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촬영을 마치고 원서동으로 향했습니다. 원서동은 꽤 조용하고 아름다운 동네로 창덕궁 담벼락을 끼고 있습니다. 종로가 워낙 구가 작고 이름은 각기 달라서 넓은 것 같지만 한 걸음에 최소 5개 동을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붙어 있습니다. 원서동은 많은 소설과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동네입니다. 2006년 경에 처음 간 후 꾸준히 들리고 있습니다.
갤러리 예? 예화랑 창덕궁 100에서 본 임응식 사진전
갤러리 예? 임응식 사진전이라는 간판에 발길을 멈췄습니다. 갤러리 예라고 해서 새로운 화랑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고 예화랑의 원서동 갤러리네요. 예화랑은 최근 정치 이슈가 있는 곳입니다. 예술이 정치와 엮이면 좋을 게 하나 없어요. 각설하고 이 공간은 올여름만 해도 빈 공간이었는데 어느새 꽉 채워졌네요.
로드뷰로 보면 그냥 허름한 3층 짜리 다세대 주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모델링을 한 후에 빈건물로 있다가 '갤러리 예'가 임대한 건지 산 건지는 모르지만 1층과 2층 그리고 3층까지 갤러리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임응식 사진작가에 대해서
임응식 사진작가는 한국 초기 사진작가로 수 많은 기록 사진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 중에서 뛰어난 사진들이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죠. 갤러리 1관은 초기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나서 1926년 일본 와세다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꽤 살았던 집안이기에 중학교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선물 받았네요. 일본인에게서 사진 수업을 받으면서 사진가로서 시작을 한 후에 1934년 일본 겐코샤에서 발행항 사진살롱에 입선을 하면서 사진계에 입문합니다.
1층은 작은 액자에 담긴 사진들이 가득했습니다. 주로 1950년 이전과 한국전쟁과 한국전쟁 이후의 50년대 사진들이 가득했습니다.
이 중에서 두 지게꾼을 담은 '둑을 가다'가 제4회 조선사진전람회에서 입선을 합니다.
이 1930년대만 해도 카메라가 아주 귀한 시대라서 카메라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진으로 주로 기록 사진을 촬영하지만 임응식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인 소양을 키워서 여러 사진공모전에서 입선을 하는 등 꾸준히 사진 실력을 키워갑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임응식은 사진현상소 아르스(Ars)를 운영하면서 부산예술사진연구회를 만듭니다. 왜 사진은 사진연구회가 많을까요. 제가 다녔던 사진동아리도 사진연구회였어요. 뭐 모여서 배우고 학습한다 뜻이겠죠.
이 사진도 꽤 유명한 사진이죠. 위 사진은 19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에 출품해서 입선을 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집니다. 종군기자가 되어서 인천상륙작전과 수많은 전쟁 기록 사진을 찍습니다. 폐허가 된 명동을 촬영한 때도 이때였습니다. 이후 임응식 사진작가는 50년 간 명동을 담았습니다. 한 공간을 꾸준히 담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꾸준히 한 공간을 담았습니다.
제가 전쟁을 싫어하는 이유는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이 문제죠. 아이들을 위해서는 절대로 전쟁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우이들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모습을 사진으로 꾸준히 담았고 이 50~60년대 한국의 기록 사진 중에 임응식 사진작가의 사진이 엄청 많습니다.
특히 이 사진은 가장 유명합니다. 전쟁 고아를 담은 이 사진은 보자마자 전쟁의 혹독함과 안타까움이 뚝뚝 흘러나옵니다. 누더기 옷과 신발도 없이 빈 깡통. 언제 봐도 한숨이 나옵니다.
이 사진도 눈길을 끕니다. 우리는 이런 사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시대를 살았을까 하지만 다 살아지게 됩니다. 삶은 생각보다 길어서 매일 울고 살 수는 없잖아요. 형편에 맞게 사는 것이죠. 한 여자분이 시장에서 장을 보고 웃으면서 돌아갑니다.
미국 사진영감에 실린 이 나목이라는 작품은 불타버린 집과 나무 앞에 한 소년이 서 있는 사진입니다. 부산 피난민이 사는 지역에 불이 나서 다 타버린 모습이라고 하네요.
구직이라는 이 사진도 유명하죠.
1층 갤러리는 작은 공간입니다. 넓지 않아서인지 사진도 작게 출력되어 있네요.
그런데 건물 옆에 계단이 있고 갤러리가 2층과 3층이 있습니다. 1층에서 안내를 해주기에 알았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2층 갤러리가 나옵니다.
여기는 놀랍게도 창덕궁 담 너머를 볼 수 있습니다. 창덕궁이 고궁 중에 자연 풍광이 가장 좋습니다. 창덕궁 후원 구경하고 나오는 길이기도 하죠. 서울에서 자연을 만끽하고 싶은 분들은 이 창덕궁 추천합니다.
이 2층이 메인 갤러리네요. 순간 놀랐습니다. 아니 갤러리에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창문도 있습니다. 공간 자체가 너무 좋더라고요.
여기도 공간 자체는 크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다세대 주택을 개조하다 보니 공간 자체가 넓지 않게 만든 듯합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대형 사진들이 있네요.
이 사진들도 1950년대 또는 60년대 사진으로 동화 백화점 사진 앞 사진이네요.
1953년 당시 명동 사진입니다. 명동 성당 건물이 보이네요. 지금은 이 앞에 엄청난 빌딩들이 가득 서 있죠. 무엇이 임응식 사진작가를 매료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명동을 오고 가면서 서울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이 사진은 1950년대 초 부산 사진입니다. 한 분이 길거리에서 종이 신문을 읽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또는 포격으로 무너진듯한 건물 안에서 인천 답동 성당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산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 피해를 받지 않은 곳이 부산이죠.
1950년대의 부산 서면에서 꽃파는 아가씨들의 모습이네요.
주로 사진들은 1950~60년대 서울과 부산 기록 사진들인데 단순 기록 사진이 아닌 꽤 조형성이 좋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랑받는 것이겠죠.
이런 사진은 캔디드 사진 같네요. 남자분이 카메라를 의식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당시는 초상권 개념도 없었죠. 그래서 앙리 브레송 등이 활약했던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도 거리 사진가들에게는 축복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사진 촬영이 어렵습니다.
임응식 사진작가가 사용한 카메라들
3층에도 갤러리가 있는데 사무실과 겸용입니다. 한쪽에 임응식 사진작가가 사용한 카메라들이 있네요.
롤라이 중형 카메라, 라이카 카메라도 있고 니콘 카메라도 있네요. 엄청 관리 잘 되어 있네요. 기계식 필름 카메라가 전자 기능이 없어서 그런지 참 오래 사용할 수 있어요. 전자 기능은 부품이 삭고 고장 날 수 있거든요.
몇 장의 사진이 좀 더 전시되어 있는데 옆에 보니 작은 휴게 공간이 있네요.
원서동의 뷰포인트 4층 옥상
갤러리 4라고 쓰여 있길래 갤러리 4도 있나하고 나가보니 옥상이네요. 여기에 대형 사진이 있습니다. 저 뒤로 보이는 동네가 원서동입니다. 원서동은 전형적인 다세대주택가입니다. 이 근처는 아파트가 없어요. 고도제한, 경관보전구역이라서 고도제한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저게 최선입니다. 주차장이 적은 것이 가장 큰 불편이고 그 흔한 편의점, 약국 등 편의 시설이나 생활공간이 적어요. 아물며 야채 가게도 없어서 안국동까지 가야 한다고 해요.
생활하기엔 좋지 못하지만 대신 이런 멋진 풍경이 있어요. 뭐 요즘 뭐든 배달이 되기에 야채 같은 건 주문해서 먹어도 되긴 하죠. 전 이런 곳이 좋더라고요.
왼쪽에는 창덕궁 안이 보이고요. 인조잔디가 깔려 있는데 눈이 살포시 내렸네요.
사진 뒤에는 이 사진이 있습니다. 앞뒤로 있네요.
이 원서동 길은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여자 주인공이 타고 가는 차를 쫓아가던 남자주인공이 달리던 길이기도 합니다. 원서동에는 가볼 만한 곳이 많습니다. 근처에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집도 있고 노무현 재단이 만든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재단'도 있고 계동길에 북촌 한옥 마을 등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해도 살고 싶은 지역입니다. 원서동 가시면 꼭 들려보세요
임응식 사진작가 사진전은 1월 25일까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