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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에관한글

일제가 촬영한 20세기 초 유리건판 사진 e뮤지엄에서 공개

by 썬도그 2019.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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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예술의 한 도구로 인식된 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1980년대부터 예술 사진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아무지 잘 찍어도 기록 사진일 뿐이었습니다. 일부의 사진가들이 서양에서 예술로 인정받는 모습에 사진의 미학적 가치를 찾으려고 무척 노력을 했지만 대중까지 사진을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 카메라만 들고 다녀도 사진작가라는 호칭으로 쉽게 불립니다. 신기한 게 제가 DSLR 들고나가면 사진 촬영 부탁하면서 사진작가님이라고 부르시고 미러리스 들고나가면 사진 촬영 부탁 조차 안 합니다. 

이 사진의 기록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집니다. 사진이 태동하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을 기록한 사진은 많지 않았습니다. 기록 사진들 대부분은 선교사나 특파원 같은 서양인들이 기록한 사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양에 살지만 서양인이 되고 싶었던 일제는 서양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고 그걸 바로 더 싸고 좋게 잘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제는 조선을 강탈한 뒤에 한국의 문화재들 사진으로 담기 시작합니다. 

<경남 합천 해인사 주지 / e 뮤지엄 제공>

기록의 민족 답게 일제는 엄청난 양의 사진을 일제 강점기 시절 남겼습니다. 필름 카메라가 나오기 전에는 유리건판에 감광 유제를 발라서 사용했습니다. 유리 필름이라고 할 수 있죠. 이 유리 필름은 촬영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깨지지 쉽죠. 그러나 깨지지 않으면 반영구적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필름이 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매체이긴 하지만 100년 넘어가면 못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위 사진을 보시면 최신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기록 매체로는 아주 좋은 것이 유리건판입니다. 일제는 유리 건판으로 1909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3만 8천 170점을 촬영했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유리 건판을 사진으로 인화하기 시작한 것이 1987년입니다. 이후 32년 동안 일제가 기록한 유리건판 사진을 600만 화소의 사진으로 변환했습니다. 엄청난 시간입니다. 32년 동안 사진 인화를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꽤 긴 세월이죠. 동시에 왜 이리 오래 걸렸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음 잡고 하면 빨리 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예산 때문일까요? 더 아쉬운점은 그동안 먼저 인화한 사진은 디지털화해서 세상에 공개를 하면 일제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나 저 같은 일반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교육 용도로도 많이 활용되었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비판 때문인지 다행스럽게도 이 사진들을 세상에 공개했고 출처만 밝히고 사용할 수 있는 사진들도 많이 공개했습니다. 

일제 시대 유리건판 사진을 볼 수 있는 e뮤지엄

http://www.emuseum.go.kr/main

 

전국박물관소장품통합검색

박물관소장품통합검색, 오늘의 인기소장품, 이뮤지엄스토리, 나도큐레이터 제공.

www.emuseum.go.kr

일제시대 촬영한 유리건판 흑백 사진은 e뮤지엄에서 공개되고 있습니다. 홈피에 접속 후에 스크롤을 하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 메뉴가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유리건판 흑백 사진이 가득합니다. 사진들은 대부분이 일제가 한국 문화재를 발굴한 고고학 관련 자료가 1만 4천 점입니다. 사진들은 기록물이지만 한국 유물들을 마구 파 해치는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일제가 도둑질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제가 한국 문화재를 얼마나 많이 훔쳐가고 도굴했는데요. 

그다음으로 많은 사진은 건축물로 전국 사찰과 건물을 촬영한 사진이 1만 1천여 점이고 미술이 6천600점이 됩니다. 인류, 민속 기록도 2천700점입니다. 일제는 한국 사람들을 머그샷 사진처럼 촬영한 사진도 많습니다. 기록을 목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식민지에 대한 시선도 많이 보입니다. 

사진들은 위 사진처럼 시대와 유리건판 크기와 해상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위 사진을 보니 유물 발굴하러 가다가 기념 사진을 찍은 듯하네요. 조선인 인부들이 있고 유카타와 양복을 입은 일본인들도 보입니다. 그런데 양복쟁이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겠죠.

사진들은 다운로드를 할 수 있습니다. 단 출처 표시는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사진에 따라서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불가한 사진이 있습니다. 제1 유형인 경우 영리 목적인 상업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지만 저작물 출처를 표시해야 합니다. 

제2 유형은 출처 표시를 하고 사용하되 상업적 이용은 금지입니다. 즉 보도, 교육, 개인이 활용하기 위한 것은 괜찮지만 그걸 돈 주고 팔거나 광고에 넣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해서는  됩니다. 제3 유형은 출처 표시를 하고 2차 창작물로 활용해서는 안되고 원본 그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4 유형은 출처 표시, 상업적 이용 금지, 원본 그대로 활용을 해야 합니다.

제1 유형이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대부분은 제1 유형으로 보입니다. 

<출처 : e뮤지엄>

위 사진은 1682년 일본이 조선 국왕에게 보낸 외교 문서네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 보낸 일본의 외교문서네요. 

<출처 : e뮤지엄>

경북 경주 황남리 을분 1실 내 토기입니다. 유물이 엄청나네요. 깨진 것도 많이 있습니다. 

<출처 : e뮤지엄>

황해 안악 연등사 5층 석탑입니다. 남한 내 문화재는 우리가 연구할 수 있지만 북한 지역 문화재는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사진들이 큰 도움이 될 듯하네요. 일제가 기록은 정말 꼼꼼하게 잘했네요. 이는 서울시나 21세기 한국 정부가 하는 기록보다 더 뛰어나 보입니다. 디지털 시대임에도 정부 차원에서 사진 기록물을 꼼꼼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사는 지역 구청에 왜 매년 변하는 지역을 사진으로 꼼꼼하게 기록하지 않느냐고 문의하니 예산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시민 단체가 요구를 하면 서울시에 문의해서 예산을 편성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게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아무튼 일제는 정말 기록을 많이 했고 잘 남겼네요. 다만 이런 사진들이 무심한 기록물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문화재 도굴이나 파괴, 도난의 모습으로 느껴져서 마음이 좋지는 못하네요. 다만 훔쳐갈 수 없는 전국 사찰 사진을 기록한 것은 무척 좋네요.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서울대와 성균관대에도 1천 점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진들도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들인데 이것도 디지털화 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하네요. 이런 것들은 빠르게 디지털 화하고 세상에 공개하는 게 좋죠. 그런 면에서 정부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공개하는데 너무 느리고 인색합니다. 그나마 이번 일로 변화가 생겼으면 합니다.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일제시대 촬영한 사진은 사진 저작권이 없습니다.

 1977년 이전 국내외 사진은 저작권이 없다?

 

1977년 이전 국내외 사진은 저작권이 없다?

요즘 사진 저잔권에 대한 개념이 높아져서 사진을 상업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저에게 연락이 가끔옵니다. 블로그를 처음 운영하던 2007년 경에는 없던 풍경이죠. 요즘 사람들은 사진 저작권과 초상권에 대한 개념..

photohistory.tistory.com

베른협약에 의해 1977년 이전에 촬영한 국내외 사진 모두 사진 저작권이 소멸되었습니다. 구 저작권법에는 사진 저작권을 딱 10년만 인정했습니다. 1987년 만들어진 신 저자권법은 50년으로 확 늘어나죠. 따라서 1977년 이전 사진은 사진저작권이 없습니다.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촬영한 사진이니 당연히 사진 저작권이 없는데 위에서 보면 유형별로 상업 사진 사용 금지가 있죠. 

그럼 국립중앙박물관이 오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진의 저작권은 촬영 날짜가 아닌 그 사진을 세상에 공개한 날짜입니다. 저 사진들은 일제가 촬영하고 세상에 공개한 사진이 아닌 그냥 사진 앨범에 저장해 놓은 사진인데 이걸 세상에 올해 공개 했으니 신 저작권 법에 의거해서 50년 동안 사진 저작권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진이 상업적으로 이용해도 허용하고 있으니 편하게 사용해도 됩니다. 단 출처는 밝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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