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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서울여행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구로공단노동자 생활체험관'

by 썬도그 201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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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근처에 있는 가산디지털단지와 구로디지털단지를 자전거를 타고 가끔 갑니다. 가면 금천구나 구로구답지 않은 거대한 빌딩숲을 보면서 약간의 현기증도 느껴집니다. 저 거대한 빌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는 생각도 함께 거대한 빌딩의 이질감과 그 곳에서 근무하는 사람에 대한 이질감도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두 디지털단지에서 근무하는 사람 대부분은 지역주민이 아닌 외지인들이기 떄문입니다. 금천구민도 구로구민 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살면서 출퇴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가산디지털단지는 섬과 같아 보입니다. 일만하는 섬, 아니 구로공단의 21세기 버젼이죠. 외형적으로는 큰 성장과 깨끗한 건물을 보면서 공단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은 21세기 공순이, 공돌이 같은 느낌도듭니다.

 

 

공돌이 공순이라는 호칭을 잉태했던 구로공단

공돌이 공순이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왜 그들을 폄하하고 배척하고 무리짓기를 해야 합니까? 그들이 뭔 잘못을 했나요? 아니 그들은 효녀이자 효자들이었습니다. 남들 대학갈 나이에 대학갈 머리는 되지만 집안 식구들 먹여살릴려고  혹은 동생 대학 보낼려고 저 먼 시골에서 상경해서 15살에서 17살 나이라는 중고등학생 나이에 공장에 취직해서 집에 돈을 보내고 동생 대학 등록금 보내던 그 여공들이 무슨 죄인입니까?

그들은 영웅입니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부국강병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군말없이 타이밍이라는 요즘 말로 하면 붕붕쥬스 같은 잠 깨는 약 먹어가면서 미싱에 자기 손톱에 바늘이 박히는지도 모르고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을 공순이 공돌이라고 칭하면서 손가락질 합니까? 뭐 그렇게 손가락질 하고 폄하하면 내가 더 잘나 보입니까?

나이드신분들 잘 아시잖아요. 한국이 초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공들의 힘이 컸습니다. 한국이 지금같이 고속성장한 이면에는 노동집약적 산업인 섬유와 가전제품 제조를 통해서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조악한 환경에서 푼돈 받으면서 근무한 사람들이 여공들입니다. 그들은 국가 경제의 큰 엔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공순이라고 놀립니까?코메디언들은 아직도 툭하면 가리봉동을 말하고 가리봉동에 산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울화통이 터집니다. 가리봉동 사는 것이 왜 웃기고 추하고 숨겨야 하는 것인가요? 하지만, 한국에서 30년 넘게 살아보시면 합니다. 원래 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피상적인 것에 목숨 거는 나라라는 것이라는 것을요. 졸부나 세금 포털 여러가지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돈을 끌어 모아도 부자이면 우러러보고 평생을 근면 성실하게 살아도 돈 없으면 괄시 받는 나라라는 것을요.서두가 좀 길었네요. 

2012/02/20 - [여행기/니콘 D3100] - 거대한 섬과 같은 가산디지털단지의 빛과 어두움

라는 글을 통해서 구로수출공단이 김대중 정부 때 IT와 패션 단지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현재는 가산과 구로 디지털단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을 소개 했었습니다. 이 가산과 구로 디지털단지는 60~80년대 후반까지 아니 지금도 남아 있는 수 많은 공장들의 연속체였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네요 90년대 중반 집 근처이지만 가보지 못했던 구로공단에 들어섰다가 낯선 공장들의 모습에 친구와 황급하게 빠져 나왔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 구로공단에서는 수많은 여공들이 근무를 했었습니다. 이 여공들은 닭장 혹은 쪽방 혹은 벌집이라고 하는 쪽방에서 기거를 하면서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야학을 하면서 집안을 뒤바라지 해야 했습니다. 그 쪽방은 아직도 몇몇 곳에 남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쪽방을 '금천구'에서 13억인가 하는 돈으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구로공단노동자 생활체험관'입니다. 

 

위치는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에 있습니다. 걸어서 약 5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 가산디지털단지역도 원래는 가리봉역이었죠. 가리봉역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저 뒤에 저런 병풍같은 큰 건물이 없었고 온통 1층 혹은 2층 짜리 건물만 즐비했는데요

구로공단노동자 생활체험관은 주택 사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쉽게 찾을 수는 없고 지도로 정확하게 지정해서 찾아가야합니다.
주소는 가산동 39-7번지이고 바로 옆에 버스 차고지가 있습니다. 


이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은 한 주택을 금천구청에서 구입을 해서 재단장을 했습니다. 따라서 전문 전시관 형태는 아닙니다. 저는 이런 공간이 아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쪽방과 구로공단 여공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거기에는 아주 작게만 전시하고 있습니다. 네! 대한민국 찬란한 역사에 일부분이고 자랑스러워 할 역사도 아니기에 작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할 수 있게한 가장 큰 엔진이었는데 너무 천시하는 모습은 서글프네요. 그래도 금천구가 구 재정이 어려운 가운데 10억 이상을 투자해서 이런 전시관을 만들었네요. 번쩍거리는 역사만 역사가 아닙니다. 이런 필부필부들의 삶도 역사이지요. 상류층 인기인, 유명인들의 삶만 역사에 기록하면 그건 조선왕조실록이지 역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체험관 입구에는 가리봉 상회가 있었습니다. 가건물 형태인데 예전 구멍가게 형태 그대로네요

옆에는 지하1층, 지상 2층의 주택을 개조한 체험관이 있었습니다. 

 

월요일과 설,추석 연휴를 빼고 개관을 합니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 부터 오후 5시로 비교적 짧습니다. 아무래도 형편상 길게 운영하기 힘들어 보이네요. 홈페이지도 있다는데 주소창에 입력해보면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만들고있나 보내요.
입장료는 없는 무료입니다. 그런데 신문기사를 보면 입장료 1천원이라고 하던데 신문기사가 잘못 되었네요. 아니면 나중에 유료로 전환할 수도 있겠다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지금은 무료입니다. 

 

가리봉상회에는 70,80년대 팔던 추억의 먹거리와 딱지 생필품 등을 팔고 있었습니다. 80년대 구멍가게 그대로네요. 

 

 

 

번개탄과 연탄도 있습니다. 번개탄은 연탄에 불을 붙여주는 역활을 했는데 번개탄 위에는 톱밥이 있어서 톱밥에 성냥으로 불을 부치면 번개탄이 활활 타고 그 번개탄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연탄을 놓으면 연탄이 점화가 됩니다. 

 

뽑기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전시용이었습니다. 

CCTV가 살피고는 있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어서 누가 집어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차라리 양심 저금통을 놓고 몇몇 제품은 판매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계단을 밟고 옆 건물인 생활체험관으로 갔습니다. 올라서자 마자 이금희 아나운서의 멘트가 녹음된 영상물이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었고 구로공단 여공들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습니다.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 1단지, 2단지, 3단지로 되어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 곳에서 대한민국 수출신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반공과 함께 수출을 국시로 삼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와 함께 받은 일본 자금등을 이용해서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세웁니다.  극렬한 대학생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으 한일 국교정상화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일본에 대한 앙금 보다는 먹고 사는 것을 선택 했습니다.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을 탄생한 것도 국민들의 침묵과 사회 변화 보다는 안정을 택한 대다수의 국민덕뿐입니다. 항상 소수가 정부에 저항했지 다수는 침묵하거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관심이 없었습니다. 4.19도 이야길 들어보면 우발적 성향이 강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1970년 한국경제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시작으로 수출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지금의 인도나 중국 방글라데시나 태국 같은 역활을 한국이 했었죠. 70년대 주요 수출품은 가발, 신발, 의류 같은 것이였습니다. 위 사진은 1970년 영등포 구로공단 내 가발 공장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금천구, 구로구로 나눠졌지만 예전에는 영등포구였습니다. 동작구도 관악구에서 분리되었고요.

박 전 대통령의 구로공단 방문이 많이 있었죠. 

 

이 여공들은

지금 50,60대가 되어있겠네요

한쪽에는 디오라마가 있었습니다. 

여공들은

돈이 많지 않기에 작은 방에 3명 이상씩 기거를 했습니다. 같이 하숙을 했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고 냉장고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어서 퇴근길에 근처 대림시장에서 반찬꺼리를 구해서 밥을 해 먹었습니다. 

 

여공들의 인권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노동단체요? 그런게 어디 있었겠습니까? 미싱질 하다가 피가 나서 원단에 피가 묻으면 공장 관리자는 싸다기를 날리곤 했었습니다. 

심상정

의원은 여공출신입니다. 그 이야기를 한 전시회에서 들을 수 있었는데 매일 같이 야근 아니 철야를 하다보니 졸리우면 타이밍이라는 잠 깨는 약을 먹어야했고 선풍기도 없는 공장에서 여름을 나야했습니다.  가루주스를 마셔가면서 일했던 70,80년대 

그러다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3인의 구속으로 85년 첫 동맹파업을 합니다. 

이 구로공단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았는데 그 영화가 이경영, 옥소리 주연의 박종원 감독 연출의 89년작 구로아리랑입니다. 
원작소설은 이문열이 썼는데 나이들면 다들 변절을 하는 것인지 세상이치가 그런 것인지 오적을 쓴 김지하도 이문열도 보수의 나팔수가 되어 버렸네요. 
저도 나이가 들면 보수가 되어서 보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지 모르겠네요

80년대 후반 대학생들의 극렬한 학생시위가 있던때에 많은 대학생들이 신분을 위장하고 공장에 취직해서 의식화 운동을 합니다. 이 대학생들을 학삐리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학삐리 이야기를 공지영이 소설로 쓴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공지영은 부유한 집에서 자라서 연세대 재학시저 학삐리로 이 구로공단에 위장취업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또 한명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신경숙은 여공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두 여류소설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소설가인데 둘의 사회를 보는 시선은 좀 많이 달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다시 하도록 하죠 

 

공동체 생활을 쪽방촌에서 하다보니 자는 곳은 각자의 방에서 잤지만 씻는 것과 화장실은 함께 해야 했습니다. 

 

 

이게 여공들이 3명 정도씩 함께 기거했던 쪽방입니다. 단촐한 가재도구와 함께 칼잠을 자야할 정도로 좁은 공간입니다

둥그런 상에서 함께 식사를 했었죠. 신경숙 소설 '외딴방'은 이 구로공단 전자업체에서 근무하면서 쪽방에서 외사촌누이 큰오빠 작은오빠와 함께 기거하던 시절을 소설에 담았습니다. 신경숙 소설가의 팬이라서 그녀가 쓴 예전 책들은 모두 읽어 봤는데 정읍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구로공단에 16살인가에 취직을 합니다. 

소설 '깊은 슬픔'에서 잠시잠깐 이 쪽방 이야기를 하던데요. 그 이야기의 확장판이 바로 '외딴방'입니다. 외딴방에서 그런이야기가 나오죠. 신경숙이 유명 소설가가 되고 공단 생활의 이야기가 살짝 나오는 것을 알고 영등포여고 야간 동기가 전화를 해와서는 

"넌 우리 이야기를 안 하더라"라는 말에 대한 반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딴방에서 긴 한숨을 뱉어냅니다.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되기도 한 '외딴방'은 신경숙이 쓴 유일한 사회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경숙이 좀처럼 하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의 과거를 각혈하듯 써내려간 책입니다. 신경숙은 공지영과 달리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작가이고 대부분은 보편적인 삶에 대한 성찰이나 우리들의 일상을 소설에 담는 작가입니다. 따라서 외딴방도 수줍게 꺼내든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지네요. 

따라서 쪽방에 대한 이야기는 신경숙 소설 '외딴방'에서 자세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수년 전에 신경숙은 가리봉동 쪽방촌을 독자들과 함께 돌아보기도 했는데 언제 한번 이 '구로공단노동자 생활체험관'에 들리거나 혹은 기고문을 통해서 그 쪽방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었으면 합니다. 당시 80년대 소설들은 너무 이념화 되거나 관념화 되어서 이런 이야기를 경험한 작가도 없고 이 쪽방 이야기를 하는 작가도 많지 않았습니다.

미러리스 카메라만 들고 갔는데 미러리스 카메라는 역시 어두운 곳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못하네요.
다음에는 DSLR을 들고 가봐야겠습니다. 그래도 동영상은 아주 잘 나왔더라고요

책상이 없어서 라면박스를 개조한 책상위에서 책을 읽고 있네요. 구로공단은 여공들이 많았지만 남자 공장 근무자도 많았습니다. 대부분이 시골에서 올라와서 가족과 남동생 혹은 오빠들의 뒷바라지를 했었죠.

 

 

 

쪽방의 또 다른 이름은 벌집이었습니다. 벌집 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의 연속체, 무려 37개의 방이 한 집에 있었는데요. 이 쪽방은 아직도 가산동과 가리봉동에 남아 있습니다. 

 

11층에는 희망의 방, 순이의 방이라는 2개의 쪽방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팔각

성냥인 UN성냥도 보이고요

70년대 통기타 문화의 인기를 증명하듯 집집마다 통기타 하나씩은 있었습니다. 가요책을 펼쳐서 기타를 치기도 했고요.

 

철제 프레임을 비닐로 씌운 간이 옷장인 비키니 옷장도 있었습니다. 비키니 옷장 그 당시 혼자 사는 자취방에도 참 많았죠

 

삼성 선풍기네요. 삼별이 시절 삼성 마크도 보입니다. 

 

 

왜들 그렇게 못난이 인형을 다들 샀을까요? 저도 어린시절 집에 못난이 인형이 있었는데 정말 못생겼는데 왜 그게 거기에 있는지 이해가 좀 안되었습니다. 차라리 바비인형이 낫죠. 

 

 

근무복이 일상복이 되었던 공장 근무자들의 애환이 방 가득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지하에는 6개의 쪽방이 있었습니다. 

 

이 공간은 체험관입니다. 신청자를 대상으로 이 쪽방에서 숙박 체험을 할 수 있게 한다고 하는데 하는 절차나 과정은 홈페이지가 열린 후 가능할 듯 합니다. 지하공간이라서 쾌쾌하고 음습한 기운이 가득 했는데 어떻게 운영될지 궁금하네요. 누가 여기서 잘까요? 6~80년대 그 여공들이 친구들과 함께 여기서 수다를 떨러 올까요? 아니면 요즘 청소년들이 숙박을 하면서 우리 할머니 세대들이나 엄마가 여기서 살았구나 할까요? 생각해보니 이 공간을 체험할 사람들의 누구일지 딱히 떠오를 것 같지 않습니다. 분명 그 시절을 추억으로 남기고 혹은 살짝 그리워 한다고 해도 지독했던 그시절을 다시 꺼내서 볼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50,60대 남자들에게 군대 병영 체험을 하게 해준다고 하면 누가 그 체험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저도 집근처이고 해서 한번 자볼까 하는데 홈페이지가 열리면 또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층으로 향하는데 한 고양이가 저를 빼꼼히 쳐다 봅니다. 도망가지도 않아요. 전형적인 길냥이인데 너무 빤하게 봐서 제가 더 놀랐습니다. 그것도 지하에서 올라오는데 저 고양이가 보고 있네요. 아후~~ 깜짝 놀라라. 지난 토요일에 갔는데 제가 머물던 30분 동안 관람객은 약 5명 정도였습니다. 아직 홍보부족도 있지만 많이 찾아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구로공단 여공들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화려한 것만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2층에는 구로공단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 되었고 운영하는 분의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여공의 하루일과을 유심히 봤습니다. 공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나마 야간에 학교를 다니던 여공들은 공부를 했습니다. 작가 신경숙도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반을 다녔었습니다. 공장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과 소설가의 책을 그대로 종이에 옮겨 적으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키웠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여류 소설가 되었고 '엄마를 부탁해' 같은 슈퍼 베스트셀러도 탄생하게 됩니다.  

여공들은 20대 미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현재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프랜차이즈에서 알바를 하는 10대들 얼마나 많습니까? 밤 늦게 까지 햄버거를 만드는 그 10대들이 바로 현재의 여공이자 공장 근무자입니다.

여공의 학력구성비를 보니 국졸이 가장 많네요.  문맹도 20%가 넘었습니다.
예전부터 여자들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인식들을 많이 했었죠. 80년대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은 귀남(최수종)과 후남(김희애)가 주연을 했는데 이런 공부에 대한 남녀 차별을 잘 담고 있습니다.
배우지 못한 서러움도 큰 서러움인데 다른 친구들은 카라깃이 빳빳한 교복을 입고 다닐 때 공장에서 혹은 밭에서 집안일을 돕는 우리네 어머니 혹은 할머니들은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죠. 모두가 대학까지 가는 세상이 되었지만 대학에서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펑펑 소비를 하고 누구는 중간고사 기간에도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야 하는 모습.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평등한 것 같지도 않고 부모팔자 반팔자라는 말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불평등을 사회가 정부가 해소해야 하는데 그냥 방관하고 있네요. 그나마 박정희나 이승만이 잘 했던 것은 평등한 출발 또는 개천에서 용나게 한 모습은 좋았습니다. 한국 같이 신분상승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나라도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현재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게 되었고 점점 계급의 고착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부자 아빠 밑에 부자 아들이 나오고 가난한 아빠 밑에서 가난한 아들이 길러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가 저 어렸을 때 옆방에서 세들어 살던 구로공단에서 일을 했던 누나와 연락이 되어서 그 누나 딸 결혼식이라고 초대를 했다면서 정말 잘 풀려서 좋다면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한국 경제발전은 박정희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여공들의 각혈을 하면서 중노동을 했기에 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박정희라는 사람 혼자서 다 해놓은 줄 압니다. 이런 생각들이 그의 딸 까지도 대통령을 만들었네요.

 

그런데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이 신문기사였습니다.
보통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더 알콩달콩 콩 한조각도 나눠먹고 경사가 있으면 같이 축하해줄 것 같겠지만 오히려 서로 데면데면 했었다고 하네요. 그 이유는 서로 알고 지내면 귀찮을 때가 더 많고 수시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면 떠나기 때문에 서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참 씁쓸하죠. 
이 기사를 보니 이 구로공단노동자 생활체험관'도 과연 누가 찾아올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경숙도 그렇고 이 쪽방촌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려고 하지 않흘테니까요. 오히려 저 같이 지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찾지 않을까 하는 우울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 쪽방촌 그리고 가리봉 그리고 구로공단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장미빛 인생'에서도 살짝 볼 수 있습니다. 
한 만화가게를 둘러싼 인물군상들의 이야기인데 로드무비가 아님에도 로드무비로 읽혀졌던 영화입니다. 
가리봉, 이 이름은 창피하거나 희화되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이 중공업 산업으로 변환하기 전의 번개탄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구로공단이고 한국경제의 마중물이 되었던 곳이자 수 많은 공장 근로자들의 각혈이 스며든 곳입니다. 감히 누가 여길 희화시키고 놀리는 겁니까?이게 다 역사에 대한 소양의식이 없는 1차원적인 삶들이 많아서여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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