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거의 가지 않지만 한때 자주 다녔던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항상 지나가는 곳이 충무로 인쇄골목입니다. 이 충무로 인쇄골목은 허름하고 오래된 건물들이 가득합니다. 이곳을 촬영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더니 서울 도심에 이런 불량 건물이 가득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댓글이 달렸습니다. 네 외모만 보면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죠. 그러나 불량 건물, 오래된 건물이기에 이곳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서울의 유통, 생산 산업 단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을지로 일대는 다양한 산업 상가들이 뭉쳐 있습니다. 조명 상점, 전자부품 상점, 철공소, 공구 상점 등과 자영업자 분들이 많이 찾는 방산시장이 있고 충무로 부근엔 출판 인쇄 골목이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한 가운데 이런 대규모 다양한 상가들이 몰려 있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지근거리에 모두 있어서 시내에 나왔다가 다양한 물건과 부품과 공구와 재료를 한 번에 다 돌아다니면서 살 수 있습니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을지로 공구상가에서 공구를 사고 전자 부품들과 전선을 사고 연말이라서 회사 달력 주문을 한 번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래된 건물들이 많아서 미관상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관상 좋지 못하기에 임대료가 저렴하고 임대료가 저렴하기 때문에 모든 제품들이 저렴합니다. 임대료가 저렴하면 음식도 싸고 제품도 쌉니다. 반대로 임대료가 비싸면 음식 가격도 비싸고 제품 가격도 비쌉니다.
경리단길, 가로수길, 이태원과 전국의 수 많은 ~~ 리단길이 왜 망해가고 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높은 임대료 때문입니다. 전국의 수많은 맛집들의 건물이 허름하고 오래된 이유는 돈 벌어서 건물 새로 지을 정도로 돈을 벌었지만 새 건물을 짓게 되면 자연스럽게 음식 가격이 올라가거나 양이 줄어듭니다.
반대로 새 건물로 이사를 가거나 건물 인테리어에 투자하지 않으면 그 돈을 음식에 투자해서 저렴한 가격에 맛은 좋고 푸짐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충무로 또는 을지로 일대 수많은 인쇄소들은 소비자들을 상대로 하는 곳이 아니라서 건물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은 건물주가 아닌 임차인입니다. 이 충무로 인쇄골목을 처음 알게 된 것은 92년 대학교 때입니다. 대학교 사진동아리에서 활동하는데 포스터가 필요했습니다.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했다는 소리에 무작정 충무로 향했습니다. 그때 옵셋 인쇄가 뭔지 알게 되었네요. 그러고 보니 꽤 오래전 이야기네요.
지금도 이 충무로 인쇄골목은 1달에 1번 이상은 지나갑니다. 대한극장 들렸다 가기도 하고 을지로 서점에 들렀다가 가기도 하고 카메라 테스트나 다양한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찾아가고 지나갑니다.
며칠 전에 가보니 세운상가, 대림상가를 지나서 진양상가까지 공중 보행도로를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네요. 오세훈 전 시장 시절 종묘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녹색의 길을 만들겠다고 발표합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세운상가에서 진양상가까지 다 허물고 그 자리를 긴 근린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했지만 예상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돈 때문이죠. 기존 건물을 다 서울시 세금으로 매입해야 하는데 천문학적인 돈도 돈이지만 기존 거주자들이 크게 반발을 합니다. 그렇게 수년 동안 설득하고 설득해서 실행한 것이 세운상가 일부만 허물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박원순 시장이 다른 방법으로 실행했습니다. 기존 건물은 그대로 두고 공중보행도로를 만들어서 새로운 관광 명소로 만들 계획을 세웠고 세운상가에서 대림상가까지 이어지는 공중 보행로를 만들었습니다. 요즘 가보면 이 공중 보행로에 많은 인테리어 맛집들이 가득해서 젊은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 공중보행로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예쁜 풍경은 아닙니다. 이런 노후 건물이 가득하고 심지어 발암물질 배출한다고 사용이 금지된 슬레이트 지붕 건물도 많습니다. 몇몇 분들은 이런 후진스러운(?) 풍경을 지적합니다. 이해는 합니다만 서울 모든 공간이 강남의 대리석 같은 건물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허름하고 노후되고 걷기 불편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이미지가 아닌 다양한 삶처럼 다양한 꾸밈과 개성이 넘치는 골목길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남산 둘레길 단풍을 구경하고 난 후 충무로 인쇄 골목을 지나가는데 뭔가 이상한 공간을 지나쳤습니다. 그냥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봤습니다. 헐~~ 뭐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공간입니다. 이 근처는 인쇄소가 많고 건물이 빼곡해서 하늘이 잘 보이지도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천카페 같은 곳이네요.
이상하다 하고 뒤로 돌아서 다시 길을 나섰는데 또 이상한 상점이 보입니다. 막창, 곱창집인데 인테리어가 멋지구리합니다. 딱 20,30대 취향이네요.
뭐지?라고 생각하면서 을지로12길에 들어섰습니다. C.T.P 출력이라고 적혀 있는데 꽃지로라는 꼬치구이 전문집이네요.
뭐지? 갸우뚱 거리기만 했습니다. 분명 이 거리 몇 달 전만 해도 그냥 평범한 인쇄 골목이었습니다.
이 건물 앞 자판기에서 사람이 나오더니 2분이요? 들어오세요라고 합니다. 헐~~~ 이런 곳을 망리단길에서 봤는데 자판기가 출입문이네요.
그제야 알았습니다. 새로 생긴 을지로 인테리어 맛집 골목입니다. 요즘 20,30 분들에게 을지로를 힙지로라고 합니다. 힙하다는 예쁜 맛집들이 가득하다고 해서 힙지로라고 하죠. 그러나 그런 힙지로의 맛집들은 듬성듬성 있습니다. 1층은 공구 상가인데 3층에 예쁜 카페가 있는 등 띄엄뛰엄 있는데 여기는 그냥 길 전체가 힙한 음식점이 가득합니다.
급하게 다음 로드뷰를 돌려보니 이렇게 변신한지가 6개월도 안 됩니다. 보시면 인쇄소 건물을 내부만 꾸미고 아웃테리어는 꾸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UV 특수인쇄가 적혀 있습니다. 요즘 이런 식의 젊은 취향의 상가가 늘고 있죠.
한편으로는 이런 새로운 음식점들이 늘어가는 이면에는 이 인쇄골목에 많은 건물이 임대로 나왔습니다. 불경기에 출판, 인쇄업이 점점 쇄락하면서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을지로가 뜬 이유는 아주 싼 임대료 덕분인데 그 마저도 감당 못하는 인쇄소들이 떠났고 그 자리에 이런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로 무장한 음식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젊은이들의 양지'가 되어가고 있네요. 을지로가 다 이런 것은 아닙니다. 일부 지역은 허름한 노후 건물을 싹 밀고 고층 빌딩이 올라가고 있고 이 거리고 언제 싹 정리되어서 재개발이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개발이 된다고 해도 느리게 개발되었으면 하네요. 천편일률적인 깍두기처럼 정형화된 복사 & 붙여 넣기 같은 최신 건물 상가들의 무미건조함 대신 허름하지만 다양한 개성이 넘치고 골목이 있는 먹자골목이 많아졌으면 하네요.
을지로 12길을 나오니 빌딩의 숲이 나옵니다. 을지로는 점점 힙지로가 되어가고 있네요. 을지로가 먹자 골목으로 좋은 이유는 이 거대한 빌딩 속에서 근무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직장인들이 참 많습니다.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각종 맛집들을 갈 수 있어서 인기가 높습니다. 또한 도심 중간에 있어서 약속 장소로도 좋죠. 서울은 생각보다 큰데 서울 끝에서 끝에 사는 사람들이 만나기 좋은 곳이 종로와 을지로입니다. 이 근처에는 노가리 골목도 있어서 노포에서 생맥주에 거대한 노가리 뜯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3번 출구 인근 을지로 12길로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