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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영화 벌새의 씨앗이 된 단편 영화 리코더 시험

by 썬도그 2019.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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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는 올해의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한국 사춘기 영화 중에 이렇게 섬세하게 그 혼란스러운 시기를 잘 담은 영화가 있을까 할 정도로 섬세한 연출과 90년대 우리들 가정을 그대로 복사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벌새>의 원형질 또는 씨앗이 된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벌새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이 2011년에 제작한 단편 영화 <리코더 시험>입니다. 

벌새에서 나오는 가족과 거의 동일한 가족 풍경이 나오는 <리코더 시험>

김보라 감독은 2011년 서울시 지원으로 <리코더 시험>이라는 단편 영화를 만듭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부터 하자면 영화는 <벌새>와 달리 좀 심심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합니다. 다만 아역 배우가 너무 귀여워서 보는 내내 저 아역 배우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가 시작되면 1988년을 배경으로 한 초등학생이 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엄마에게 리코더를 안 가져왔다면서 가져다주면 안 되겠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초등학생은 힘 없이 전화를 끊습니다. 이 초등학생은 영화 벌새의 주인공처럼 이름이 은희입니다. 딱 봐도 아시겠지만 벌새의 은희가 리코더 시험의 은희입니다. 

두 주인공이 이름이 동일한 이유는 이 <리코더 시험>도 벌새처럼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감독 인터뷰를 보면 <리코더 시험>의 은희의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관객들이 많았고 이 은희가 중학교에 간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시작된 영화가 <벌새>입니다. 그래서 두 이야기는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야기 구조의 너무 비슷합니다. 

벌새에서 아버지로 나오는 정인기 배우가 이 <리코더 시험>에서도 아버지로 나오고 방앗간을 운영합니다. 

음악 시간에 리코더를 안 가져온 은희는 손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리코더 시험을 볼 예정인데 리코더를 잘 불면 다음 학기에 기학 발표회 공연을 하는데 그 공연에 부모님도 모시고 교장 선생님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리에 은희는 솔깃해합니다. 

빈부 격차를 점점 알아가는 은희

<리코더 시험>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서서히 끌어 올려가는 방식이라서 영화 초반에는 1988년도 재현한 모습만 눈에 많이 들어옵니다. 그 1988년 풍경이지만 현재를 사는 아이들도 공감을 할 수 있는 장면이 은희와 은희 반 친구 이야기입니다. 은희와 단짝 친구는 집에 피아노도 있는 은희네 보다는 잘 사는 집입니다. 은희 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은희 친구. 그런 친구가 부러운 은희, 친구 엄마는 은희에게 예쁘게 생겼다면서 과일을 깎아서 줍니다. 

"너희 엄마는 노크도 하셔?"

은희에게 있어서 문화 충격이었습니다. 평생 살면서 노크를 할 줄 모르는 가족과 다릅니다. 부자들의 예의 바름과 여유에 충격을 받습니다. 다들 그러시겠지만 저도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서울이지만 달동네 같은 동네에 살다가 아파트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같은 동네 아이들끼리 지내면 가난이나 빈부의 차이를 잘 모르잖아요. 다 똑같이 사는 줄 알죠. 그런데 다른 동네 그것도 우리 동네보다 잘 사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우리 집과 많이 달라서 크게 놀랍니다. 

노크도 안 하는 무례한 집안에 사는 은희. 그런 은희를 더 우울하게 하는 풍경들이 많았습니다. 

아빠는 바람을 피고 이걸 은희는 또 숨겨줍니다. 오빠는 연필깎이 가져오라도 다그치고 대들면 마구 때립니다. 딱 벌새의 은희 오빠와 동일합니다. 언니는 남자 친구 데리고 오는 것도 똑같습니다. 벌새처럼 <리코더 시험>의 은희네도 가족 간의 정도 없고 온기도 없습니다. 

가족에게 사랑 받고 싶은 어린 은희를 담은 <리코더 시험>

그렇다고 애정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닙니다. 표현을 잘 안 해고 사는 게 버거워서 그렇지 미술 100점 받은 은희에게 아이스크림 사 먹으라고 돈을 주기도 합니다. 그 시절 부모님들은 왜 그리 아이들에게 소홀했을까요? 저도 부모님 사랑보다는 맞은 기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참 여러 가지로 맞았습니다. 아이가 왜 그런가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안 한다고 참 무지하게 팼습니다. 

옆집에서 패면 이웃집 어른이 나서서 말려야 하지만 그냥 지켜만 봤습니다. 제 아버지는 군대에서의 기억이 많아서인지 군대식으로 패고 기합을 주고요. 뭐 그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다만 이야기를 들으려고 조차 안 했습니다. 

은희가 그랬습니다. 사랑 받고 싶은데 사랑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애정이 없는 부모에게 사랑받을 기회란 큰 상을 받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올 정도로 리코더를 잘 불어야 합니다. 오빠가 쓰던 리코더 대신에 새 리코더 사달라고 말하지만 듣는지 마는지 신경도 안 쓰는 아빠. 

그렇다고 은희네 부모님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80년대는 주 52시간 근로제는 꿈도 못 꾸던 시절입니다. 여공들이 타이밍 먹고 철야 근무를 하고 오전 일찍 문 열어서 오후 10시까지 근무하는 자영업자들도 많았고 직장인들도 오후 7시가 기본이고 보통 야근을 자주 했습니다. 

이런 높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집안까지 살피기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가부장제도가 만연한 시대라서 군대식 서열문화까지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는 단편 영화입니다. 그러나 주제가 명확하지 않아서 다 보고 나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좋은 단편 영화는 아닙니다. 다만 감독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이고 그걸 너무 잘 담아서 은희 같이 사랑에 목마른 그 시절 아이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네요. 

<리코더 시험>은 네이버 인디극장이 2019년에 활약한 여성감독들의 단편 영화들을 소개하는데 이 영화도 포함되어 있네요. 29분짜리 영화인데 벌새를 본 분들이라면 추천합니다. 아역배우 황정원 양도 참 귀엽고 연기 잘합니다. 

https://tv.naver.com/v/11589531

 

[네이버 인디극장] 리코더시험 (연출 김보라)

네이버 인디극장 | 기억할 이름들 : 이야기의 시작 <보희와 녹양>, <밤의 문이 열린다>, <우리집>, <벌새>, <메기>, <아워바디>, <82년생 김지영>, <이태원>. 관객들의 영화다이어리를 풍성하게 채워준 이 영화들은 어디서 출발해서 2019년 우리에게 도착한 걸까요? 그 어느 때보다 여성감독들의 약진이 빛났던 2019년. 이번 네이버 인디극장은 연말을 맞아 ‘안주영, 유은정, 윤가은, 김보라, 이옥섭, 한가람, 김도영, 강유가람’ 감독의 단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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