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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발견한 숨겨진 명작 멜로영화 '그해 여름'

썬도그 2021. 8. 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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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하는 영화도 적은 요즘에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참 많죠. 그중 하나가 흘러간 명작 영화를 보는 겁니다. 본 영화를 다시 봐도 좋지만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영화 중에 안 본 영화들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 <기억의 밤>을 연출한 장항준 감독은 요즘 한국에서 가장 인기 높은 감독입니다. 저는 2000년대 초 MBC 라디오 '윤종신의 2시의 데이트'에서 처음 알게 된 장항준 감독이 진행하는 '어수선한 영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다시 큰 인기를 얻고 있어서 아주 아주 흐뭇하네요. 

장항준 감독이 요즘 인기를 다시 얻은 것은 장항준 감독 특유의 뛰어난 입담도 입담이지만 아내 김은희 작가의 인기도 한몫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 드라마 작가 중 최고인 김은희 작가는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백댄서 출신에 방송 작가였던 김은희 작가가 세계적인 작가가 된 것은 정말 신기하고 놀랍니다. 그런데 이 김은희 작가의 데뷔작이 뭔지 참 궁금했습니다. 

놀랍게도 장르물이 아닌 멜로물이었네요. 2006년 개봉한 영화 <그해 여름>이 김은희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이 <그해 여름>은 많은 사람들이 좋은 영화라고 칭송을 했지만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매주 즐겨듣는 징항준, 송은이가 진행하는 영화 팟캐스트 <씨네마운틴>에서 <그해 여름>을 다루기에 냉큼 다운 받아서 봤습니다. 오래된 영화가 좋은 건 유료 다운로드 가격이 아주 저렴해요. 단돈 1천 원을 내고 봤습니다. 

2007년 춘사국제영화제 작품상, 감독상을 받은 영화 <그해 여름>

춘사영화제는 한국영화감독협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의 영화 시상식으로 그 가치가 아주 높습니다. 감독들이 주는 상이면 작품성은 인정받았다는 소리죠. 

2007년 춘사영화제의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조연상, 신인여우상, 음악상을 <그해 여름>이 받았습니다 .이 2006년 개봉 영화 중에는 <가을로>와 <미녀는 괴로워> 같은 영화들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만 아쉽게도 작품상을 받은 <그해 여름>은 관객은 약 30만 명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그해 여름>을 연출한 감독은 조근식 감독으로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최고의 영화인 <품행제로>를 연출한 감독입니다. 우울할 때 유튜브에서 <품행제로>를 가끔 보는데 볼 때마다 빵빵 터집니다. 조근식 감독이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받은 <그해 여름>을 드디어 봤습니다. 

1969년을 배경으로 한 부유한 대학생의 농활과 로맨스를 다룬 <그해 여름>

영화가 시작되면 방송국 다큐멘터리 PD가 언성을 높이면서 방송작가를 닥달합니다. 방송작가 수진(이세은 분)은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서 윤석영 교수에 관한 취재를 제안합니다. 윤석영 교수(이병헌 분)에게 수진은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주겠다는 제안을 하죠. 방송 출연에 거북해하던 윤석영 교수는 흰머리 흰 수염 사이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윤석영 교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하고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1969년 대학생인 윤석영으로 넘어갑니다. 1969년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로 3선 개헌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한국은 대통령 단임제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을 최대 3번까지 할 수 있게 단임제로 된 헌법을 뜯어 고치려고 합니다. 이에 전국 대학생들은 연일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윤석영은 이런 시국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먹고 놀자 대학생이 기본자세고 친구와 선배들이 시위를 하기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시위에 참여합니다. 단체 미팅 같은 건 좋아하죠. 

건설업을 하는 부자 아부지를 둔 윤석영은 여름마다 의례적으로 가는 농촌봉사활동을 따라갑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 같은데 80년대 후반까지 대학생들은 여름방학 때 알바 대신 농촌에 내려가서 농촌 일을 돕고 농촌 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는 등 농촌계몽운동 비슷한 일을 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자의식이 무척 강했고 선민의식도 강해서 시위도 적극적이고 농촌 같은 자본주의의 그늘에 있는 지역에 자비를 들여서 찾아가서 각종 궂은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 윤석영은 멀뚱하게 봤습니다. 쉽게 말하면 뺀질이였습니다. 뺀질거리기만 하던 윤석영 눈을 커지게 하는 사람을 알게 됩니다. 바로 서정인(수애 분)입니다. 

서정인은 마을의 자랑인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서입니다. 글을 모르는 농촌 사람들이 많았던 동네에 마을 도서관은 지식을 전파하고 글을 읽고 읽는 재미를 알게 해주는 곳이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정인이를 보고 빨갱이 딸이라고 수군거립니다. 정인은 아버지가 월북했는데 이 꼬리표 때문에 연좌제로 큰 고통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석영은 정인을 보자마자 반합니다. 정인도 석영이 추근거리는 것 같지만 딱히 부담스럽거나 거북스럽지는 않습니다. 석영은 귀동냥으로 정인이 빨갱이의 딸이라는 걸 알지만 그게 석영에게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두 사람은 빈집에 앉아서 불어오는 편백나무 향을 맡으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웁니다. 둘은 시내에 나갔다가 막차를 놓치게 되고 두 사람은 투벅투벅 먼 거리를 걷게 되고 두 사람은 점점 감정이 깊어집니다. 

달에 사람이 간 세상에서 이념 전쟁의 고통을 받던 청춘을 그린 <그해 여름>

정인과 석영은 학교 운동장에 세운 간이 야외 영화관의 영화를 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석영은 잠시 들렸다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로 서울로 다시 올라가야 합니다. 달콤한 시간을 보내던 중 정인에게 불행이 다가옵니다. 마을 이장은 툭하면 빨갱이 집안 때문에 동네가 망했다는 막말을 넘어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도 빨갱이 집안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고아인 정인의 은신처이자 삶의 버팀목이었던 마을 도서관도 불이 납니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합니다. 이 장면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지켜보죠. 하지만 이 자리에 정인은 끼지 못합니다. 혼자 있는 정인을 석영만이 달래줍니다. 빨갱이의 딸로 사는 걸 볼 수 없던 석영은 정인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렇게 석영은 대학교에 들리면서 자신의 가방을 잠시 석영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이때 시위가 일어나고 그냥 석영의 가방을 들고 있던 정인은 경찰에 끌려가게 됩니다. 이후 영화는 시대의 아픔을 가득 담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에 사람이 가는 1969년도 역사적이고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냉전의 최전선에서 살아야 하는 청춘들은 이념 전쟁, 그것도 이념보다 사랑을 택한 두 사람에게 직격탄을 쏩니다. 보다 보면 정인과 석영이 너무 안타깝고 아쉬워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못해 슬픔이 가득 묻어 나오네요. 다만 시나리오는 아주 정교하지도 아쉬움도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가 그 시대의 아픔을 더 담고 1969년을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더 넣거나 달 탐사와 두 사람의 사랑을 은유하는 장면이나 스토리를 좀 더 가다듬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체적으로 스토리는 살짝 심심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아쉬움이 사라졌습니다. 

스포라서 말은 못하지만 만우사를 찾아간 석영 앞에 펼쳐진 풍광은 너무 아름답고 놀라워서 감탄하게 되네요. 이야기와 실제 풍경이 만들어낸 감동은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지게 합니다. 이게 영화지! 이런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 <그해 여름>의 정점을 찍습니다. 

이병헌, 수애의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이 나풀거리는 영화 <그해 여름>

<그해 여름>은 영화 <클래식>과 많은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과거를 다루고 있고 청춘 남녀의 아픔을 잘 담고 있죠. 하지만 괘는 크게 다릅니다. <클래식>이 더 자극적으로 대중적이고 흥미로운 요소가 많고 사건 사고가 더 많습니다. 반면 <그해 여름>은 여름 오두막에서 비 오는 풍경을 두 배우가 바라보는 풍경화 같은 영화입니다. 

전체적으로 사건 사고도 많지 않고 인물간 갈등도 거의 없습니다. 이 슴슴함을 두 배우의 놀라운 외모와 연기로 다 채웁니다. 이병헌이라는 사람 자체는 안 좋아합니다. 사생활 때문에 싫어합니다. 그러나 배우 이병헌은 싫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지라고 할 정도로 연기 진짜 잘합니다. 한쪽 눈으로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나 선을 넘지 않으면서 자기의 이미지를 끌어가는 영리함도 있습니다. 자전거 타다 내린 후 엉덩이가 먹은 바지를 빼내는 연기는 이병헌의 디테일한 연기를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지금도 이병헌은 다양한 영화에서 활약하고 있고 이병헌 나온 영화 중에 재미없는 영화가 없을 정도로 티켓 파워도 높습니다. 이 이병헌의 연기와 비견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것이 수애입니다. 

수애라는 배우가 예쁜 것은 전국민이 다 알죠. 한국 최고의 배우인 정윤희와 닮았다고 데뷔 초기부터 화제가 많이 되었습니다. 다만 수애라는 배우가 작품 선구안이 좋지 못해서 망작에도 많이 출연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애 필모 중에 <님은 먼곳에>와 함께 최고의 영화가 아닐까 할 정도로 연기를 잘하네요. 게다가 가장 예쁜 나이에 찍었는지 화면에서 광이 날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답네요. 두 배우의 힘이 엄청나네요. 1969년판 소나기라고 할 정도로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음 아픈 서울역 장면

마지막 서울역 장면은 정말 눈물겨운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정인과 석영이 함께 기차를 기다리다가 정인이 머리가 아프다면서 약을 사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정인은 약을 사러 가려는 석영을 꽉 잡죠. 이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려옵니다. 

살면서 우리가 첫 만남은 잘 기억하고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별은 그게 마지막이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지나고보면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구나 느끼게 되죠. 그렇다고 연락을 해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피천득의 인연처럼 안 만나는 것이 좋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음 아픈 이별은 이별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으면서 서로의 암묵적 합의로 헤어지는 이별이 아닐까 합니다. 이별인 줄 알면서도 이별이 아닌 척 해야 하는 이별이요.

약을 사러 가는 석영을 꽉 잡는 정인을 보고 석영도 알 았을 겁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요. 그래서 가지 말라고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석영도 압니다.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정인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요. 

정인도 압니다. 그렇게 보내야 석영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이 공감이 됩니다. 둘이 함께 살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쉽지 않았을 겁니다. 서슬 퍼런 공안 정권 시대에 빨갱이 딸로 사는 삶을 함께 하려면 두 사람 중 하나의 삶은 또 하나의 삶을 위해서 포기해야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삶이 다시 원래 궤도로 가려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두 사람의 놀라운 연기로 담습니다. 별다른 대사가 없는데 두 사람의 눈빛 연기로 모든 감정을 서로 전달합니다. 좋은 연출, 좋은 배우, 좋은 연기, 좋은 시나리오입니다. 

뒤늦게 알게된 한국 멜로 명작 <그해 여름> 

Roy Clark의 Yesterday, When I Was Young가 계속 맴돕니다. 하루가 지난 지금도 맴돌아요. 좋은 영화 판별법 중 하나는 영화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된다고 할 정도로 여운이 깁니다. 이 영화를 본 어제 리뷰를 적으려고 했다가 하루 지나서도 여운이 남았다면 리뷰에 담아보자 했는데 여운이 오히려 더 커졌네요. 당분간 <그해 여름> 앓이를 할 것 같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와 <클래식> 등과 함께 한국 명작 멜로 영화 4대장으로 올려놓았습니다. 
갑자기 편백나무 향이 맡아보고 싶네요. 

40자 평 : 사랑은 계절처럼 지나지만 기억은 편백나무 향처럼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별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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