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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향기/미술작품

덕수궁미술관 큐레이터가 마르고 닳도록 칭찬한 화가 이쾌대

by 썬도그 2009.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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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덕수궁미술관에 갔다 왔습니다.  덕수궁을 자주 들리지만  오랜만에 덕수궁을 다시 찾았네요. 한 1년 만 인가요?
덕수궁을 오랜만에 찾은 이유는 바로  한국근대미술 걸작전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근대미술 걸작전 : 근대를 묻다 2008. 12.23 ~ 2009. 3.22

미술을 좋아해서  찾아갔는데 가격도 무척 저렴합니다. 덕수궁 입장료 1천원만 내면 관람할수 있습니다. 공짜죠 뭐
한국의 근대미술 그러니까 1890년 이후 1950년대 까지를 근대미술로 불리우는데요.  그 시절의 작품들을 모아놓은 전시회입니다.
김기창, 김수근, 이중섭, 이응노, 천경자씨의 작품들이 선보였는데요.  정말 대단한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더군요.

그런데  처음듣는 화가 한분을 큐레이터 분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더군요. 얼마나 침을 튀어가면서 열씨미 설명하던지 제가 다 낯뜨거워 질 정도였습니다.  그 만큼 그 화가 대단하다는 것이죠.

그의 이름은 이쾌대입니다. 이쾌대?? 첨 들어보는데 이름도 참 독특합니다. 그런데 이 화가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그가 월북화가 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월북이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타부시 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 이쾌대 화가의 그림을  이번 전시회의 메인그림으로 올릴 정도로  그의 그림은  한국 근대미술에서는 빠질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저는 이 그림 보고서 참 시원시원하다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르마기 입고 파레트 들고 있는 모습에  묘한 매력이 보이더군요.   한국에서의 서양화는  일제시대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화가들이 친일의혹이나 친일작가로 낙인을 받게 되었죠.  운보 김기창이 앞장서서 친일하자고 해서 평생 친일작가라는 멍에를 쓰고 살았구요. 
미당 서정주도   친일을 했다고 커밍아웃하여 한때 욕을 좀 먹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친일을 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작가나 화가는 우리가 크게 품어줘야 할것 입니다. 문제는  친일을 해놓고도 친일을 안했다고 반공을 외치는  몇몇 인성이 쓰레기 같은 화가나 작가들이 문제죠.

각설하구요.  이 이쾌대 화가의 그림을 보면  일제시대 혹은 해방후  서양화에 대한 한국의 정체성을 고민을 많이 한것을 볼수 있습니다. 서양화는 서양문화인데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지역색이 덧입혀져 변하게 되는데요.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일제시대의 화가들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서양화에 조선의 색을 입힐까 고민을 하죠.
이쾌대화가는  서양화라는 형태로 그림을 그리지만 그 안에  조선을 느끼게 하는  모습을 숨겨 놓았습니다.

먼저 위의 사진을 보면 서양화지만  배경과  화가의  옷을 보면 조선인임을 단번에 알수 있습니다.  뒷배경을 보세요. 민둥산의 조선의 산이 보이죠.  당시 조선의 산은 민둥산이 많았습니다. 땔감으로 나무를 마구잡이로 배니  지금의 북한과도 같았겠죠.
표현방식은 서양화를 따르지만 그 안에 담는 그림의 내용은 동양 아니 조선입니다. 거기에  독특한 실험을 하나 했는데요.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다초점 방식으로 그려집니다. 시점이 여러가지이죠.  하지만 서양화는  입체파가 나오기 이전에는  시점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위의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파레트를 들고 있는 왼손이 좀 부자연 스럽습니다. 저런 동작은 인체공학적으로 나올수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림에서 그게 가능하게 한것은 바로  왼쪽 팔만 시점이 다릅니다. 다른 방향에서 본 모습으로 왼손을 그렸죠.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부자연 스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쾌대화가가 살짝 실험을 한듯 하네요.
저기서 더 나아가면 피카소그림이 되겠죠. 피카소그림은 여러가지 각도에서 본 그림을 하나의 틀안에 집어 넣었잖아요

이 이쾌대화가에 대해서 알아보죠

왼쪽에서 두번째 화가가  이쾌대화가이고 그 옆이 이중섭화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는 고희동입니다.  이전에  지석영의 형이  중국으로 가서 서양화를 배우러 떠나기는 했지만  고희동을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아주고 있습니다.   1946년에 고희동등이 우익미술을 주도하면서 단체하나를 만듭니다. 조선미술건설본부인데요.  거기서  이쾌대와 윤희순등이 탈퇴하고 조선조형예술동맹이라는 좌익노선에 가담합니다. 그러나 해방후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극심한 이념적 갈등이 표출되던 사회에서  좌익은 척결대상이었습니다. (뭐 지금도 좌익은 척결대상이죠.)

이쾌대는 공권력의 공포에 동맹에서 탈퇴하고 정치색을 배재한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좌익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반공포스터 전람회를 개최하여 정권에 난!! 좌익이 아닙니다라고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정치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는 듯 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자 형 이여성과 함께 월북하게 됩니다.
남한에서 좌익이라고 눈을 흘겨보는 이승만 정권이 싫었나 보네요.  그러나 그와 그의 형이 선택한  북한은  유토피아가 아니였습니다.
이쾌대의 능력을 알아봐 주기는 커녕  사회주의적 노선에 따르지도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고  멸시합니다. 거기에 형인 이여성이 북한을 비판하는 말을 해서 60년대경에 숙청당한것으로 알려집니다.

이쾌대는 사회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닌 휴머니스트였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고 싶었는데
남한이나  북한정권에 휘둘려  정권찬양이나 정권보신용 그림을 그리라는 지시에 대들다 불행한 말로를 맡게 됩니다.
김경승같이 친일작가들은  박정희정권때 귀여움을 많이 받고  이순신장군동상이나 세종대왕동상을 만듭니다.
참 웃기는 일이죠.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던  조각가에게 이순신장군 동상을 만들게 하다니요.  지금 국회에도 김경승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 있다고 하더군요.  세상은  언제나 기회주의자들이 잘사는 곳인가 봅니다(적어도 한국에서는요)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깊은  이쾌대 이분이 남한에서  정권에 순응하면서  정권이 시키는대로  그림좀 그려주면서  살았다면
지금은 국내 최고의 화가로 자리매김 할수도 있었지 않을까요?  시대를 잘못만났다는게 바로 이런 화가를 두고 하는게 아닐까 하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90년대 초 이쾌대화가가 해금을 맞아서 이제는 우리앞에 이렇게 그의 그림을 볼수 있다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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