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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7

고종의 영빈관이었던 덕수궁 돈덕전 개관 그리고 이걸 왜 지었을까? 추석 연휴에 4대 고궁이 무료 개방 합니다. 사람들이 정말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덕수궁 및 덕수궁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서울역사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미국 대사관저와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데 저 서양식 건물이 보이네요. 저 건물 코로나 때 봤는데 언제 완공되나 했네요. 그렇게 지나가려고 하는데 사람이 보입니다. 응? 개방을 했나보네. 발길을 다시 덕수궁으로 향했습니다. 덕수궁 갔다가 석조전 뒤쪽은 안 봐서 몰랐네요. 왔던 길로 돌아갈까 하다가 영국대서관저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여기는 수년 전에 영국대서관저와 수많은 설득으로 개방을 한 덕수궁 돌담길입니다. 평상시에는 이렇게 거대한 볼라드가 서 있어서 차량은 못지다닙니다. 오른쪽 쪽문으로 들어가면 덕수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팬스가 있는데 펜스.. 2023. 10. 2.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 덕수궁을 끼고 정동 로터리 쪽으로 걷다보면 시간의 타임워프가 일어납니다. 정동길에는 수 많은 근대 유물들이 가득합니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도 있고 정동교회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중명전은 가보질 못했네요 수 없이 정동길을 지나갔지만 중명전을 가보지 못한 이유는 이 중명전이 대로변에 있는 것이 아닌 살짝 골목을 들어가야 보이기 때문이고 항상 의경이 있어서 고위 관료의 집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지난 광우병 촛불시위 때는 전경 중대가 항상 배치되어 있어서 제 상상은 확신이 되었습니다.정동극장 로비를 촬영 한 후에 우연히 근처에 있는 중명전을 들어가 봤습니다. 아니! 이런 곳이 있었다니하는 장탄식이 나옵니다. 참! 사진은 날이 좋은 날 찍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네요. 미러리스로 찍었는데 같은 사진이라도 이렇게 .. 2013. 3. 27.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는 이유 위클리 경향에서 프랑스에서 발간된 월간지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 조선의 황후라고 소개하면서 올라온 사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을 보니 명성황후의 사진의 진위여부는 알수 없다고 뜨뜨미지근하게 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명성황후의 사진들. 그 사진들 대부분 가짜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궁녀사진을 여러 해외언론들이 마치 조선의 왕후인양 보도하고 전파되었지만 정작 정확한 명성황후의 사진은 아직까지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명성황후사진은 그렇게 찾아도 없을까요? 사진이 없던 시절이어서요? 아니죠. 사진은 명성황후가 있던 시절에 발명되고 한참후였고 고종같은 경우는 사진찍는것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구글 이미지 검색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고종사진이 나오는지요. 이렇게 고종.. 2010. 5. 27.
100년전 한국을 생생하게 느낄수 있는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http://photohistory.tistory.com2009-06-22T10:42:220.3810 반만년 역사라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나 방송에서나 민족정기 고양을 위해서 반만년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사실 우리에게 그렇게 공감 가는 단어는 아닙니다. 반만년 역사라고 하지만 그 흔적들은 별로 없습니다. 종로에 가면 무슨무슨 터가 있던 곳이라는 수많은 조선시대 건물들의 묘비만 있고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고 조상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도 있는 것 보존보다는 개발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 많습니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재개발지역이라고 성북동 한옥 밀집지역을 철거하려다가 한 외국인이 발품을 팔아 주민동의를 얻어 재개발을 막아냈고 한옥을 보존시켰습니다.. 2009. 6. 22.
대한민국 최초의 커피숍 덕수궁 정관헌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은 어디일까요? 정확한 기록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커피숍이라긴 뭐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커피를 먹던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덕수궁 정관헌입니다 이 덕수궁 정관헌은 덕수궁에서 들어와서 오른쪽 맨 꼭대기에 있는 건물인데 우리나라 고궁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로마네스크풍의 건물이라고 하는데요. 기둥과 기둥사이가 아치형을 그린것을 보고 로마네스크풍이라고 한듯 하네요. 로마시대에는 아치형 다리와 수로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고궁에 가면 가끔 서양식 건물인데 그 서양식 건물들 대부분이 러시아에서 만든것들이 많더군요. 작년 봄에 갔었던 강릉 선교장에서도 러시아 공사가 선물해준 열화당이 있었습니다 1815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준 선물인데 어딘지 모르게 덕수궁 정.. 2009. 2. 1.
고궁박물관에서 본 순종황제의 어차(리무진) 경복궁옆 고궁박물관은 조선 왕실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여러가지 볼거리가 많은데요 1층에 전시된 순종황제의 어차를 발견 했습니다 오래된 차라서 더께가 덕지덕지 붙어 있을줄 알았는데 어제 정비받은 차처럼 보이네요 내려가 봤습니다 차량은 두대가 있습니다. 저는 이게 고종황제의 어차인줄 알았는데 고종황제의 어차는 아니고 순종황제의 어차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1904년에 들여온 포드사의 어차였는데 러일전쟁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두번째 어차가 들어온것이 바로 이 순종황제 어차인데 이 어차는 원래 고종황제를 위해 들여온 어차이고 뒤에 보이는 어차가 바로 순종황제의 어차였다. 그러나 고종은 별로 타지도 않아 아들인 순종에게 자신의 어차를 물려주게 되고 순종황제가 주로 타게 되면서.. 2009. 1. 17.
운현궁의 봄 1편 삼청동을 지나 종로3가쪽으로 내려가다가 운현궁을 발견했다. 우리에겐 쇄국정책의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궁으로 알고 있다. 그 쇄국정책으로 인해 자율적인 근대화를 늦추게 하는 결과를 유래했다고 하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얘기이구 유교문화가 조선의 국시이던 시절에 흥선대원군 아버자의 묘를 파헤친건 독일인 이었다. 왜 파해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놈 때문에 쇄국정책을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것이다. 오히려 개화파들이 일본가의 을사늑약의 디딤돌을 만들어준것은 자명한일이다. 힘이없는 나라이고 국력이라든 개념도 없던 시절이니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다 일본이 통치하는 가슴아픈일이 생긴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절에 일본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국등등 일본이 아니였어도 누군가의 속국이 되었을것이라 본다. 운현궁은 안국역 바로앞에 있다.. 200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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