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또 하나의 한국 관련 미국 영화로 2024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만큼 해외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것일까요? 전 여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백이 아주 강해서 수 많은 관객들 특히 첫사랑을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위로주 같은 영화입니다.
결혼한 첫사랑을 24년만에 만나는 남자
<패스트 라이브즈>의 이야기는 너무 간단합니다. 너무 간단해서 이야기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12살 때 단짝 친구였던 해성과 나영은 동성 친구처럼 친하게 지냅니다. 그러다 나영은 동생과 부모님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갑니다. 어린 나이에 이별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죠.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수도 있음에도 해성과 나영은 특별한 말이나 행동 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헤어집니다.
그렇게 12년이 지난 후 군대를 갔다온 나영과 해성이 다시 연락하게 됩니다. 나영은 미국 뉴욕에서 거주하면서 이름을 노라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해성이 나영을 찾지 못했고 나영 아니 노라가 해성을 페북에서 찾았고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렇게 서로 꾸준히 영상 통화로만 연락하지만 노라가 해성과 연락하다 보니 자꾸 서울에 가고 싶어진다면서 1년만 연락을 끊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12년이 되었고 36살이 된 나영과 해성은 드디어 뉴욕에서 24년만에 만나게 됩니다. 그 사이에 노라는 7년 전에 결혼을 한 유부녀가 되었고 해성은 여자 친구와 사귀다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최근에 헤어졌습니다. 흔한 만남이죠. 흔한 이야기고요. 다른 이런 비슷한 이야기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나요? 특히 첫사랑을 강하게 한 사람이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단순무구한 이야기에 자신의 경험을 젓셔서 영화를 같이 마실 것으로 생각되네요. 물론 저도 그랬죠.
피천득의 인연에서 영감을 떠올린 듯한 <패스트 라이브즈>
아니?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이야기가 너무나도 평범합니다. 그래서 심심하다고 느끼실 분들이 많고 그런 분들에게는 결코 추천하지 않습니다. 다만 첫사랑에 대한 아픔이 강한 분들에게는 해성(유태오 분)과 노라(그레타 리 분)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서사를 단순화 시켜서 보편이라는 거대한 여백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건 내 첫사랑 이야기야라고 느끼게 하는 구석이 많습니다.
해성과 노라(나영)의 3번의 만남을 보니 한 수필이 떠오르네요. 피천득 작가의 '인연'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릅니다.
영화는 '인연'과 '전생'을 꾸준히 말합니다. 인연을 끊지 못하고 계속 이어가는 걸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우정 이상 무엇인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친해도 이렇게 오랜 인연을 이어가기 쉽지 않거든요. 보통은 서로 결혼을 하면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죠. 한쪽이 결혼을 해도 쉽게 연락하고 만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만나자고 한다? 그것도 남자가? 그럼 백퍼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방증입니다.
남자에게 첫사랑은 현재이지만 여자에게는 과거일 뿐
태오가 휴가 때 뉴욕에 간다고 하자 친구들은 첫사랑 만나러 간다고 눈치를 챕니다. 흔히 하는 말이 있죠.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요. 반면 여자는 현실이 중요해서 과거의 남자는 잊고 현재에 충실해 한다고요. 이런 태오가 노라를 만나러 24년 만에 뉴욕으로 갑니다. 이런 사실을 노라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탐탁치 않지만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왜 탐탁치 않았을까요? 남자라면 잘 알죠.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걸 알기에 막고 싶지만 2박 3일만 머물것이고 노라를 믿기 때문에 반대는 안 합니다. 실제로 남편이 노라에게 물어보지만 노라는 아주 현실적인 대답을 합니다. 이 말을 태오에게도 합니다. 해성이 아는 나영은 존재했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어!
해성은 아마도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갔을 겁니다. 혹시나 하고 갔지만 역시나 12년은 같은 시간대에 살았던 해성과 나영이지만 나머지 24년은 해성과 노라로 살았고 그 사이에 나영은 노라 속에서 살지만 다시 나올 수 없다는 것 목도하고 난 후 해성은 현실을 다시 재정립 했을 겁니다. 나영과 해성으로 다시 만나기엔 현실력이 뛰어난 어른이 되어 버렸습니다.
특히 캐나다로 이민가서 그린카드라는 영주권을 따기 위해서 유태인 남편과 결혼을 한 노라에게는 현실 적응력이 더 강합니다.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로서 살아가지 못하면 다시 고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건 루저라는 시선으로 비추어질 겁니다.
전생과 이전의 삶을 담은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패스트 라이브즈는 2개의 뜻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전의 삶, 지나간 삶을 말하기도 하죠. 8천 겁의 인연이 있어야 현생에서 인연이 생긴다고 합니다. 태오와 나영은 인연이었지만 태오와 노라는 인연이 아니었나 봅니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리숙했거나 여건이나 욕망이 두 사람을 갈라 놓았을까요?
두 사람 사이에 놓이진 인연의 강에 대한 이야기는 이 영화의 주제곡인 'Quiet Eyes'의 한 대목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삶은 정말 신비로운 걸까?
실수에서 배울 수밖에 없어서
발 헛디디고 계단에서 넘어지고
넌 내겐 너무나 현명한 사람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돌이킬수 없어서이지 않을까 하네요. 또한 현명하지 못한 내 모습이 많이 보여서이기도 하겠죠. 그리고 마지막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그 어떤 사랑보다 크게 각인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 내용도 대사도 엄청나거나 뛰어나거나 아름답거나 현란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그 단하나의 매력이 이 영화의 전부이자 전체입니다. 보다 보면 해성의 첫사랑은 나영 한명이지만 영화를 보는 수 많은 해성과 나영이라는 관객들은 자신들의 해성과 나영을 떠올릴 겁니다. 이게 이 영화의 강력한 매력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샘을 자극하네요.
모든 사람에게 권하지 않습니다. 첫사랑을 깊이 앓은 사람에게만 권합니다. 그 분들에게는 이 영화가 꽤 오랫동안 기억날 겁니다. 그 시절 해성과 나영과 함께요.
재미있는 점도 몇 개 있는데 가수 장기하가 해성(유태오 분)의 친구로 나오는데 대사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선술집이 신대방역 근처라는 설정에 깜짝 놀랐습니다. 제 유년 시절을 함께한 전철역이라서요.
별점 : ★ ★ ★ ★
40자 평 : 첫사랑을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