과 함께 향기도 전시합니다. 윤재선 작가님이 직접 조향사에게 사진 촬영 당시의 풍경을 이야기하고 그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향을 만들어서 사진을 설명하면서 그 앞에 향을 뿌립니다. 시각 전시회인 사진에 향기까지 더하니 그 분위기가 더 짙어지네요. 이런 전시회를 처음 경험합니다. 향기와 시각을 함께 공유하네요.
지금은 조향 기술이 뛰어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사진에 향기 정보까지 담고 향기까지 발산하는 디스플레이나 장치가 개발되면 사진전시회는 또 다른 혁신이 다가올 듯합니다.
예를 들어서 페로 제도 촬영 당시에 맡은 바다향기와 풀 냄새 등등이 섞인 독특한 냄새가 있고 그 향기까지 공유하면 좀 더 사진은 풍부한 감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사진 제목을 이으면 문장이 퇴고 사진 톤으로 사진들을 배치하다
이 전시회 '밤, 향기'는 사진들을 무작위로 배열한 건 아닙니다. 처음에는 대륙별로 여행 사진을 모았나 했는데 북유럽 사진 속에 한강 세빛섬 사진이 있네요. 그럼 대륙별 배치가 아닌데 뭐지 했는데 사진 색톤을 배치했습니다. 보시면 오른쪽은 푸르스름한 매직 아워 톤이 있고 가운데 사진은 붉은 톤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사진 톤으로 정렬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진 제목들을 쭉 이으면 문장이 됩니다. 아주 감각적인 전시회네요. 물론 사진 1장만 뚝 뜯어서 보게 되면 제목이 좀 뚱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최대한 사진의 주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 제목이라는 것이 뭔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가 다른 이름 지어주면 되죠.
이 '밤, 향기'는 존 보틀의 <잃어버린 밤을 찾아서>의 어둠의 단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이 아닌 사진들도 꽤 있었습니다. 밤의 단계까지는 느끼지 못하지만 밤으로 향하는 단계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저도 이 윤재선 사진작가의 이 사진전을 보니 밤에도 단계가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명동의 오후 7시, 오후 9시, 오후 11시, 새벽 1시, 새벽 3시 풍경이 다를 겁니다. 가장 깊은 밤의 단계는 해가 뜨기 전인데 이때가 대략 새벽 3시 이후입니다. 새벽 3시 이후의 서울 주요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수년 전부터 하고 있다 하지 못했는데 올해는 꼭 해봐야겠습니다.
사진들을 엮은 슬라이드 쇼와 잔잔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영상실도 있었습니다. 물어볼 것이 꽤 있는데 시계를 보니 현대미술관 서울관 예약 시간이 가까워져서 후다닥 나왔습니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영상까지 다 보고 오는 건데요.
영상과 함께 바람소리, 소쩍새, 올빼미, 귀뚜라미 등등의 자연의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윤재선 사진작가는 자신이 촬영한 여행 사진을 묶고 직접 시 같은 문장을 넣어서 사진집을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넘겨보니 사진도 예쁘고 글도 예뻐서 선물용으로 주기 딱 좋은 사진집이네요. 누군가 힘들고 어렵고 고단해 보일 때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아름다운 풍광과 글을 담은 사진집이 그 사람에게 큰 힘이 될 겁니다.
죽기 전에라는 말을 너무 싫어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니라면서 저기는 꼭 가보아야겠다는 목표가 생기잖아요.
굿즈들도 많이 있더라고요.
전시장소는 삼청동 한벽원 미술관이고
전시기간은 2021년 2월 21일(일) 오전 10시~18시까지인데 설 연휴인 2월 11일~14일까지는 휴관합니다.
주차는 1시간 무료입니다. 오랜만에 좋은 사진작가도 알게 되고 좋은 사진전, 기묘한 사진전도 봤네요.
사진들은 blog.naver.com/yuntpop/222229721998 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