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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80년대 변두리 사랑을 담은 우묵배미의 사랑

by 썬도그 2021.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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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영상자료원 고전영화 채널에 가면 한국의 명감독, 명 평론가들이 추천하는 영화 리스트들이 있고 그 영화들을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봉준호 감독과 달시 파켓이 공동으로 추천한 베스트 한국 영화에 이 영화가 있습니다.

<우묵배미의 사랑> 이 영화는 워낙 한국 영화 베스트에 항상 꼽히는 영화라서 항상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너무나 무료한 밤에 이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왜 이 영화가 많은 영화감독들이 추천하는 영화인지 다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1990년 개봉작 우묵배미의 사랑 당시의 변두리의 삶을 기록하다

돌아보면 정말 믿기지 않은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천인공노하고 TV 뉴스에도 나올 정도의 일이지만 80년대 당시는 남존여비가 확실하던 시대였습니다. 맞고 사는 아내들이 엄청많았고 어린 제가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세 들어 사는 아저씨와 아줌마가 밤마다 때리는 소리에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엄마 아빠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세 들어 사는 아주머니가 참 많이 맞고 살았습니다. 

남편이라는 인간은 노가다 일을 하는데 술만 쳐 먹고 들어오면 아이들 패고 아내도 패는 개망나니였죠. 그 어른 같지 않은 인간이 이사 가는 날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가끔 술 먹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말을 하면 깜짝 놀랍니다. 그걸 기억하냐고. 저는 한 마디 더하죠. 어린 나이니까 그런 모습에 더 놀라고 평생 기억한다고요. 

배일도(박중훈 분)은 서울 신림동에서 봉제일을 하다가 아내(유혜리 분)와 함께 경기도의 우묵배미로 돌아옵니다. 오목한 논이라는 뜻의 우묵배미에는 치마 만드는 봉제공장이 있었습니다. 배일도는 봉제사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배일도 옆에는 민공례(최명길 분)가 앉게 되고 둘은 같은 팀이 됩니다. 미스 민이라고 불리는 공례는 실제로는 미스가 아닙니다. 남편에게 맞고 사는 전형적인 뒤웅박 팔자의 여자입니다. 

가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오는데 일도는 그런 아들을 알뜰살뜰 챙겨줍니다. 공례는 유부남 일도에게 아저씨라고 하면서 일도의 따뜻한 품성에 녹아듭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물론 불륜이죠. 

일도와 공례의 첫 사랑 

배일도와 민공례는 서로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둘 다 유부남 유부녀입니다. 일도는 억척스러운 아내에게 맞고 조르기를 당할 정도로 억척스러운 아내에게 잡혀 삽니다. 이런 아내에게 사랑도 정도 주기 어렵습니다. 공례는 폭력 남편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랑을 만나지 못하다가 진정한 사랑.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랑을 만납니다. 그러나 공례는 주저하게 됩니다. 이 사랑을 이어가려면 많은 걸림돌이 있지만 배일도 보다는 공례가 더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례는 그 걸림돌을 인지하고도 이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일도는 말합니다. 이건 샛길이라고요. 기차 칸과 칸 사이에서만 나눌 수 있는 사랑처럼 은밀하고 길게 하기 어렵습니다.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의 전반부를 보다 보면 일도와 공례의 불륜을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됩니다. 비록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불륜이지만 억쎈 아내에게 쥐 잡혀 사는 일도와 폭력 남편 밑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사는 공례의 밀회를 씩씩하게 응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비닐하우스에서의 사랑은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들키게 됩니다. 여기서 참 짜증나는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 불륜을 발견한 인간들이 동네 이웃이자 형 동생 하는 인간들입니다. 이 인간들이 참 추잡스럽기만 합니다. 많은 MZ 세대들이 현재의 40,50대들을 꼰대라고 손가락질합니다. 그 손가락질 이해합니다. 저도 중년이지만 또래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 참 많으니까요. 그런데 저 20대 시절이었던 90년대도 쓰레기 같은 어른들 많았습니다. 지금은 부끄러운 줄이라도 알죠. 당시는 부끄러움마저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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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무척 좋아합니다.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80년대였습니다. 먹고 산다는 미명아래 온갖 편법과 부정한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렇게 공례와 일도의 불륜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고 둘은 잠적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공례, 일도 옳은 사람, 불쌍한 연인이라고 느껴지는데 영화는 급반전을 합니다. 

악녀 같은 일도 아내에게 서사를 투입하다

보통의 영화라면 일도 공례 불륜이지만 오래오래 사랑하면서 살길 바라게 되고 일도 아내와 공례 남편은 영화 끝날 때까지 빌런으로 남게 됩니다. 그런데 <우묵배미의 사랑>은 중간부터 이름도 나오지 않는 일도 아내에게 서사를 집어넣습니다. 

전 일도가 당시 흔한 결혼 방정식인 중매 결혼으로 만난 줄 알았고 잘못된 중매로 인해 인생 꼬였다고 느꼈는데 그게 아닙니다. 술집 작부였던 일도 아내는 일도가 먹여 살린다는 말에 결혼식도 안 올리고 결혼 생활을 하고 아이까지 낳고 억척같이 삽니다. 일도가 4번의 바람을 피어도 꾹 참고 삽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엄청난 구박을 받고 산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영화는 갑자기 불륜이지만 첫사랑 같은 사랑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일도 아내의 서사에 영화의 색깔이 확 바뀝니다.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느낌입니다. SNS에 불륜이지만 응원한다는 영화 중간까지 보고 쓴 글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런 영화였구나. 그랬구나 이래서 이 영화가 한국 영화 역사에 기록될 정도였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형식 파괴는 지금 봐도 신선하네요.

이 별거 아닌 변주가 영화의 색을 싹 바꿔버립니다. 

뒤웅박 팔자 같은 80년대 3명의 여자를 조명하다 

영화가 중간에 일도 아내에게 간단한 서사만 투입하면서 영화의 색이 확 바뀌자 이게 머선 영화인교!라는 생각에 정신이 바싹 들었습니다. 일도 가랭이를 잡고 일도 집까지 택시 타고 갈 때까지만 해도 여자가 저저저저 저게 머꼬! 저리 기가 쎄서 어쩐데 했다가 일도 아내의 삶을 플래시백 하는 영상 하나에 숙연해집니다. 

이건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80년대 동네에 살던 구로공단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에게 동네 아이들이 공순이라고 놀리다가 그 누나가 아이스크림 사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니 숙연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3명의 배우인 20대 초반의 박중훈, 20대 중반인 아내역을 연기한 유혜리, 매 맞는 아내 역을 연기한 20대 후반의 최명길 배우들의 연기를 말해 뭐합니까?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이니까요. 

3명의 여자의 삶이 눈에 확들어왔습니다. 
최명길이 연기한 민공례는 전형적인 80년대 매 맞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가장 가엽고 안쓰러운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유혜리가 연기한 일도 아내도 가여운 여자인 건 마찬가지죠. 바람끼 넘치는 일도 때문에 이 악물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도의 어머니입니다. 김영옥이 연기하는 일도 어머니는 며느리가 쥐약먹고 죽겠다는 말에 애써 달래고 다독이면서 달랩니다. 여자의 마음을 여자가 가장 잘 알죠. 그러나 못난 아들놈에게는 큰소리 내지도 못합니다. 대신 아버지와 큰 형님이 따귀라는 회초리를 듭니다. 

캐릭터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남자들이 참 저질 인간들이 많이 나옵니다. 동네 양아치 같은 나이 많은 남수(최주봉 분)부터 허우대 멀쩡하고 그나마 정신 제대로 박힌 인간 같은 나리 아빠도 똑같은 저질입니다. 

불륜 영화에서 패미니즘 영화로 전환되는 게 무척 자연스럽고 화끈거립니다. 너무 쉽게 이 영화를 예단했는지 지금도 화끈거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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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배우와 30대 감독이 만든 80년대 민초들의 삶을 담은 기록 영화

80년대 한국 영화는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쾌락을 추구하는 성인애로영화와 최루탄 냄새가 나는 사회 고발성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386이다 586이다 그러는데 80년대 대학 진학률이 30%였습니다. 70%는 고졸이었습니다. 그럼 삶을 평균적으로 보면 고졸의 삶이 더 많았죠. 

그런데 보시면 80년대 삶을 다룬 사회고발 영화 대부분이 대학생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많습니다. 고졸들의 삶,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미싱질을 하던 삶은 어디에도 잘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노찾사의 노래도 대학생들이 부른 노래잖아요. 그런 시대인 80년대의 변두리 민초들의 삶을 담았다는 자체가 혁명적인 시선입니다. 누구도 기록하려고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은 그러나 엄연한 우리 주변의 삶을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은 잘 담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민초들의 변두리 같은 삶을 다룬 영화가 이 영화만 있던 건 안닙니다. 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의 사람들>도 있고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우묵배미의 사랑>은 조금 더 직설적입니다. 

특히 놀란 것은 만드는 영화마다 화제를 일으켰던 장선우 감독이 30대였던 시절 3명의 20대 배우들과 찍은 영화가 <우묵배미의 사랑>입니다. 박중훈 같은 경우는 1987년 <미미와 철수의 청순 스케치>로 청춘스타가 된 배우였는데 자신의 청춘 스타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출연한 자체가 놀랍기만 하네요. 이후에는 다시 대중성 높은 영화들을 많이 찍었지만 당시에는 촬영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같은 20대였던 유혜리와 최명길의 연기도 엄청납니다. 억척스러운 아내와 맞고 사는 여자의 모습을 너무 자연스럽게 잘 담았습니다. 80년대 민초들의 불륜 그리고 그 사이에 각자의 서사들이 강력하게 부딪혀서 크게 발화합니다. 3명의 캐릭터가 애정을 쏟기도 그렇다고 안 쏟기도 어려울 정도로 정이 가는 부문과 안 가는 부문이 섞여 있다 보니 누구 편을 들기도 참 어렵더라고요. 

배일도는 처음 만나는 사랑을 만난 것 같은데 결코 공례에게 가지 않고 
배일도 아내는 남편을 쥐어 잡고 사는 놀부 마누라 같지만 결코 남편을 버리지도 가정을 버리지도 않고
민공례는 매 맞고 살다가 아저씨 배일도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애먼 애를 버린 여자이고 

각자의 삶에 모두 충실했다고 할까요? 80년대의 변두리 사랑을 진솔하고 다큐멘터리 같이 담은 <우묵배미의 사랑>입니다. 영화 음악도 신서사이즈 전자 음악과 함께 트로트까지 다양하게 담았습니다. 이 영화 전후로부터 한국 영화는 무조건 패스였는데 90년대초부터 리얼리즘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영화들이 변화기 시작했는데 이 변화를 이끈 감독 중 하나가 장선우 감독이었습니다. 30대 나이에 이런 영화를 연출했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우묵배미의 사랑>은 유튜브에서 유료로 또는 한국영상자료원의 고전영화 채널에서 저화질로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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