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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세상에 대한 쓴소리

추석이라는 축제를 노동으로 만든 차례상 차리기

by 썬도그 2016.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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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떡국을 먹고 추석에는 송편을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또래 친척들과 뒷산에 올라서 솔잎을 따오면 친척 어른들이 송편을 빗으라고 지시하면 아이들은 웃으면서 송편을 빗었습니다. 이게 추석의 맛이죠. 함께 뭔가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동안 듣지 못한 학교 이야기나 사는 이야기 듣는 재미죠. 

그런데 이건 아이들의 시선이고 외숙모들이 모여서 부엌에서 차례상 차리는 모습은 어린 아이의 시선이지만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음식하면서 큰 소리도 나고 역정을 내는 소리도 들리니까요. 남자나 아이들은 안방에서 마루에서 고스톱을 치고 윷놀이를 하고 오락실을 가고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놀지만 여자들은 하루 종일 전 부치고 나물 삶고 부엌일만 합니다. 당연히 외숙모들의 표정이 좋지 않죠. 

그래도 80년대까지는 전업 주부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명절 반짝 고생하면 집에서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부터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달라졌습니다. 설, 추석 명절 후에도 집이 아닌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다 보니 설과 추석이 다가오면 강한 음식 제조 노동에 시달린 것을 예상하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명절 스트레스'는 90년대 중반부터 신조어로 등장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명절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은 '차례상 차리기'입니다. 이 '차례상 차리기'만 없으면 여성들의 추석과 설의 스트레스는 확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차례상 차리기'는 언제부터 차렸을까요? 그리고 이게 전통일까요? 


차례상 차리기가 전통일까?

차례상을 직접 차린 적이 없어도 홍동백서, 어동육서는 한 번이라도 들어 봤을 것입니다. 이런 차례상 차리기는 전국 공통 사항입니다. 차례상 차리기 교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이 차례상 차리기 교본이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요?

전 차례상 차리기가 한가위라는 유래가 신라의 길쌈놀이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해서 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인 줄 알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아시죠? 한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온 조상의 은덕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위해 홍동백서하는 차례상 차리기인 줄 아시죠?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차례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동공지진이 일어날 정도로 화려합니다. 어린 시절 차례상에 올려진 음식을 보고 몇 번 절하면 저걸 다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황홀했습니다. 평소에 먹기 어려운 음식도 많았거든요.

특히 전 약과와 동그랑 땡 킬러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시대도 조선 시대도 그렇게 잘 살던 시대가 아니라서 평민이 저런 제사상을 차릴 수 있었나? 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양반 가문이야 쉽게 차릴 수 있지만 평민들은 차례상 차리기가 어려웠을텐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군요. 그런데 우리 조상들이 모두 양반은 아니였잖아요. 모두 양반이 아닌데도 모두 양반 가문에서나 차리는 상다리 뿌러지는 상 차림을 하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봤습니다. 


네이버의 뉴스 라이브러리는 근 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입니다. 180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까지의 신문들을 스캔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례상 차리기라는 진설 즉 어동육서 홍동백서라는 법칙이 언제부터 나오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놀랍게도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부터 엄청나게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니 전국 차례상 법칙이자 국가에서 장려하는 법칙인 차례상 차리는 법인 진설이 7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게 이해가 안 갔습니다. 저는 조선시대부터 유교 문화로 정해져서 전해져 내려오는 법칙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이에 국회도서관에 가서 관련 자료를 찾아 봤습니다. 국회도서관은 지난 잡지 기사와 논문, 도서 등 국내에서 가장 정보량이 많은 도서관입니다. 여기서 차례상 차리는 법으로 검색해보니 최근의 잡지들이 검색이 되기 되더군요. 


먼저, 한겨레 21의 2015년 9월 28일 1080호에 실린 내용과 섞어서  소개를 하겟습니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차(茶)로 예(禮)를 올린다는 의미다. 전통 제례 연구자들 또한 공통적으로 명절 차례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지내는 기제사와 다르게 조상의 명복을 빌려 간단히 지낸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가정의례 참고서였던 <주자가례>에서는 차례상으로 차 한 잔, 술 한 잔, 과일 한 접시가 전부라 적었다. 

<한겨레 21의 2015년 9월 28일 1080호 기사 중에서>

차례상이라는 어원이 이런 거였네요. 차를 예의 있게 올리는 것이 차례입니다. 좋은 술과 좋은 차, 과일 한 접시가 전부였는데 왜 현재와 같은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게 되었나요?



<2014년 9월 16일 주간경향 '차례상 차리는 법 언제 어떻게 유레 됐나?>

이는 주간경향 2014년 9월 16일 1092호에 나옵니다. 
기사 내용을 정리하면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는 요란한 차례상은 1960년대부터 신문들이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 차례상 차리는 법인 진설의 뿌리는 중국의 <주자가례>와 율곡 이이 선생이 쓴 <격몽요결>이 근원입니다. 그러나
<격몽요결>에도 책 말미에 진설이 실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격몽요결>의 강조점도 마찬가지다. 이이는 이렇게 썼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주로 사랑하고 공경하면 그뿐인 것이다. 가난하면 집안 형편에 어울리게 하면 되고, 병이 났다면 몸의 형편을 헤아려 제사를 지내면 되는 것이다. 

 주간경향 2014년 9월 16일 1092호 기사 중에서 

진설이 가문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해진 룰을 만들었지만 꼭 지켜야 할 것은 아니였습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보니 이 진설이 고착화 하게 된 것은 1973년에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 때문입니다. 이 <가정의례준칙>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차례상을 휘황찬란하게 차리고 이 때문에 과소비와 가계에 부담이 되자 몇몇 유명 양반 가문에 차리던 차례상 진설을 표준화 해서 보급한 것입니다. 

정부는 허례허식을 줄이고자 표준 진설을 보급해서 과소비를 줄이고자 한 목적이었죠. 
그럼 1973년 가정의례준칙이 만들어지 전에
는 어떤 풍경이었기에 이렇게 정부에서 간소한 차례상을 차리자고 했을까요? 이에 대한 좋은 기사가 있습니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왜 "추석 차례 지내지 말자"고 할까 기사보기

이 기사가 가장 정확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 예법을 지키던 이들은 양반들이었잖아요. 양반이 아니면 차례를 지낼 필요가 없었던 거죠. 조선 초기에 양반이 전체의 5~10%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머지는 상민이었으니, 90% 이상의 사람들은 차례를 안 지냈어요. 그런데 조선 말에 와서 계급 질서가 무너집니다. 양반 계급이 약 70%가 되는 거죠. 양반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늘어난 게 아니라, 상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양반으로 신분 세탁을 했기 때문이죠."

<기사 중 일부 발췌>

양반들만 차리던 차례상을 해방 후에 너도 나도 우리는 양반 가문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위시하기 위해서 양반급 차례상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이래서 1960년대에 차례상 배틀이 일어났고 이에 정부는 배틀 그만 두고 이렇게 간소하게 차리라고 한 것이 바로 어동육서, 홍동백서라는 진설이 보급된 것입니다. 

이마저도 지금은 과한 상차림이자 고통의 근원입니다. 즉, 지금의 차례상 차리기는 100년도 안 된 역사입니다. 모두가 양반이 아님에도 모두가 양반 가문식의 상차림을 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원인이 있습니다. 원래 이 차례상은 한 마을의 풍수제 같은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고 한해를 잘 마무리하게 해줘서 조상님들에게 그 은덕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마을의 제사상이었습니다. 당연히 한 마을이 모여서 차례상을 차리니 화려했죠. 

또한, 같은 성을 가진 씨족 마을이 많다 보니 종가댁 한 곳에서 차리면 다른 집에서는 간소하게 차례상을 차려도 됐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농경사회이던 한국이 산업화가 되면서 농촌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려고 하니 진설을 모르는 것입니다. 전화가 있어서 고향 마을에 물어 볼 수도 없었죠. 이에 언론사가 추석 차례상 차릴 줄 모르시니 우리가 표준 진설을 알려드릴께요 따라하세요!라고 한 것입니다. 

기억나네요. 아버지가 진설을 잘 몰라서 근처에 사는 고향에서 같이 올라온 분에게 진설을 묻고 차례를 차리던 모습이요. 이런 게 차례상의 어원이자 과거입니다. 이게 전통일까요? 100년도 안 된 풍경인데요. 


그래서 그런지 차례상을 구글 이미지로 검색하면 다 정형화된 차례상만 보입니다. 기억나네요. 80년대 mbc의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차례상에 바나나와 파인애플 케익 올렸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망조가 들었다면서 비난하는 블랙코미디가 생각나네요.

그런데 차례라는 것이 진설이 딱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사상이야 가문마다 각자의 진설로 차렸고 제사야 보편화된 진설 또는 가문이 정한 진설로 차리는 것이 예의라고 할 수 있지만 차례는 그 근거가 빈약합니다. 또한, 축문도 조상님께 흠향하소서라는 최소한의 형식만 넣으면 조상님에 대한 마음을 진솔하게 담아서 쓰면 된다고 전통사학자들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정작 전통사학자들은 간소한 차례상을 차리라고 권고하는데 왜 이리 사서 고생을 할까요?
후손들이 짜증내하는 상차림을 받는 조상님들이 기분이 좋을까요? 간소하고 작게 차려도 정성이 가득한 상차림이 더 좋지 않을까요? 오히려 차례상 앞에서 오돈도손 이야기 꽃 피는 후손들의 행복한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차례상 풍경 아닐까요?


추석은 축제다

설과 추석은 축제입니다. 산 사람들이 즐거워야 하는 축제입니다. 축제인데 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까요? 명절은 즐거워야 합니다. 남자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는 음식을 먹으면서 고스톱을 치고 여자 사람들은 짜증내 하는 풍경 자체가 아름답지가 않습니다. 

즐거우려면 모두 즐거워야죠. 고스톱을 쳐도 다 같이 쳐야죠. 그러려면 차례상을 간소화 해야 합니다. 간소하게 차린다고 조상님이 노발대발 하지 않습니다. 족보에도 없고 근거도 없는 화려한 차례상을 지킬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차례상은 간소하게 차리면서 동시에 모두가 함께 차리는 차례상이 되어야 합니다. 

간단하게 최대한 정성껏 차례상을 차리고 오후에는 온 가족이 여행이나 고궁이나 여러가지 축제 프로그램이나 다양한 곳에서 행복하게 보냈으면 합니다. 그게 추석의 의미 아닐까요? 신라의 길쌈이라는 축제가 근원인 추석 한가위. 우리도 이제 즐기는 추석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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