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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영화 로마. 수평으로 흐르는 계층을 뛰어넘은 유사 가족 이야기

by 썬도그 2019.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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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시간 대 성인 영화 관람료가 1만 원이 넘어가는 시절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 저이지만 평일 1만 원의 돈을 내고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있나? 할 정도로 요즘에는 영화 선택을 신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TV드라마보다 재미없는 영화들이 많이 개봉하면서 더 조심해서 영화를 고르고 아예 안 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유에는 왓챠플레이, 푹TV,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영화, 드라마 사이트에서 볼 만한 게 엄청나게 많습니다. 영화 1~2편 안 보고 넷플릭스에 유료 결제를 한 후에 1달 내내 다양한 TV 드라마와 영화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TV 영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옥자>도 넷플릭스에서 제작비를 제공해서 만든 넷플릭스 영화입니다. 

1971년 멕시코 로마에서 가정부 일을 하는 클레오의 이야기

영화 <로마>는 2018년 베니스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입니다. 칸 영화제는 여전히 넷플릭스 같은 영화관 상영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척하지만 베니스는 넷플릭스 영화에게도 가장 큰 상을 줍니다. 감독은 영화 <그래비티>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 멕시코 감독입니다. 요즘 멕시코 감독들이 할리우드에서 아주 잘 나가죠. 

<버드맨>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도 멕시코 출신 감독이죠. 두 감독은 롱테이크의 달인이라서 헛갈릴 때도 많습니다. 영화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제목이 로마라서 이탈리아 로마를 예상할 수 있지만 영화의 배경은 1971년 멕시코 로마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하는 멕시코 원주민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 분)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큰 타일이 보이고 멀리서 쓱삭쓱삭하는 물청소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큰 타일 위로 청소물이 지나가자 청소물에 비춘 하늘이 보이고 비행기가 지나갑니다. 이 첫 장면은 이 영화를 한 장의 사진으로 압축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바닥 청소를 하는 피지배층 같은 원주민 가정부가 바닥 타일을 상징한다면 맑고 높은 하늘을 지나가는 비행기는 백인 고용인인 소피아 가족을 상징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멕시코는 빈부격차가 아주 극심한 나라입니다. 최근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지만 건국이래 수십 년간 우파 정권이 좌지우지한 나라라서 복지보다는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나라가 멕시코입니다. 당연히 1971년에도 멕시코는 지배층, 피지배층이라는 계급 사회는 아니지만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다고 백인 고용인 가족이 인디언계 클레오를 학대하거나 하대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가정부 클레오는 소피아 가족의 모든 일을 도우면서 눈치를 보면서 하숙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남자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가고 평일에는 개똥을 치우는 등 전형적인 가정부의 일을 합니다. 사모님은 클레오에게 잘 대해주지만 감시를 하고 개똥을 치우지 않는다고 가끔 핀잔을 주는 등 가깝지도 그렇다고 먼 사이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클레오를 식구 이상의 가족으로 느끼고 클레오를 아주 잘 따릅니다. 

이런 클레오에게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남자 친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자 영화를 보던 중간에 밖으로 나가서 사라져버립니다. 클레오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소피아는 낙담해 하고 있는 클레오를 데리고 병원에서 임신 진단을 받고 클레오를 다독여 줍니다. 

소피아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캐나다로 출장을 간 남편이 바람이 나서 이혼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계층과 인종은 다르지만 같은 상처를 가진 두 여성은 네 아이들과 함께 남편과의 이혼을 정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납니다. 


상당히 지루한 전개 속에서 담담히 담은 1971년 멕시코 풍경

상영 시간이 2시간 14분으로 꽤 깁니다만 영화 <로마>를 보면 더 길게 느껴집니다. 이는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영화 자체가 대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가정부 클레오와 소피아 가족의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유사 가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나마 후반에 시위 장면과 해변가 롱테이크 장면이 인상 깊지만 영화 전반 부는 지루한 연극을 보는 느낌입니다. 

영화 속 카메라는 우리의 눈 높이에서만 움직이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정도로만 앵글을 담습니다. 게다가 롱테이크가 꽤 있습니다. 여기에 흑백 영화라서 담백하고 차분하지만 현란하지 않아서 졸음을 유발하는 구간이 참 많습니다. 따라서 현란한 영화에 익숙하고 대중 영화만 주로 보는 분들에게는 추천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지루한 면이 많지만 1971년 멕시코 로마 풍경을 독특한 방법으로 담습니다. 그 독특한 방법이란 사운드입니다. 이 영화 <로마>는 배경음악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사를 하지만 대사가 들렸다가 안 들렸다 합니다. 필요 없는 대사를 묵음 처리하고 자막으로만 대사를 전달하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 묵음 덕분에 실제와 가까운 현장을 담은 화이트 노이즈와 소리가 빼곡하게 담깁니다.

색정보를 제거한 흑백 영상 대신 현장에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빼어나고 명확하고 풍부한 현장 사운드가 들려옵니다. 덕분에 내가 1971년 멕시코 로마에 있는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사운드가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영상만 잘 담는 감독인 줄 알았는데 사운드도 아주 잘 다루는 감독이네요. 


1971년 멕시코 민주화 운동을 풍경처럼 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을 키운 멕시코 원주민 가정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로마>는 클레어의 시선으로 세상을 담습니다. 소시민이자 성실한 클레어는 주어진 삶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잘 살고 있지만 임신 시켜 놓고 도망친 남자 친구를 찾아서 남자 친구 고향으로 갑니다. 거기서 남자 친구를 만나지만 봉을 휘두르며 다시 찾아오면 패버리겠다고 합니다. 

영화는 클레어라는 개인사만 집중하다가 1971년 일어난 학생 민주화 시위 장면을 담습니다 멕시코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지만 한국과 달리 민주화 운동에 실패를 하고 최근까지 우파가 멕시코를 장악합니다. 이 민주화 시위와 클레어의 개인사가 충돌을 하면서 큰 파열음이 일어납니다. 흥미롭게도 영화 <로마>는 한국에서 온 코치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온 우익청년단을 가르치는 인물인가 봅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니 군인 교관이나 무술 교관이 멕시코에 갈 일이 있었을 것 같네요. 그렇다고 멕시코 민주화 운동을 깊고 길게 담지는 않고 그냥 스치듯 잠시 등장하고 지나갑니다 

 식구를 넘은 유사 가족의 온기를 담은 영화 <로마>

못난 남성이 둘 나오고 두 명 모두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떠납니다. 그 못난 두 남성에 상처 받은 사람은 가정부 클레어와 고용인인 소피아입니다. 계층은 다르지만 다 사람은 동일한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이혼을 앞두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소피아는 클레어에게 함께 가자고 합니다. 함께 떠난 여행 속에서 네 아이들에게 아빠랑 이혼한다고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울먹입니다. 탁 트인 바닷가에서 슬픔을 달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던 소피아의 네 아이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여자 아이가 파도에 휩쓸려서 죽을 뻔 합니다. 이를 클레어가 구해냅니다. 식구였던 가정부 클레어는 그렇게 소피아의 가족이 됩니다. 

최근 유사 가족을 다룬 영화들이 각종 유명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가족>도 유사 가족에 대한 이야기죠. 점점 가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같은 핏줄이라서 더 상처 받고 괴로움을 느끼는 관계들이 늘다 보니 내가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유사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영화 <로마>도 그런 유사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리보를 위하여'라는 문장이 떠오릅니다. 리보는 '알폰소 쿠아론'의 가정부이자 보모입니다. 쿠아론 감독은 자신을 키워준 보모인 리보에 이 영화를 헌정합니다. 상처 입은 클레어는 소피아 가족과의 바닷가 여행을 통해서 얇은 미소를 짓습니다. 

바닥을 청소하는 피고용인인 클레어와 클레어를 감시하는 고용인 소피아는 남자로부터의 큰 상처를 겪고  수평으로 흐르는 물과 파도처럼 수평적 관계인 가족이 되었습니다. 좋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참 지루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별점 : ★★★

40자 평 : 유년 시절 고마웠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이름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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