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항상 밝습니다. 지나간 추억 떠올려보면 다들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짓게 됩니다. 이게 좋은 기억만 기억하는 추억 보정을 이용한 상술도 영화도 참 많습니다. 그래서 잘 만든 추억을 소재로 한 영화는 칭찬을 받음을 넘어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는 가족 영화가 되지만 못 만든 추억 소재 영화는 추억팔이 영화라고 폄하됩니다.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는 초반에는 전형적인 추억팔이 영화로 보는 내내 지루해서 더 봐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영화 중반의 반전부터 영화가 같은 영화가 맞나 할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네요. 전반과 후반이 너무 달라서 당혹스러울 정도입니다. 전반만 보다가 페이스북에 너무 재미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글을 남기자마자 반전이 일어났고 이후 내용은 그런대로 꽤 괜찮게 흘러가다가 나도 모르게 푹 빠져서 봤네요. 0과 1의 영화 같네요. 전반은 0 후반은 1인 영화 <20세기 소녀>입니다.
너무 어설픈 1999년 재현에 몰입이 안 되었던 20세기 소녀
<20세기 소녀>는 1999년 서울이 아닌 청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현재의 보라(한효주 분)는 모델인지 성우인지 모르겠지만 방송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등학교 당시 방송반을 한 것이 영향을 준 듯합니다. 이 보라에게 외국에서 온 소포가 배달됩니다. 그 소포에는 이정재 주연의 <정사>라는 성인 영화 비디오가 담겨 있었습니다.
보라 비디오 딸내미 보라는 한순간 1999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시작됩니다.
나보라(김유정 분)은 고등학생 1학년으로 단짝 친구인 연두(노윤서 분)의 부탁을 받습니다. 심장 수술 때문에 미국으로 나가 있는 사이에 자신이 짝사랑하는 백현진(박정우 분)이라는 동급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보라는 백현진을 발견하고 몰래 백현진을 뒷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조사한 결과는 다음 메일로 연두에게 보냅니다.
그렇게 절친 연두를 위해서 보라는 백현진을 관찰하다가 백현진의 친구인 풍운호(변우석 분)에게 들킵니다.
풍운호는 백현진을 짝사랑하는 듯한 보라를 모른척 해주면서 살갑게 대해줍니다. 그러나 보라는 이 자초지종을 풍운호에게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냥 몰래몰래 백현진을 조사합니다.
백현진을 몰래 관찰하기만 하던 보라는 백현진이 싸움에 휘말렸다는 소리에 어렸을 때 배운 무술을 이용해서 백현진을 구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풍운호, 백현진, 나보라는 친한 친구가 됩니다. 나보라는 백현진 보고서를 연두에게 보내려다가 오히려 백현진에게 고백을 받습니다. 이에 나보라는 백현진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좋아한다고 해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연두가 좋아하기 때문이죠.
다행스럽게도 나보라는 백현진이 아닌 풍운호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풍운호와 나보라는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흔한 청춘 드라마입니다. 문제는 <20세기 소녀>는 전반부에 몰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먼저 제작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실외 촬영을 해야 현실감이 있고 추억의 마중물이 되는데 버스 실내 장면도 여러 장면이 너무 실내에서만 촬영했네요. 코로나 때문이고 최근 파주 인근에 대형 스튜디오들이 많아서 야외 촬영 대신 실내에서 많은 장면을 촬영한다고 해도 적당히 해야죠. 너무 실내 실내 한 장면이 많습니다.
게다가 영화 화질이 좀 이상합니다. 배우들의 얼굴에 노을이 드리우는데 얼굴이 오렌지 색을 칠해 놓은 듯 계조가 엉망입니다. FHD로 보는데도 얼굴 계조가 깨지는 것을 보면서 과한 후보정인가? 할 정도로 전체적으로 몰입이 안 됩니다. 1999년 고증도 그래요. 1999년을 고증하려면 물건이나 소품이나 장소들이 어느 정도 허름해야하는데 온통 새삥입니다. 온통 새것이다 보니 세트장 티가 너무 확 나네요. 다만 추억팔이 물건들 잔뜩 보여주지 않아서 좋았지만 그럼에도 1999년 추억을 돌려볼 수 있는 에피소드나 소품 나열이 전반부에 가득 펼쳐집니다. 1999년을 재현한 영화가 아닌 99년 필터를 낀 인스타그램 사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았던 점은 서울이 아닌 청주라는 지방 도시를 소재로 했다는 점입니다. 청주 공군기지의 전투기들의 에어쇼나 청주를 연상케하는 소품을 좀 넣었는데 좀 더 많이 푸짐하게 넣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보다 보면 이게 서울 여고생 이야기인지 청주 여고생 이야기인지 쉽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사투리도 잘 들리지 않고요. 물론 충청도 소녀라고 해서 사투리를 다 쓴다고 할 수 없지만 지역색을 좀 더 넣었으면 어땠을까 해요. 그럼에도 지루하고 집중 안 되는 전반부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건 김유정 때문입니다.
난 젊은 배우중에 젤 예쁜 배우가 김유정이라고 생각해요. 처음 볼 때부터 천상 배우 얼굴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재미있게도 김유정 배우의 출생 연도가 1999년이네요. 자신이 태어난 해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연기도 잘하고 예쁘고 김유정 배우의 힘으로 20세기를 달리는 소녀 같았습니다.
후반 반전과 함께 찾아온 사랑과 우정사이를 담은 <20세기 소녀>
영화 중반까지 집중해서 보기 어려워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대충대충 보다가 연두가 다시 귀국하면서 이야기가 크게 진동을 합니다. 스포라서 소개는 안 하겠지만 영화 차태현, 이은주, 손예진 주연의 꽤 잘 만든 추천 로맨스 영화 <연애소설>과 비슷한 트릭이 던져집니다. 이후부터 사랑과 우정이 진하게 펼쳐집니다.
여기서부터 공감이 터집니다. 10대나 20대나 가장 큰 고민은 진로, 진학이지만 더 큰 고통은 사랑과 우정입니다. 사랑을 택하냐 우정을 택하냐 이것 때문에 엄청난 고민을 하지만 팁도 없고 설명서도 없습니다. 각자의 선택, 각자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느낀 환희와 고통은 평생 기억됩니다. 보라도 연두도 그리고 백현진도 풍운호도 이 고통 속에서 자신들의 진실과 진심을 확인하는 과정이 꽤 잘 담겼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후반 이야기입니다.
누워서 보다가 정자세로 후반을 영접했습니다. 영화가 후반에 훅이 강하게 들어오네요. 마지막 비디오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할 명 장면입니다. 왜 20세기 소녀인지와 1999년 12월 31일이 같이 떠오르네요. 1999년 12월 31일 모두 노스트라다무스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새벽에 집으로 향했던 그 기억이요. 사실 그날이 다 그날이죠. 인간이 숫자를 만들어서 기념을 하는 것이지만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 버리면 기억할 날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의미를 만들고 의미를 찾을 때 우리는 기억으로 저장하니까요. 그런데 20세기는 1999년이 끝이 아니죠. 2000년까지가 20세기입니다. 그래서 당시 좀 혼란스러웠어요. 1999년에서 2000년 큰 숫자가 넘어갈 때 엄청난 행사를 했거든요. 그런데 1999년이나 2000년이나 둘 다 20세기입니다. 별 의미할 일이 아닙니다만 전 세계 사람들은 새천년이라고 엄청난 축포를 올렸습니다. 정작 21세기 시작인 2001년 1월 1일은 상대적으로 조용했고요.
영화 <20세기 소녀>는 이 1년을 허투로 담지 않았습니다. 새천년을 보내고 2001년 1월 1일을 기념하면서 20세기 소녀를 말합니다. 이 디테일 때문에 더 푹 빠지게 되네요. 전반부와 후반부가 이리 다르다뇨. 물론 강추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구멍이 꽤 많이 보이고 추억팔이와 몇몇 영화를 섞은 느낌도 많이 납니다만 후반에는 배우들의 열연과 내 사적인 기억과 링크가 되니 영화가 참 곱게 보이네요. 볼만한 영화입니다. 초반보다 실망하지 마시고 쭉 보시면 후반에 꽤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멜로 추억 드라마입니다. 참! 까메오도 꽤 많이 나옵니다. 순간순간 어~~ 소리가 좀 나옵니다.
별점 : ★★★
40자 평 : 21세기를 살면서 20세기에 첫 사랑을 만난 그대들을 위한 추억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