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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에관한글

카메라 기자는 목격자 이상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에 대한 생각

by 썬도그 2015.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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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세상을 변화 시키지 못하지만 세상을 변화 시키는 마중물이 되는 변화의 도구입니다. 얼마 전에 터키 해변에 떠내려 와서 곤히 자는 듯한 시리아 난민인 3살 쿠르디가 죽음을 담은 사진을 본 전 세계 사람들은 경악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독일과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전격적으로 시리아 난민을 받겠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터키 해변에 떠내려온 시리아 난민 3살 쿠르디>

세상 어두운 면을 사진으로 기록해서 세상에 알리는 사진기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세상엔 훌륭한 사진 기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한 여성 카메라 기자가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한 헝가리 민족주의 성향의 극우 방송사인 N1TV 소속의 카메라 기자가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넘어온 시리아 난민들을 막으려는 헝가리 경찰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은 유럽 대륙에 도착해서 헝가리를 거쳐서 오스트리아를 지나 독일로 향하는 긴 난민 여정을 겪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못사는 동유럽 국가들은 시리아 난민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합니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당연히 이 시리아 난민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외국인 노동자를 증오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헝가리 극우 방송사 소속의 N1TV의 여성 기자는 이 시리아 난민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아이를 안고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시리아 난민에게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립니다. 


이 뿐 아닙니다. 시리아 소녀를 발로 찹니다. 이는 명백한 기자 정신의 위반입니다. 기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개입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기자는 세상의 목격자이지 개입을 하는 행동가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성 기자는 현장에 개입을 합니다. 이 행동을 독일 기자가 촬영하고 세상에 알렸고 결국 저 여성 기자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카메라 기자가 아니더라도 저런 행동은 해서는 안 되죠. 사진 기자 또는 카메라 기자가 사건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기자들의 불문율에 동의 하시나요? 그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수단 난민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듯한 독수리, 1993년, 캐빈 카터>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이 사진 때문입니다. 1993년 아프리카는 심한 기근으로 많은 기아가 발생합니다. 
남아공의 사진 기자인 '캐빈 카터'는 수단의 기근 현장을 촬영합니다. 수단 기아 캠프를 촬영하던 카터는 한 소녀가 엎드려 있고 그 뒤에 독수리가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독수리는 죽은 고기만 먹기 때문에 소녀가 죽기만 기다리는 모습에 전 세계는 충격을 받고 수단에 많은 구호 물품을 보내줍니다. 사진 한 장이 세상을 변화 시킨 모습이죠. 이 사진으로 '캐빈 카터'는 퓰리처 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카터를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만 찍었냐?"라는 사진 기자의 윤리에 대한 비난을 했습니다. 
이에 카터는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해봐야 분란만 더 늘어나죠. 이 사진만 보면 분명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을만 합니다. 사진은 전후 사정을 다 담지 못하는 매체니까요. 이 사진의 뒷 이야기를 책과 영화에서 들어보면 카터는 이 사진을 찍고 독수릴 쫒아 버렸습니다. 또한, 저 소녀는 구호품을 받기 위해서 잠시 들판에 아이를 놓고 간 엄마가 구호품을 받고 아이를 데려 갔을 것입니다. 보통, 수단에서는 저렇게 들판에 아이를 잠시 놓기도 하거든요. 그 모습은 카터가 보지 못하고 타고 온 수송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캐빈 카터가 이렇다할 변명을 하지 않은 이유는 사진 기자 사이의 불문율 때문입니다. 그 불문율이란 
'사진 기자는 세상을 목격하는 목격자'가 사진 기자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문율은 세상의 상식에 부딪히면 파열음이 낼 수 있습니다. 



<1998년 수단 국경지대 Ajiep 기아 캠프, 사진작가 Tom Stoddart>

이 사진은 캐빈 카터의 '독수리와 소녀' 사진보다 더 적나라 합니다. 1998년 수단 국경지대의 기아 캠프에서 걸음 조차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뼈가 앙상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이 자신의 집에서 구호품인 옥수수 가루를 훔쳐가는 사람을 원망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 말종을 담은 사진이죠. 

그런데 이 사진을 찍은 사진 기자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저 잔혹무도한 도둑에게 주먹을 날린 후 구호품을 다시 되찾아서 돌려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사진을 찍은 사진 기자는 기자들의 불문율인 현장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냥 지켜만 봤나요?" "저 상황에 끼어들어야 하지 않나요?"
이런 질문에 Tom Stoddart는 이렇게 말 합니다. "난 구호단체 요원도 아니고 경찰도 아닙니다. 난 사진가입니다"

이 대답을 한 사진 기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시리아 난민을 넘어뜨린 카메라 기자를 보고 우리는 손가락질 했습니다. 손가락질 이유는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난민을 넘어트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기자 이전에 일반인도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지만 극우주의자인 여성 기자는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렸습니다.  또 하나는 기자는 무릇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사건에 개입을 했습니다. 

이 질문을 1998년 수단 기아 캠프를 촬영한 Stoddart 사진 기자에게 대입해보죠. 저 상황에서 개입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아님 기자의 불문율을 따라야 했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저 Stoddart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확실합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진기자는 사건 현장을 기록할 뿐 사건이나 사고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군 사진기자와 적십자 요원은 적군이라도 죽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들이 사건이나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정답은 없는 질문이지만 대다수의 생각을 전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Stoddart의 방관하는 행동을 비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은 사진 기자나 사진가의 본분을 잘 알지 못하고 그냥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의 잣대로 사진 기자를 재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Tom Stoddart를 대부분 비난할 것입니다. 그런 시선을 어쩌면 자연스럽습니다. 저 또한, 저 사진을 찍고 더 도둑놈에게 다가가서 잘못을 따지고 구호품을 다시 돌려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자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저 Stoddart의 행동을 이해하고 옹호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진 기자와 일반인 사이의 생각의 차이이자 시선의 차이가 발생하고 불필요한 사진 논쟁이 시작됩니다. 이런 일은 이 사진 말고 꽤 많았고 앞으로도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진 기자들이 이런 비난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지만 사진 기자들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다는 믿음을 줘야 전장에서도 사건 현장에서도 어떤 사람도 제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 '나이트 크롤러'는 사이비 기자와 기자의 다른 점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인 사이비 기자는 사건 사고 현장에 누구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동성을 발휘해서 사고 현장을 동영상으로 담습니다. 그러다 특종 욕심에 사고 현장을 더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기 위해서 사체를 이동 시키는 등의 현장 훼손까지 합니다. 

사진 기자들의 고충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사진 기자 그들은 세상의 목격자입니다. 그러나 사진 기자도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Stoddart를 비난합니다. 이런 사진 기자의 딜레마는 앞으로도 계속 될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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