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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을 보고서

by 썬도그 2008.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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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이었다. 7월의 햇살아래 거래처를 들렸다가 근처의 허름한 가게밖에 있는 아이스크림 냉장고를
열고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다가 한참을 멍하게 그 아이스크림들을 보고 있었다.

순간 너무나 강렬한 허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구 잠시동안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 강렬한 허무감은
내 존재를 송두리채 단 1초만에 깊은 심연으로 끌고 들어갔구  내 지난 삶을 부정하는 감정이었다.

누구가 겪어봤을 데자뷰(기시감)

여러번의 데자뷰를 겪어왔구 그런 경험을 친구들과 술자리나 차 한잔 하면서 우스개 소리로 떠들었다.
그때 친구들과 공통적으로 내렸던 결론은 윤회설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한번 살아보았구  우린 전생에
죽음과 함께 기억이 포멧되고 인생은 다시 리셋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한것이라구
그래서  로우포멧된 우리의 전생중에 미쳐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가끔 길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강렬하게 일어나는것이라구.

그렇게 넘겼다.  그러나  그 몇년전의 데자뷰는 그거와 차원이 달랐다.  감정과 냄새 바람 햇빛
모든게 똑같았다. 모든게.. 그 강렬한 감정에 휩쌓이자.  매일 매일 힘들게 살아보자고 비오듯한 땀을 딱아가면서 아둥바둥 사는게 이미 정해진 길을 그냥 끌려가는것이고 나는  줄이 달린 인형일뿐 나를 나이게 만드는것은
그 줄을 저 하늘위에서 조정하는 절대자가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삶에 대한 회의가 나를 휩쌓았다
그런 데자뷰로 한참을 우울하게 지냈던 시절, 그나마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망각이 있었기에 그냥
살아가는듯하다. 

의학적으로는 대뇌피질에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 데자뷰를 만드는것이지 실제로 전생의 기억은 아니라고 한다.
뇌는 똑똑한것같아도  비슷한것을 같다고 생각도 잘한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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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운명은 정해진것이라고 이미 결정된것이라는 결정론과   결정된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의지만이 있고 결정되었다고 해도  인간의 의지로 해쳐 나갈수 있다는 개척론  당신은 어떤것을
믿고 사는가?

이 아주 철학적이지만 누구나 한번씩 살면서 해본 스스로의 질문 이 무거운 주제를 아주 세련된 미장센으로
만든 영화가 있다. 바로  베로리카의 이중생활

이 영화 예고편을 했을때 기억난다. 91년에 국내 개봉했는데  이 영화 제목의 야사시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낚였다고 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제목만 보면  베로니카가  이중살림을 차리고  사랑의 도피행각을
하는 에로물로 많은 분들이 안듯하다. 나 또한 그런 늬앙스로 제목을 받아들였으니
그러보 보면 참 누가 제목 지었는지 참 못났다.  베로니카의 두개의 삶이라고 해도 좋았을텐데
이 영화 에로물 아니다.(노출장면이 좀 많이 있긴하지만)  영화 감독만 봐도 이 영화 졸립고 무거운 프랑스
영화인지 대번에 알수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이 천재적인 감독이 만든 이 작품을 오늘에야 봤다.
그리고 지금 이 영화의 울림속에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이 영화 보게한 힘은  감독보단 이렌느 야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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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가지색 레드에서의 이미지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영화의 소재는 도플갱어다.  도플갱어란 이 세상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지구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인데 속설에 의하면 도플갱어가 만나면 한명은 죽는다고 한다.

1966년에 두 베로니카는 같은날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각각태어난다.
둘은 서로를 한번도 본적이 없으나 자꾸 나와 똑같은 누군가가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둘중 하나가 난로에 손이 데이면  몇일후에 다른 하나가 난로에 손을 댈려다가 왠지 모를 직감에 의해
난로에 가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는 감정과 경험을 자신들도 모르게 공유한다.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손가락을 다쳐 피아노에서 성악으로 바꾸게 되자  프랑스의 베로리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피아노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직감으로 피아노를 그만둔다.



그러다 프랑스의 베로니카가 수학여행을 폴란드로 온다.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프랑스에서 온 자신의
분신을 본다.   그리고 몇일후에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집안내력때문인지  노래를 부르다 죽는다.


갑자기 혼자가 된 느낌을 받은 프랑스의 베로니카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경험한 사랑의 느낌을 따라  인형극을 하는 동화작가를 흠모하게 된다.
하지만 동화작가는 한번의 공연만하고  베로니카가 교사로 있는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어느날  카세트테이프가 담긴 소포를 받게 된다.
그 테잎속에 담겨진  소리의 단서를 가지고  베로니카는  그 소포를 보낸사람을 찾으러간다.
왜 찾으러가냐구 묻는다면  그건 그녀의 직감떄문이다.  그리고  인형극을 한 그 동화작가를 만난다
그리고 동화작가는 말한다.   새로 쓰는 소설이 있는데  소설의 소재로  낯선사람의 부름에 이끌려 나오는
여자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솔직하게 베로니카에게 털어 놓는다. 
베로니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린다.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을 실험하고 있었다니  마치 베로니카를 인형극의 인형으로 다룬다는 모멸감에 뛰쳐나가
버린다. 그리고 그 동화작가는 후회하고 베로니카를 찾으러 간다.

둘은 호텔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을 알려주겠다며 베로니카는  핸드백에 있는 자신의 물건을 침대위에 쏟아낸다.
그 핸드백속에서 나온 밀착인화된 사진들중에서 베로니카를 동화작가가 발견한다.
그 사진은 고등학교때 폴란드 수학여행때 폴란드 거리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사진속의 또 다른 분신을 발견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데쟈뷰와 직관들은
우연이 아니였던것이다. 자신과 느낌과 경험을 공유했던 또 다른 분신을 발견하고  동화작가를 사랑하게 한것도  자신의 경험보단 폴란드 베로니카의 감정떄문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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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는  베로니카를 닮은  인형을 두개 만든다.
그리고 베로니카를 위한 짧은 동화를 만든다.

두 베로니카는 1966년 같은달 같은일에 태어난다.
한아이가 여렸으떄 난로에 손을 데이자 몇일후에 다른 한아이가 난로에 다가갈려다가 뒤로 물러선다
그 아이는 난로가 뜨겁다라는  사실을 몰랐는데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에게 선물해주는듯한 모습 


이 감독이 천재라고 불리우는 모습은 바로 이런  작은 소재들을 아주 질좋고 세련된 메타포로 꾸며 놓았기
때문이다.  동화작가가 인형극을 하는 모습은   신이 인간을 조정하는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어차피 인간이란 신이 만드어낸 피조물이고 그 운명마져도 신이 조정하는 것이라는것을  남은 프랑스의
베로니카는 느꼈을까?

영화에서 감독은  운명 결정론적인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담는것으로 끝맺는다.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면 그게 진실이라면   그 결정된 운명을 만든 신이든 절대자든 그 사람을 만나면
멱살을 잡을 사람들 참 많을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중 하나니까


영화는 참 지루한면이 많다. 프랑스 영화가 다 그렇듯이 사유와 사색 그리고 메타포의 보물찾기 놀이다
보물을 하나도 못찾는 사람들에겐 참 지루한 영화이고 뭔 소리하는지 모를 영화다
하지만 찾을려고 노력하고  인터넷에 떠있는 수많은 리뷰메뉴얼을 들여다 본다면  아주 흥미로운 영화이다

영화에는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베로니카가 동화작가로 부터 도망칠때 벌러덩 넘어진다.
너무 리얼하게 넘여저서 저거 NG아닌가 할정도였는데 그것도 감독이 의도한것이다.
그리고  동화작가를 찾으러 가는 길에서 한 여자가 빤히 베로니카를 쳐다보는데  폴란드의 베로니카 이모인듯
하다.

나의 분신이 어딘가에 있을까?  내가 가끔 느끼는 데자뷰는 그 분신이 경험했던것은 아닐까?
예전에 친구들과 데자뷰현상에 대한 결론인 윤회설에 또 하나의 이론을 추가해야겠다.   윤회설은 수직적인 굴레바퀴지만 이 도플갱어 이론은 수평적인 동시대의 굴레바퀴인듯하다. 


그리고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죽음을 다시한번 안타까워 하며 글을 마친다.





http://www.yes24.com/event/00_Corp/2008/0407BlogFestival_Info.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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