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에 낙산공원 뒤편 한양 성곽길을 걸으면서 이런 멋진 동네가 서울에 있었나 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장수마을에 둘러진 한양 성곽길을 언제 날 잡아서 완주를 해 볼 생각입니다. 서울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지만 생각보다 그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4대 고궁이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지만 주거 공간이 아닌 그냥 관광 구역이라서 살갑게 와 닿지가 않습니다. 유럽처럼 수백 년 된 건축물이나 조형물이 많으면 좋으련만 목조 건물이 많고 전쟁이 많이 일어나서인지 많지 않네요.
그럼에도 성북구는 서울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동네와 건물과 거리가 많더라고요. 날 좋은 날 성북구 여행을 다시 떠났습니다.
갑자기 떠난 서울 여행입니다. 성북구에는 가볼 만한 곳이 꽤 많은데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주변에 많습니다. 가장 먼저 들릴 곳은 '최순우 옛집'입니다.
전 차가 없어서 주로 걸어 다니고 대중교통만 이용합니다. 앞으로도 차를 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차가 주는 편의와 효용 보다는 차가 주는 스트레스가 많아서 차를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걷기 좋은 길을 만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집니다. 서울은 걷기 좋은 길이 많지 않습니다. 차가 주인이고 행인은 차를 방해하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이 걷기 좋은 서울시를 만들기 시작했고 서울시 지자체들도 인도를 넓히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진을 왜 찍었냐면 인도 넓이와 차도 넓이다 동일합니다. 보통 차가 3차선 인도는 1차선인데 인도 2차선 도로 2차선입니다.
보세요 여긴 오히려 인도가 더 넓어요. 게다가 거대한 화단도 있어요. 여기는 길상사 갈 때 지나다녔는데 올때마다 보기 좋아요. 해동 꽃 조경에서 화분을 많이 내놓으시더라고요. 덕분에 봄부터 가을까지 예쁜 꽃 많이 봅니다.
곳곳에서 옛 건물들을 보게 되네요. 제가 옛것을 좋아해서 좀 흥분한 것도 있네요. 아무튼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서 좋아요.
최순우 옛집을 가는데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들이 많네요. 덕분이네 통닭은 오래된 노포 같은 느낌입니다. 한옥 지붕의 건물이지만 아웃테리어는 레트로네요. 젊은 사장님이 운영하시나 봅니다. 젊은 분들이 좋아하겠는데요.
골목에 들어서니 길냥이가 후다닥 뛰쳐 나갑니다. 성북구 오시면 길냥이 정말 많이 봅니다.
전통 한옥은 거의 다 1층입니다. 목조 건물이라서 2층으로 올리기 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던 조선 시대라서 2층으로 올릴 필요도 없었죠. 그러나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적벽돌로 쌓고 유리창을 넣은 개량 한옥은 2층으로 만들어도 되지만 대부분이 또 1층입니다. 최근 서울시가 한옥 건물을 개보수하면 일정 금액 이상의 지원금을 주는 제도 때문인지 한옥에 살던 분들이 양옥으로 집을 새로 만들지 않고 그냥 한옥을 보수하더라고요.
한옥이 살기는 불편한데 마당이 있고 한옥만의 운치가 있습니다. 이 동네는 보도블럭도 큰 블록으로 바꿨네요. 요즘 서울시 지자체들이 보도블록이 정말 다양한 보도 블록을 깔더라고요.
여기는 성북동 선잠단지입니다. 여기는 조선시대 제단인데 좀 독특한 제단입니다. 누에고치가 명주실을 뽑아내고 이 실로 비단을 만듭니다. 비단은 양반과 왕들이 입던 옷이죠. 이 비단을 뽑는 누에고치를 위한 제단입니다. 누에고치를 직접 모시는 건 아니고 중국 고대 황제의 황비 서릉씨를 누에 신으로 만들고 그 누에 신을 모시는 곳입니다.
길을 지나다가 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도로변인데 세면대가 있습니다. 식당 건물인데 세면대가 나와 있네요. 신기하네요. 수도꼭지도 있습니다. 밑에 식물이 심어져 있어서 화분으로 활용하고 있네요. 이런 아기자기함이 참 좋네요.
동네 구경을 하다가 드디어 최순우 옛집에 도착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여기저기 구경하다 왔네요. 도착하고서 좀 쎄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혹시 닫힌 건 아니겠지?
입구에 보니 오후 4시까지 개방한다고 적혀 있네요. 시계를 보니 3시 55분이었습니다. 후딱 보고 나와야겠다 싶어서 일단 들어갔습니다.
관리실에서 안내하는 분이 나오더니 체온을 젭니다. 행사 때문에 조금 늦게 닫으니 천천히 보라고 하네요. 다행입니다. 오래 보고 싶어도 공간 자체가 넓거나 크지 않아서 15분 정도면 꼼꼼히 다 볼 수 있습니다. 최순우 옛집은 한 50평 정도 되는 한옥 건물입니다.
가운데 소박한 마당이 있습니다. 작은 연못 같은 물확이 있네요.
물확은 한옥이 목조 건물이라서 불이 나면 바로 뿌릴 수 있는 소방수 역할을 합니다. 그나저나 최순우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저도 여기 오면서 검색해서 알았습니다. 최순우 선생님은 1916년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나서 1984년 돌아가셨습니다. 혜곡이라는 호가 있는 분으로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최순우 선생님은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개성부립박물관장이었던 고유선 선생님을 만난 계기로 박물관과 인연을 맺습니다. 미술사학자가 되고 제 4대 국립박물관장이 됩니다. 그리고 스테디셀러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합니다. 이 책은 제가 90년대 초 군대에서 읽었는데 너무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당시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국내 역사 여행 붐을 일으켰는데 이 책도 동시에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집에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네요. 처음 알았네요. 전 이 책이 90년대 초에 나온 줄 알았는데 돌아가신게 84년이니 한참 이전에 나온 책이네요. 이런 책이 또 있어서 <앵무새 죽이기>가 92년도인가 93년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오래전에 나온 책이더라고요. 비틀스도 그렇죠. 60년대 유명 그룹인데 전 80년대에 이런 그룹이 있었어?라고 놀라워했으니까요. 살면서 꼭 한 번은 알게 되는 책과 노래와 그림과 공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처음 접한 그 문화에 충격을 받죠. 최순우 선생님은 식물을 좋아해서 마당을 직접 가꾸었다고 하죠. 정말 잘 가꾼 집입니다.
마친 전시를 하고 있는데 시간이 있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에 기회되면 또 들려서 천천히 봐야겠습니다.
여기도 작은 돌 항아리가 있네요. 이것도 물확 같은데 위를 올려다 보니 처마 밑에 빗물받이에서 내려온 물이 여기로 떨어지네요. 쪽마루에 있는 건 함지박입니다. 말로만 듣던 함지박이네요. 입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고 하는데 함지박을 본 적이 있어야죠. 엄청 큰 그릇이네요.
이 함지박에 김장 재료 넣고 음식을 버무리거나 떡고물을 섞는 등 음식할 때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대식구가 살던 집은 함지박이 꼭 필요하겠네요.
최순우 옛집은 꼭 뒷마당에 가보세요. 뒷마당이 생각보다 크고 작은 숲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로 아주 한적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무들이 많고 쪽마루가 있네요. 쪽마루에 앉아서 내리는 비나 눈 바라보는 재미가 있겠네요.
많은 한옥을 구경했는데 최순우 옛집은 참 소박하고 아늑한 한옥이라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개방된 백인제 가옥은 끗발 있는 친일파가 지어서 그런지 규모가 너무 크고 정이 안 갔는데 최순우 옛집은 할머니가 사는 집처럼 온기가 느껴지네요. 아마도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징검다리 같은 돌과 물확과 조형물과 툇마루 덕분이겠죠.
이 최순우 옛집은 정부나 지자체가 보존한 곳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서울시가 옛 건물들을 세금으로 사들여서 리모델링을 한 후에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오픈하는 공간이 많지만 2002년만 해도 보존 개념이 무척 약했습니다. 2002년 이 한옥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시민들의 후원과 성금으로 한옥을 매입 보수해서 복원까지 마쳤습니다. 그래서 건물 입구에 후원자 이름이 가득합니다.
뒷마당에는 후원자 중에 많은 후원을 한 사람인 듯한 이름 여러명이 따로 비석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름 중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홍라희. 리움 미술관을 만든 삼성 그룹 회장 이건희의 아내죠. 재벌가 아내들은 문화를 무척 좋아해요. 거물들이 문화를 후원하고 좋아해야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데 큰 도움이 되긴 하죠. 집 한쪽에는 후원금 모금함도 있습니다.
뒷마당에는 유리로 된 창문이 있고 안에는 전시품이 있습니다. 최순우옛집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도 있네요. 계절마다 찾아보고 싶을 정도로 아담하고 소박하고 정감 있는 한옥입니다.
이런 공간이 좋은 책을 만들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새소리에 잠을 깨고 향긋한 차 한 잔 시켜놓고 부드러운 음악 들으면서 책 읽고 책을 쓰고 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옥은 자연을 이기기보다는 자연과 함께하는 건축물이라고 느껴져요. 비록 불편하지만 불편한만큼 자연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으니까요. 최순우 옛집을 나와서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