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라는 제 유년 시절의 가장 큰 영웅이었죠. 80년대 초 마블 코믹스, 디씨 코믹스보다 한국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캐릭터는 고질라였습니다. 일본 불법 복사물이었던 '괴수 대백과 사전'은 총천연색 컬러 사진에 다양한 고질라 캐릭터들을 소개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일본 특찰물인 '고질라' 시리즈를 볼 수 없었고 오로지 '괴수 대백과 사전'으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으로만 봐도 너무나도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가득 등장해서 설레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고질라는 일본을 대표하는 특촬물 캐릭터로 현재는 미국에 수출되어서 다양한 괴수물에서 끝판왕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고질라 x 콩>도 나왔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도 <신고질라>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스토리가 뛰어나지 않고 할리우드와 달리 '고질라'를 선과 악이 아닌 그냥 하나의 재앙으로 보는 시선이 강합니다.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못한 영화들이 많았는데 이 영화는 일본에서 만든 고질라 영화 중에 가장 잘 만든 영화네요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은 일본 영화 <고질라 마이너스 원>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2024년 3월에 열린 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시각효과상은 미국 영화의 전유물이고 실제로 할리우드가 가장 잘하는 분야가 시각효과이고 제 기억으로는 <반지의 제왕>을 만든 뉴질랜드 웨타 스튜디오를 제외하면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 시각효과상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일본이 이 시각효과상을 받았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죠. 이 <고질라 마이너스 원>의 VFX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한국에서 개봉하나 기다렸는데 놀랍게도 2024년 6월 1일 넷플릭스에서 오픈했네요. 감독은 <기생수 1,2부>로 유명한 '야마자키 다카시'입니다.
그럼 얼마나 VFX 장면이 좋으냐? 할리우드급은 아니고 그 살짝 아래입니다. 다만 일본 영화치고는 꽤 준수한 VFX를 보여주네요. 사실 요즘 일본 영화의 VFX 실력이 어떤지 모를 정도로 수입되는 일본영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넷플릭스 제작 일본 드라마들을 보면 VFX 실력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비슷하더라고요. 그리고 예전처럼 VFX를 그 나라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닌 외주를 주기에 돈을 많이 투입하면 VFX 장면의 퀄리티는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고질라가 나오는 장면이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지 않은 장면 중에 10~20% 정도는 너무 CGI 티가 나서 몰입이 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도쿄 긴자 시내를 박살 날 때 고질라가 턴을 하는 장면의 부자연스러움과 빛 처리를 잘못해서 실제가 아닌 그림을 보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이 장면들을 빼고 초반 바다에서 수영을 하면서 배를 추격하는 장면이나 중반 도쿄를 박살 내는 장면은 엄청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주 잘 만든 장면입니다.
특히 고질라가 방사열선을 쏠 때는 좀 충격적이네요. 여기에 영화 클라이막스 장면도 꽤 잘 만들었습니다. 이래서 아카데미가 이 영화에게 시각효과상을 주었나 보네요. 다시 말하자면 할리우드의 대작 영화에 비하면 CGI 퀄리티가 좀 미흡합니다만 일본 영화 치고는 아주 뛰어나고 전체적으로 꽤 선택과 집중을 잘했습니다. 물 CGI도 아주 좋네요.
예상 밖으로 이야기도 좋은 <고질라 마이너스 원>
제목이 좀 의미심장하죠.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2차 세계대전으로 제로 상태가 된 일본에 대괴수 고질라가 지하 1층으로 끌고 내려간다는 의미로 마이너스 원이라고 했다고 하네요. 고질라 탄생 70주년 기념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질라 영화들 특히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스토리가 안 좋은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큰 기대를 안 했습니다.
고질라는 다른 괴수물과 다르게 걸어 다니는 재앙으로 묘사됩니다. 다른 괴수물들은 악과 선의 구분이 있어서 선과 악의 대결을 그리거나 물리치는 내용으로 끝나지만 고질라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화산, 지진 같은 대재앙 그 자체이고 그 대재앙 앞에서 저항하고 극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류 최초로 핵 공격을 받은 나라가 만든 거대한 핵구름 같은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재난을 그냥 바라보는 정도로만 주인공들이 담기다 보니 영화적인 재미가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고질라 영화 중에 가장 스토리가 살아있고 집중력이 좋네요.
영화의 시작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입니다. 주인공 시키시마는 가미가제 특공대로 차출되어서 자살 공격을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나 시키시마는 소심남으로 기체 고장을 핑계되고 외딴섬에 착륙해서 기체 수리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섬에 고질라가 등장합니다. 이에 정비대원을 이끄는 지휘관이 시키시마에게 제로기에 있는 20미리 기관포로 쏘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키시마는 두려움에 기관포를 쏘지 못하고 정비대원들은 지휘관만 빼고 전멸합니다.
도쿄로 돌아온 패잔병 시키시마는 동네 아는 누나에게 왜 살아 돌아왔냐면서 패배자라는 질타를 합니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의 시키시마는 그렇게 겨우 버티면서 삽니다. 다른 사람들의 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지만 시키시마는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에서 계속 전쟁을 합니다.
폐허가 된 집에서 겨우 연명하면서 사는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찾아와서 같이 얹혀 삽니다.
시키시마는 나가라고 하지만 심성을 잘 알고 있는 노리코는 자신의 아이도 아닌 죽아가던 여자로부터 받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시키시마 집에 같이 거주합니다. 영화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생각보다 전후 일본 사회를 아주 잘 담고 있습니다. 보면서 일본의 폐전 직후의 느낌이 확 와닿네요. 이렇게 말하면 일본이 가해국이고 일본을 미화하는 이야기로 담기는 것 아니냐고 하실 분 있지만 아닙니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일본 정부를 꽤 많이 비판합니다.
시키시마는 꽤 많은 돈을 주는 일본 바다에 있는 기뢰 제거함에 타서 꽤 큰 돈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가정을 꾸려서 사는 듯 하지만 전쟁 후유증으로 가정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고질라의 재등장합니다. 보통 이런 상태면 정부가 나서서 대책 마련을 하지만 숨기는 것이 많은 일본 정부라면서 비판을 하던 민간 단체들이 나서서 고질라 제거 작전을 세웁니다.
이는 군대를 만들 수 없는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는 모습과 함께 이번 작전은 2차 세계대전처럼 병사들을 1회용 티슈로 사용하는 일본 정부와 달리 모두 살아날 방법을 같이 강구합니다. 그럼에도 시키시마는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고질라가 긴자 거리를 방사열선으로 날려버리는 모습과 함께 노리코가 사라집니다. 시키시마는 분노에 차 올라 이 고질라 제거 작전에 참여합니다. 시키시마는 먼지 쌓인 시험기를 타고 고질라와 맞선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대재앙 앞에서 앞장서는 민간인들과 변화하는 시키시마
2차 대전 패망후에 제로가 된 도쿄.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 도쿄에서 새로운 생명과 가족이 피어납니다. 시키시마와 노리코 그리고 전쟁 고아인 아키코는 모두 결핍이 있는 인물입니다. 가정을 이루었지만 서로의 결함을 알기에 가족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시키시마는 전쟁 후유증에 자신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 건지 모른다고 절규하죠. 이런 시키시마는 산송장 같습니다.
이런 시키시마가 살고자 하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노리코가 떠난 후였죠. 무정부 상태 같은 일본에서 민간인들은 미래를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고질라로 향해갑니다. 아주 복잡하고 놀랍거나 특이한 서사는 아니지만 서사의 힘이 아주 좋습니다. 고질라 영화들의 아쉬운 인간 서사가 탄탄하다 보니 고질라가 더 무시무시하고 두렵게 느껴집니다.
많은 괴수 영화 감독들이 괴수에만 집중하고 인간 캐릭터를 대충 만드는 느낌이고 이게 괴수 영화들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1950년대 전후 복구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미래에 대한 염원과 의지와 희생을 아주 잘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도 꽤 야무지게 잘 들어가 있어서 더 좋네요.
여기에 고질라 초기의 괴수의 괴성과 스타일을 담으려고 노력한 모습도 좋습니다. 돈 내고 보려고 했는데 넷플릭스에서 바로 풀어줘서 돈도 굳었네요. 꽤 볼만합니다. 볼만한 영화들을 상영하지 않는 요즘인데 오랜만에 재미있게 본 괴수 영화네요.
별점 : ★ ★ ★☆
40자 평 : 고질라의 원형을 잘 복원하고 서사까지 좋은 괴수 맛집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