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2조 원을 투입해서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 21편의 판권을 구매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에 그런 가치가 있냐는 말도 있긴 하지만 지브리 애니들 대부분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고 다른 애니에서 볼 수 없는 정서와 아름다움이 있어서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애니는 지브리가 아니면 담기 어렵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일상에서 발견하는 보석 같은 기쁨을 담은 잔잔한 애니들이 참 많습니다. 마치 순수 동화책을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또한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 전체에 흐르는 자연친화적이고 개발에 대한 반감 또는 경고를 담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1995년에 제작된 지브리 애니 <귀를 기울이면>
애니 <귀를 기울이면>은 1989년 8월에서 11월호까지 슈에이샤의 만화 월간지 리본에 연재된 '히이라기 아오이'의 만화가 원작입니다. 그러나 만화와 애니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만화는 중학교 소녀의 첫사랑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원작을 각색한 애니 <귀를 기울이면>은 첫사랑도 담기지만 그 보다는 진로 고민, 청춘에 좀 더 초점을 맞췄고 이 점이 제가 이 애니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귀를 기울이면>은 20년 전에 이미 봤습니다. 그러나 좋은 애니와 책은 다시 봐도 또 좋습니다. 다양한 책과 영화를 보는 것도 좋지만 남들이 좋다고 추천하는 영화를 더 많이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영화에는 보편적 좋음이 참 많습니다. 또한 20년 전보다 제 경험이 일취월장해져서 당시에는 그냥 넘겼던 장면들이 눈에 자주 밟히네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90년대 풍경입니다. 지금은 일본과 한국이 동시대에 사는 것을 넘어서 몇몇 분야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미래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회 인프라가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90년대만 해도 일본은 한국보다 최소 10년 이상 앞선 나라였습니다. 사회적 인프라는 물론 모든 것이 앞서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일본을 선진국이자 경제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럼에도 두 나라는 같은 문화권이라고 할 정도로 비슷한 일상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벤치마킹하는 첫 번째 나라가 일본이고 일본의 시스템을 많이 흡수했습니다.
<귀를 기울이면>의 배경은 90년대 초중반으로 보입니다. 노트북이 막 나오던 시절, 도서관 대출카드를 입력하던 시대에서 바코드 전환 작업을 하는 모습, 하늘에 떠 다니던 비행선 등등 막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이중에서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믹스커피가 주류였지만 커피 문화 강국인 일본은 핸드드립 커피를 집에서 마시는 점이 다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귀를 기울이면>은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작과 달리 도쿄 서쪽 다마시 세이세키 사쿠라 가오카역 주변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검색을 해보니 이 동네를 그대로 애니로 옮겨 놓았습니다. 영화가 아닌 애니가 굳이 실제 배경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실제 존재하는 공간이면 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담은 애니에 더 힘이 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1995년에 일본에서 개봉한 <귀를 기울이면>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귀를 기울이면> 애니에 감동한 관광객들이 많이 온다고 하니 좋은 애니 1편이 다마시를 풍성하게 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다마시는 지브리 애니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서 60년대 말 개발 과정에서 일어나는 너구리와 인간의 전쟁 아닌 전쟁을 담았습니다. 그 다마 신도시에서 자란 여중생이 애니에서 3번이나 나오는 주제가인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내 고향은 흙길인 컨트리 로드가 아니라 콘크리트 로드이고 고향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신도시에 대한 얇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추억에 '귀를 기울이면'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Take Me Home, Country Roads'로 시작되는 애니 <귀를 기울이면>의 주인공은 여중생 츠키시마 시즈쿠입니다. 맞벌이 엄마 아빠와 대학생 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도서관 직원인 아빠의 영향인지 시즈쿠는 책을 참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읽는 책마다 누군가가 먼저 읽은 것에 신기해합니다. 도서 대출 카드에는 항상 '아마사와 세이지'라고 적혀 있습니다. 멋진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흠모하는 마음까지 생깁니다.
시즈쿠는 유오코라는 단짝 친구가 있습니다. 유오코는 야구부의 스키무라를 짝사랑합니다. 그러나 스키무라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습니다. 유오코가 마음의 상처를 입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 날 시즈쿠는 스키무라에게 유오코가 널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스키무라는 오히려 시즈쿠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본의 아니게 삼각 관계가 되어 버린 시즈쿠.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은 이 삼각 관계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면>이 집중하는 것은 여중생의 미래나 진로에 대한 고민입니다. 그리고 그 부스러기로 추억을 떨굽니다. 애니 <귀를 기울이면>은 중학생이 가지는 열병 같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과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아주 세밀하게 담고 있습니다.
다만 모든 중학생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모범생인 시즈쿠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싸움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로만 이 중학생을 소비합니다. 아무래도 사건 사고가 나야 이야기가 진행되기에 모범생은 주인공이 되기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하건 못 하건 마음씨가 좋은 중학생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 평범한 중학생인 시즈쿠의 잔잔하게 시작해서 격정적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애니를 보다 보면 중학교 시절의 혼란스럽기만 한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투영됩니다. 특히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루지 않는 진로 문제에 대한 고민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담고 있습니다. 애니를 보면서 중학교 시절 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잘하고 있어!라는 하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싶네요.
어른이 중학교 시절 자신에게 전하는 온기가 담긴 <귀를 기울이면>
지나고 보면 그 시절 나는 왜 그리 어리숙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리숙함이 청춘의 장점이고 수 많은 시행착오 끝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됩니다. 물론 흔들리지 않기에 자기 이야기만 줄 창하는 꼰대가 되기도 하죠. 책을 좋아하던 시즈쿠는 솔직하고 상냥했던 나인데 책을 읽더라고 요즘은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길고양이 문에게 자신의 넋두리를 합니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잘 가고 있는지 숲 속을 걷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숲을 지나온 사람이나 숲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인 어른들이 알 수 있죠. 시즈쿠에게는 좋은 어른들이 있습니다. 부모님도 누나도 참 좋은 사람입니다. 다만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강요를 넌지시 합니다. 특히 대학생 언니의 강요는 직설적입니다. 그러나 시즈쿠는 자신이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자 그걸 찾으려고 대학교에 갔다고 언니는 대답하죠. 맞는 말일까요? 대학교 가서도 적성에 맞지 않아서 대학을 중도에 포기한 사람이 참 많고 심지어 돈 많이 번다는 이유로 적성에도 잘하지도 못하는 분야를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길을 안내해 준 사람은 '아마사와 세이지'입니다. 네 맞아요. 도서대출카드에 항상 적혀 있던 세이지입니다. 세이지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바이올린 제작자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학생이지만 고등학교 대신 부모님을 설득해서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바이올린 제작 장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미 꿈이 정해진 세이지를 보고 시즈쿠는 부럽다는 질투심과 함께 세이지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흔한 모습은 아닙니다. 일본이야 가업을 잇는 문화가 발달했고 애니에서는 이탈리아라는 유럽의 귀공자같은 세이지가 흔한 인물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세이지 같은 친구가 꼭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도 반에서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고 집안도 참 좋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런 캐릭터들은 우리 같은 평범한 중학생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멘토들은 대부분 동년배나 동네 형 누나 언니들이지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미 다 자란 사람들에게는 그냥 다 어린아이들로 보이기에 현실적인 조언보다는 뜬구름 같은 조언을 하게 되죠.
세이지는 시즈쿠에게 손을 내밉니다. "넌 글에 재주가 있어"
시즈쿠에게는 이 말이 인생을 바꾸는 말이 됩니다. 세이지에게 용기를 얻은 시즈쿠는 세이지처럼 꿈을 테스트해 봅니다. 세이지의 할아버지가 보물로 여기는 바론이라는 남작 고양이 장난감에서 영감을 받아서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장편 창작 소설을 씁니다.
세이지의 할아버지는 시즈쿠에게 보석 원석을 보여주면서 너는 지금 이 원석이고 노력을 하면 보석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즈쿠와 세이지는 원석 상태이며 바이올린을 만들거나 소설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말하려다가 너무 잔소리 같아지자 나이가 드니 잔소리만 는다면서 스스로 말을 멈춥니다. 세이지 할아버지는 누가봐도 지브리의 수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 같아 보입니다. 감독은 다른 분이지만 이 애니도 하야오의 영향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하야오는 한 인터뷰에서 <귀를 기울이면>은 청춘을 허비하는 청춘 또는 자신을 향한 이야기라고 소개했습니다.
참 공감이 가는 것이 저도 제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어리숙한 모습에 방황하고 왜 난 안 될까? 뭘 하면 좋을까? 참 고민이 많이 되었는데 이런 고민을 들어주고 다독여주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하야오 감독은 그런 청춘들에게 힘이 되는 애니를 만들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전 이 애니를 초중고 학생들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때 보면 가장 좋은 애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세이지 할아버지 같은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좋은 어른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좋은 어른이라고 해도 너무 가르치려고 하고 주파수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쉽게 만나 지지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좋은 소설, 좋은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는데 그 애니 중 하나가 <귀를 기울이면>입니다.
타버린 새 새끼와 고양이 문 사이에서 자라는 시즈쿠
시즈쿠는 세이지가 돌아오는 2주 후에 완성한 소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쓴 소설이 '귀를 기울이면'입니다. 이 시즈쿠의 소설은 2002년에 제작된 <고양이의 보은>이라는 스핀 오프 애니로 만들어집니다.
2주 동안 중간고사도 망치면서 새벽까지 소설 쓰기에 매달립니다. 이 과정은 세이지 할아버지가 말한 각고의 노력의 과정입니다. 내가 소설 쓰는 것에 재능이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죠. 이 과정을 견디어 내고 결과물을 만들어 보면 압니다. 내가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압니다. 다행스럽게도 시즈쿠는 좋아하는 일도 잘하는 일도 글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타는 자전거의 속도 조절을 잘 하기 어렵듯이 너무 속도를 내다가 꿈애서 타버린 새의 새끼를 보게 되고 깹니다. 열정을 너무 태우면 그 일에 대한 열정이 급속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 꿈의 속도를 줄이는 역할을 길냥이 문이 합니다.
뚠뚠 한 고양이 문은 길냥이로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피하지도 않아서 이름이 여러 개입니다. 문은 자유와 편안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삶도 있지만 길냥이 문처럼 자유로운 삶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선택은 시즈쿠가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아웃이 되기 전에 문이라는 고양이를 안고 편안함을 느낍니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아서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내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 하네요.
꿈을 찾아가는 중학생의 이야기 <귀를 기울이면>
어색한 장면도 있습니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세이지의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서 부르던 시즈쿠를 본 할아버지와 친구들이 합주하는 장면은 명장면입니다. 그러나 1절만 하면 좋은데 좀 길게 가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영화 엔딩 장면에서 갑자기 나온 대사는 중학생 입에서 나올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색하고 어색한 대사입니다. 하야오 감독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제대로 전달 못하는 시즈쿠 주변 인물과 다른 점을 보여주고 소극적이기에 청춘은 너무 짧기에 넣었다고 하네요.
<귀를 기울이면>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애니는 아닙니다. 이런 사춘기 성장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이나 잔잔한 내용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좋으나 심심한 내용이라서 실망하실 분들도 있습니다. 다만 누구나 사춘기를 지나왔듯이 그 사춘기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사춘기에는 첫사랑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는데 이 둘을 꽤 잘 조율해서 넣었습니다. 만약 원작대로 중학생의 청춘 로맨스로만 담았다면 흔한 청춘 멜로로 끝이 났겠지만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점이 다른 애니에서 보기 어려운 소재라는 차별성과 뛰어난 작화와 스토리로 담은 점이 이 애니를 명작 애니로 올려놓았습니다.
넷플릭스는 보통 자막이 올라오면 바로 다음 영화나 드라마를 추천하는데 이 <귀를 기울이면>은 자막이 올라가도 다음 영화를 소개하지 않고 자막을 다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자막 상단에 보이는 길을 따라서 애니에 등장했던 수많은 캐릭터들이 재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유오코와 야구부 스키무라도 나오니 꼭 찾아서 보세요. 귀를 기울여서 들어본 사춘기 시절의 내 모습과 우리들의 모습을 담은 애니 <귀를 기울이면>입니다.
별점 : ★★★★
40자 평 : 귀를 기울이면 잘 들리는 사춘기 시절의 떨리는 마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