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제2의 전성기였던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는 정말 엄청난 영화들이 참 많이 나왔습니다. 문화 산업이라는 것이 사회의 활력과 자유도가 높았지만 가꾸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는 야생화처럼 자체적인 자생력을 가지고 전 세계로 자연스럽게 퍼집니다.
김대중 정부의 문화 융성 정책 덕분인지 90년대말부터 불어온 한국 영화 제2의 르네상스 속에서 피어난 한국 명작 영화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몇몇 영화는 20년이 넘어도 그 영화의 영향권이나 그 영화를 뛰어넘는 영화들이 나오지 않고 있네요.
2001년 개봉한 엽기적인 그녀를 다시보다
<엽기적인 그녀>가 넷플릭스에 떴기에 무심하게 봤습니다. 이 영화 한 3번은 봤던 것 같네요. 그럼에도 또 봤습니다. 보고 싶어서 끌려서 본 것보다는 <킹덤 : 아신전>의 전지현을 보고서 전지현의 과거 영화들을 둘러보다가 이 영화에 꽂혔습니다. 물론 제 20대 시절의 모습도 그립기도 했고요. 음악이 4분짜리 타임머신이라고 하면 영화는 2시간짜리 타임머신입니다. 여운은 음악보다 더 길고요.
한 10년 만에 다시 본 <엽기적인 그녀>를 보면서 생각보다 많은 걸 느끼고 깨닫고 분석하고 찾아보게 되네요. 당시에는 몰랐던 점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검색을 해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점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못 본 장면들이 꽤 보입니다. 뭐지? 이 장면이 있었나? 개봉 당시는 없었는데 DVD판에 넣은 장면도 좀 보이네요.
PC 통신에서 연재하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엽기적인 그녀>
WWW라고 하는 월드 와이드 웹이 나오기 전에는 모뎀을 연결해서 사용하는 PC 통신이 유행했습니다. 90년대 초에 나와서 90년대 후반까지 인기가 아주 높았던 서비스였죠. PC통신 3대 장인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중에 나우누리에 김호식이라는 분이 자신이 만난 여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90년대 후반에는 막 인터넷이 피어나던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유명 라디오 DJ가 된 김어준이 '딴지일보'를 운영하던 시기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딴지일보에서 엽기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당시 유행어 중 하나가 엽기였습니다. 보통 유행어는 개그맨이나 드라마 주인공이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인터넷에서 퍼진 유행어가 바로 엽기였습니다. 그래서 엽기 토끼 마시마로나 엽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호식 작가도 거기에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하네요.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엽기라기보다는 쾌활한 그녀, 과격 발랄한 그녀 정도입니다. 이 소설이 PC 통신에서 대박이 나고 한국 로맨스 영화의 1인지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미장센으로 유명했던 '곽재용' 감독이 연출을 합니다. 곽재용 감독은 <비 오는 날의 수채화>로 유명했는데 이 영화는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가 별로였지만 장면을 만드는 미장센과 음악은 꽤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음악만 남은 영화이기도 하죠. 이 스토리의 부실함은 김호식 작가의 경험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자 아주 탄탄해집니다.
시대 배경은 90년대 후반 어느 무렵입니다. 인천행 1호선 전철을 타고 가던 그녀는 술을 많이 마셨는지 오바이트를 하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영화에서 이름이 안 나옵니다. 이게 좀 독특하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견우의 시선으로 담긴 이야기입니다. 견우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고 전체적으로 견우가 그녀를 지켜본 이야기입니다.
오바이트를 하려는 그녀가 갑자기 입맛을 다십니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가 범상치 않음을 보여줍니다. 누구나 한 번은 이런 경험 아닌 경험이 있잖아요. 이걸 영화에 담습니다. 이런 디테일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이 선남선녀로 그리지 이렇게 초반부터 망가지는 그것도 심할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담지 않죠.
그리고 할아버지 머리 위로 오바이트를 합니다. 보통 오바이트를 해도 토사물을 보여주지 않는데 이 영화는 이 에피소드가 가장 강력하고 두 남녀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것이라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면 다소 충격적인 모습일 수 있지만 차태현이라는 시럽과 전지현의 미모의 짜릿함까지 섞여서 결코 미운 장면이 아니고 오히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 속으로 푹 빠집니다. 이 에피소드는 상상으로 만들기 어려운 이야기죠.
그녀가 술에 취해 쓰러지면서 견우를 보고 자기야!라고 부릅니다. 졸지에 애인이 된 견우는 술이 떡이 된 그녀를 업고 모텔에서 재웁니다. 생판 모르는 여자를 업고 여관에 재운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는 일이죠. 그냥 경찰에 전화해서 경찰에 집 보내달라고 하면 되지만 견우는 그녀를 데리고 여관에 들어가고 샤워까지 하고 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견우의 고운 심성을 보면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걸 지어낸다고 해도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기도 하죠. 그래서 오히려 더 이 첫 만남에 푹 빠지게 됩니다. 경찰까지 출동하게 되고 견우는 의심을 받고 구치소에 잠시 갇힙니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은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날 전화를 하더니 만나자고 합니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들을 작정인가 봅니다. 그런데 보자마자 반말을 합니다. 견우가 1살 더 많지만 신경 안 씁니다. 콜라 마시겠다는 데 커피 먹으라고 합니다. 막무가내 막무가내입니다. 예의 없는 왈패 같지만 견우는 그녀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이상형이니까요.
두 번째 만남에서 술자리를 했지만 술 3잔 먹고 인사불성이 됩니다. 또 업고 모텔에 재웁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됩니다.
애인인지 친구인지, 썸 영화의 시조새 같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
그 나이가 되면 항상 하는 고민들이 있습니다. 친한 이성 친구가 친구인지 사랑인지 헛깔리죠. 그래서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청춘들이 참 많습니다. 이 영화가 딱 그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없던 단어인 썸입니다.
차태현이 연기하는 견우는 그녀가 이상형의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좋아하지만 왈가닥에 ""하늘이 왜 파란 줄 알아? 내가 원했기 때문에! 왜 불이 뜨거운 줄 알아? 내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하는 그녀가 아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견우가 그녀 옆에 있어주려고 하는 이유는 그녀가 사귀던 전 남자 친구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가 아물 때까지 옆에 있어주는 것이죠.
이는 그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등쌀에 맞선을 보긴 하지만 전 남자 친구를 잊지 못합니다. 이걸 견우도 잘 알죠. 견우와 함께 지내면서 밝게 웃지만 그 웃음 뒤에는 깊은 슬픔이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는 친구 이상의 관계로 지내지만 애인이라고 하긴 어려운 친구도 애인도 아닌 관계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이 친구와 연인 사이의 줄다리기를 그립니다. 이젠 흔한 공식이 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영화들의 흔한 클리세이죠.
그런데 <엽기적인 그녀>는 좀 다릅니다. 경험담을 바탕으로 했는지 너무나도 공감이 갑니다. 견우는 그녀가 너무 좋은데 너무 좋지만 그녀가 잊지 못하는 전 남자 친구에 고통받는 그녀를 안을 수 없습니다. 그냥 묵묵히 기다리거나 다 잊길 기다리죠. 반면 그녀도 과격하고 견우를 쥐락펴락하지만 견우가 너무 고마운 존재라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전 남자친구를 잊지 못합니다. 견우와 사귀는 것은 전 남자친구에 대한 배신이라고 느껴지니까요.
여러모로 견우의 배려심이 하늘보다 깊고 넓습니다. 이런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 하지만 순정적인 남자들 꽤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이 영화가 무척 공감이 많이 갔을 겁니다.
여성이 주도하는 연애 이야기를 담은 다소 혁신적이었던 <엽기적인 그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2001년 개봉 당시 남녀 연애에서 여성이 주도하는 연애를 담은 멜로 영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1987년 개봉한 강수연, 박중훈 주연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가 기억에 있지만 철수와 미미도 그냥 둘 다 맹랑한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녀와 견우는 견우가 쥐어 잡혀 지낸다고 할 정도로 커피 마시면 커피 마셔야 하는 관계입니다. 이런 여성이 주도하는 멜로 영화는 아주 신선했고 전 세계에서 이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녀의 활기 넘치고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독보적인 캐릭터의 신선함은 이후 나오는 많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영향을 주었고 일본 인기 애니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에피소드 위주로 이루어진 코믹 멜로와 달콤함과 찐득함이 섞인 <엽기적인 그녀>
<엽기적인 그녀>는 전체적인 서사가 있지만 두 주인공의 푸릇푸릇한 연애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차가 없는 대학생 커플이라고 지하철에서 만나서 그런지 지하철 장면이 참 많습니다. 지하철 장면은 대중교통이다 보니 참 익숙하고 친근합니다. 그리고 명 장면들도 여기서 많이 나오죠. 가장 웃겼던 장면은 지하철에서 딱밤 맞기 내기였는데 이 장면은 두 배우의 매력이 아주 담기고 이 영화가 왜 인기가 높았던 영화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엽기적인 그녀>의 기본 태도는 코미디입니다. 코믹스러운 장면들이 꽤 많고 타율도 높습니다. 신촌에서 낮술을 먹던 예쁜 여자를 보고 호기롭게 그녀를 뒤따라 갔다가 말을 걸었는데 그게 그녀였던 장면이나 서울랜드 탈영병 에피소드 등등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달달한 연애라고 하도 모두가 웃고 즐거워하는 에피소드로만 채우긴 어렵죠. 이에 그녀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라는 설정을 넣어서 어디서에서 많이 본 듯한 해외 영화들을 짜깁기 한 '데몰리션 터미네이터' 같은 시나리오를 실사화해서 보여줍니다. 이러다 보니 멜로 영화이지만 액션 장면도 꽤 있습니다.
이 설정이 다소 부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있고 비현실적인 점은 있지만 다소 빈약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해주네요.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이 영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100편의 영화 같은 A급 영화에 들어가지 못하고 철저히 대중성을 노린 B급 멜로 코믹 영화에서는 탑 티어 영화임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10년 만에 다시 보는데 여전히 재미있고 흥미롭네요.
참 예쁘고 지금도 예쁜 전지현
인간 전지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스크린과 TV로 보는 전지현의 연기를 보다 보면 이건 전지현이 최고다라고 하는 연기가 있습니다. 바로 발랄하고 활기찬 연기로는 전지현이 지금도 최고입니다. 그렇다고 멜로 연기를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 <시월애>의 전지현을 보면 멜로 연기도 잘합니다. 다만, 연기가 엄청나게 뛰어난 느낌은 없습니다. 그리고 전지현은 연기보다 미모죠.
그럼에도 다시 본 <엽기적인 그녀>의 몇몇 장면은 전지현이 아니면 누가 할까 하는 장면들도 꽤 많습니다. 경로석에 앉아 있는 청년을 말과 표정으로 날려 버리는 모습이나 견우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가 통화가 안 되어서 우는 장면이나 산에서 견우에게 "견우야 미안해, 나도 여자인가 봐"라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전지현이 참 연기를 맛깔스럽게 잘한다는 느낌도 많이 듭니다. 여기도 춤도 참 잘 추는 배우가 전지현이죠.
전지현을 한 방에 인기 배우로 만들어준 <엽기적인 그녀> 이후 그녀의 필모그래프를 보면 <엽기적인 그녀>의 프리퀄 같은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까지는 좋았는데 영화 <데이지>로 추락합니다. 이후 다시 CF 스타로만 사는 듯하다가 <도둑들>, <암살>까지 빅히트를 칩니다. 이제는 좀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전지현입니다. 그럼에도 박중훈이나 류승범처럼 까불거리고 천방지축 연기를 가장 잘합니다.
10년 만에 다시 보면서 또 한 번 느끼지만 전지현이 아니면 이 연기를 누가 할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참 예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차태현의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연기도 좋고요. 이런 좋은 영화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국 아이돌 걸그룹 출신의 배우가 발음도 안 되는 한국어로 연기를 해서 망쳐버린 걸 보면 너무 화가 납니다.
<엽기적인 그녀>의 깨알 같은 재미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소개 안 하려다가 이 영화를 안 본 분들도 있고 지금 10,20대 분들은 안 본 분들이 많아서 적어보자면 이 영화에는 여관 주인 역할로 나온 배우 '김일우'가 무려 1인 5역을 합니다. 영화 초반 여관에 독수리5형제처럼 키우고 싶다는 뉴스 기사가 나옵니다. 그 다섯 쌍둥이가 영화 중간중간 나옵니다. 이 5명을 찾는 재미도 솔솔 합니다.
타임캡슐을 묻는 곳은 곽재용 감독이 직접 발굴한 촬영 장소입니다. 영화에서는 나 홀로 나무와 함께 산에서 내려다보면 기차역이 나옵니다. 아주 풍광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2000년대 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면도 많습니다. 지금은 거의 못 본 그러나 당시 유행했던 스쿼시나 검도도 인기가 높았는데 이 장면도 볼 수 있습니다. 영화 후반에 그녀의 전 남자친구도 나오는데 이 남자친구 연기를 한 사람이 차태현입니다. 실루엣만 나와서 잘 모르는데 눈썰미 좋은 사람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전 남자친구가 차태현은 아니고 급하게 찍다 보니 차태현이 연기한 듯하네요.
뜬금없는 장면도 좀 있긴 하죠. 타임캡슐에 두꺼비가 나오는 장면은 현타가 오게 합니다. 현실 기반 멜로로 보고 있는데 갑자기 공상이 펑하고 터집니다. 그런데 중국의 무덤에는 두꺼비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일이 많다고 하네요. 그렇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인데 이런 장면은 삭제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더 하자면 탈영병 장면에서 탈영병이 초반에는 K-1 소총을 들고 있다가 후반에는 M4 소총으로 바뀝니다. 인질 구출 장면도 어설픈 모습도 많고요.
다시 보니 크게 보인 건 엽기적인 그녀의 음악감독인 김형석
A급, B급을 구분하기 쉽지 않지만 대중 지향적인 면을 보면 확실히 곽재용 감독은 B급 대중영화를 참 잘 만듭니다. 깊이감은 좀 약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엽기적인 그녀>도 다시 봤다고 해서 더 재미있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영화는 내 연륜이 늘어가다 보니 영화는 변하지 않지만 내가 변해서 달리 보이고 안 보이던 것도 보이게 하는 장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창동 감독 영화를 너무 좋아해요. 다만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이런 대중성 높은 코믹 멜로 영화가 요즘에는 멸종하고 나와도 <엽기적인 그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상대적으로 요즘 나오는 코믹 멜로 영화들이 재미가 없다 보니 오래된 영화가 더 가치가 느껴지게 되네요.
게다가 전지현은 다시 부활할 듯하고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차태현과 곽재용 감독은 전성기가 이 영화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곽재용 감독은 이후 <클래식>까지는 좋았는데 <데이지>로 크게 데이고 이렇다 할 영화들을 보여주지 못하네요. 2016년 개봉작 <시간이탈자>는 참 재미없게 본 시간여행 영화였어요. 차태현도 <신과함께 - 죄와 벌>로 다시 부활하지만 예전만큼의 인기를 끌지는 못해요. 감독, 두 배우 모두 꽃다울 때 찍어서 더 아름답게 보여지기도 하네요. 물론 제 20대 시절도 녹여져 있고요.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은 음악입니다. 그냥 영화가 재미있고 발랄해서 기억에 많이 남은 한국 대중 코믹 멜로 영화의 정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노래들이 너무 좋아요. 위 노래 기억나세요. 영화는 안 봐도 이 노래는 각종 방송이나 예능 심지어 유튜버들도 참 많이 애용하는 노래죠. 참 간단한 노래인데 너무 경쾌해서 좋아요.
이 노래 작곡가 김형석이 만든 곡입니다. 수많은 인기곡을 작곡한 김형석 작곡가가 이 <엽기적인 그녀>의 음악 감독이었네요.
<엽기적인 그녀>의 인기는 중국, 일본,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미국에서는 리메이크까지 했습니다. 리메이크한 외국 영화들은 대부분 망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재미지만 전지현 같은 여배우를 찾아야 합니다. 찾지 못하면 망하죠.
이 인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음악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가 코믹스럽기도 하면서도 그녀가 전 남자 친구를 잊지 못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서정 넘치는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바로 또 감성 충만하게 됩니다. 코믹과 멜로 전환이 쉽지 않은데 한국 최고의 멜로디 꾼인 김형석 작곡가의 노래들이 큰 역할을 합니다.
개그맨 김진수의 아내인 양재선 작사가와 김형석 작곡가가 만든 주제곡인 'I Believe'는 중국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끕니다. 이 노래는 김형석 작곡가가 직접 불렀다가 감독이 마음에 안 들어하자 신승훈을 섭외해서 신승훈이 부릅니다. 이 당시 신승훈은 인기가 많이 떨어졌던 시기인데 이 노래로 다시 떡상하게 됩니다. 주제곡만 좋은 게 아닌 다른 곡들도 참 좋네요.
'I Believe'는 <엽기적인 그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명장면인 십계명 장면에서 나옵니다. 전지현의 맞선 남에게 견우가 그녀에 대한 십계명을 말합니다. 견우가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신경과 노력을 했는지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주고 그녀는 다시 한번 견우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도 느끼게 됩니다.
다시 보니 <시네마천국>처럼 연장전 부분은 뺐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영화는 전반전, 후반전 그리고 연장전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장전은 원작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원작은 그녀와 헤어진 후 쓴 pc통신에 연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대중을 위해서인지 흥행을 위해서인지 연장전까지 넣게 되네요. 그게 관객들을 위한 배려일 수도 있지만 지금 다시 보니 너무 달짝지근하네요. 우연이라는 비난을 의식했는지
"우연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놓아주는 운명의 다리입니다"라는 대사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면 이 부분은 뺐을 겁니다. 그래야 여운이 더 길고 그게 더 현실적입니다. 헤어져야 아쉬운 것이지 완성되면 뭐가 아쉽겠어요. 여운도 없죠.
곽재용 감독의 스타일도 연장전이 맞을 겁니다. 그럼에도 지하철 플랫폼에서 술에 취해서 다가오는 전철에 몸을 부딪힐 것 같은 그녀가 견우를 통해서 아픈 상처를 치유받고 다가오는 지하철 소리에 뒤로 물러나서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하는 장면. 이런 장면들이 더 많고 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에도 이만한 대중적인 코믹 멜로 없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도 없습니다. 오랜만에 본 <엽기적인 그녀>는 여전히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영화네요. 안 본 분들이면 적극 추천하는 영화, 호오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별점 : ★★★☆
40자 평 : 여전히 독보적이고 엽기적인 그녀의 재미와 음악과 전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