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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알아두면 편리한것들

쾌락에도 고급쾌락과 저급 쾌락이 있을까요?

by 썬도그 201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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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페 느와르'를 보면서 중간에 나가는 커플을 봤습니다. 
영화가 지루하고 이해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해 못하는 책을 붙들고 이해 할려고 노력하는 것 만큼 지루한것도 없죠

영화 '카페 느와르'는 낯선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할 영화는 아닙니다.
자신의 교육수준과 교양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카페 느와르'에 내제된 깊은 감성적 충만함과  여러 장치들을 해체 시킬 수 있고 해체시킨 만큼   더 많이 느낄 수 영화임은 틀립없습니다.  왜냐면  카페 느와르는 예술 영화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술영화를 손가락질 합니다.
한때 문화부장관이었던 영화감독 이창동은  어느 책에서  요즘은  사람들이 영화를 이해못하면 감독 욕을 하는 시대라고 개탄을 하더군요 자신의 무지와 무식은 탓하지 않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감독 욕을 하는 시대.  참 요상한 세상이죠

매일 밤 12시에 하는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 강의에서는 어제  공리주의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공리주의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개념입니다.
이 공리주의는 18세기의 제레미 벤담에 의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어제 강의는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우리 생활속에서 가장 친숙한 철학이 바로 공리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어떤 의견대립이 있으면 보통 어떻게 하세요?

보통 다수결로 정하지 않나요?  이런 다수결의 원칙이 발현된것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등 대부분의 선거제도의 기본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소수의 불만이 있긴 하지만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서 소수의 행복을  무시할 수 있다고 보는게  공리주의입니다.

샌덜교수는 이런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이런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로마시대때  사자의 먹이로 내던져진 기독교인들의 처참한 소수의 고통을 통해 지적했습니다.    다수의 로마인들이 행복하다면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사자밥이 되도 큰 문제가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자밥이 되는 기독교인들의 고통을 알기에 이런 행동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수의 행복을 위한다고 해도 소수의 기본권 마져 헤치면 안되죠. 이런 이유로 모든것을 정량화 계량화 했던, 심지어 사람 목숨까지 돈으로 계산하고 환원한  공리주의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대기업들이나 담배회사 같은 경우  담배를 피게 함으로써  얻는 국가적 이익이 크다는 논리로 국가를 설득하기도 했죠
담배 많이 펴서 국민들이 많이 죽으면  연금 안줘도 좋고 담배에 붙는 어마어마한 세금 벌어서 좋고 여러모로 국가에게 도움이 되죠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한때 전매청이라는 국가 기관에서 담배를 팔기도 했죠.  뭐 지금도  담배 피지 말라면서 담배에 붙는 엄청난 세금으로 지방세수 채우는  이 엄청난 모순,   지방에 가면 육교에서 우리지역에서 담배 사라고 하는 푯말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기관인  보건복지부는 금연하라고  하구요.  두 기관이 국민을 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곘지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는  제자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에서 수정이 됩니다. 벤담이 양적인 공리주의를 추구했다면
스튜어트 밀은 질적인 공리주의를 추구했죠.  공리주의가 너무 비인간적인 모습 즉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계산하는  모습을 
어느정도 제거한 수정 공리주의를 내세웁니다

벤담은 쾌락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쾌락보다 저 쾌락이 더 좋다고 하지 않았죠.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에도 고급쾌락이 있고 저급쾌락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벤담은  A라는 사람이  마돈나를 좋아하고 B라는 사람이 세익스피어를 좋아하던 그건 취향의 문제이지 높고 낮음은 없고
단지 얼마나 그 쾌락이 지속되느냐의 양적인 부분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양적인 쾌락만 구분한 모습은 일견 공감이 많이 갑니다.

우리는 영구 없다~~ 라고 하는 '라스트 갓 파더'를 보고  그런 저급한 영화를 보고 좋아한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이해 못한다고 예술영화를 손가락질 하고  그걸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허세라고 욕을 합니다.
둘다 못난 모습입니다. 내가 어떤것을 좋아하건 말건 그건 개인의 취향이죠.   내가 어떤 드라마를 보건 말건 그건 내 마음이고
그걸 보고 재미 없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같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   '넌 왜 재미없게 봤냐' 며 손가락질 하는 것 만큼 
저급한것도 없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가장 듣기 짜증나는 댓글이 그런것들 입니다.
내가 재미없게 봤다고 개인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걸 왜 넌 재미없게 봤냐며 '미친거 아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죠
작년에 배용준을 비판했더니  그걸 배용준 팬 카페 분들이  제 글을 퍼다 날라서는  한 200여명이 줄서서 댓글을 달더군요

아니 내가 배용준이 책에 허새를 떤것 같다고 느꼈기에 느낌을 적었는데 내 느낌을 무조건 비판하는 모습은 정말 짜증나더군요.
내가 어떻게 느끼건 말건 어떤 것을 좋아하건 안하건이  욕먹을 일인가요?

물론 기분은 좋지 않겠죠
영화를 같이 봤는데  난 참 깨알같은 재미에 폭 빠졌는데 친구는 X씹은 표정으로  재미없다고 하면 기분이 확 상하겠죠
그런데요. 서로 살아온 생이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면 그게 더 자연스러운 것 입니다.  이런 기분상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트위터로 페이스북에서 인맥 구축할려고 하는것 아닌가요?

어떤 트위터분은  저에게 맨션을 보냈는데  맞좀~~~ 해달라고 하더군요. 
맞좀??  맞좀이 뭔가 한참 생각하다가 맞팔좀 해달라고 하는 글이더군요.  까짓거 해주었습니다. 1만명의 팔로워에 1이란 숫자가 더 추가되는게 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탁하는데  들어주었습니다.

글이 좀 샜나요. 하여튼  쾌락의 높 낮이가 없고 지속시간만이 다를 뿐이라는  주장을 제러미 벤담이 했습니다.
그런데요. 모든 쾌락에 정말 높낮이가 없을까요?



기독교인들이 사자밥이 되는 일은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보면 큰 문제가 없죠
절대 다수의 쾌락이 소수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본권과 충돌하기에 현대사회에서는 금지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투견대회나 닭싸움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동물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어떤 쾌락은 남을 괴롭히면서  얻는 쾌락이 있죠.  예를 들어 여학생이 하지말라고 하는데 짖굳은 남학생이 계속 괴롭히는 쾌락이 과연 좋은 쾌락일까요?

이런 쾌락의 높고 낮음을 구분하고자 한 즉  쾌락의 질을 구분하고자 한 사람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샌델 교수는  3개의 동영상을 틀어주었습니다. 하나는  세익스피어의 햄릿, 피어팩터라는 고통을 가장 오래 참는 사람에게 큰상을 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그리고 심슨가족입니다

강의실은 심슨이 나오자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3개의 동영상중 가장 재미있던것은?
1위 심슨, 2위 햄릿, 3위는 피어팩터였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질적으로 가장 좋은 동영상은?
1위 햄릿

재미있죠? 왜 이런 차이가 나올까요?  
대부분이 사람은 위의 조사결과에 공감할것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화책이 햄릿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가치있는 책은? 이라고 물으면 햄릿이라고 하죠

저는 위 질문 두개 모두에 심슨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심슨가족이 질적으로  뛰어나지 못한 만화영화가 아니기 때문이죠.  둘리였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심슨을 올곧이 이해할려면
수많은 문화코드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미국 문화를 많이 알아야 그 진가를 다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  햄릿보다 심슨이 더 질적으로 높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 별로없죠

햄릿이  질 떨어진다고?  그럴리가 있나? 하는 사람들중 햄릿을 안 읽어 본 사람, 읽었어도 뭔 소리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남들이 햄릿이 수준높데,  햄릿 많이 좋다고 하던데 어른들도 그렇고 선생님도 햄릿이 좋다고 했어~~ 라고  귀 얇은 사람들이 많을것 입니다. 직적 햄릿을 읽어 본 사람들이 햄릿이 질적으로 심슨가족 보다 높다고 하면 저도 할말이 없죠. 

다른 것을 예를 들어 보죠
집에 단 하나의 그림만 걸수 있고 한번 건 그림은  평생 봐야 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두 개의 그림을 줍니다. 하나는 둘리가 그려진 그림, 하나는 램브란트의 야경
여러분이라면 어떤것을 고르실것인가요?

저는 램브란트를 선택할것 입니다. 그 이유는  램브란트의 야경에는 둘리에 없는 은은한 쾌락이 있습니다
둘리가 순간 쾌락면에서는 최고죠.  그러나 그 쾌락의 지속성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한달가면 오래가는것이죠
하지만 램브란트의 야경은 다릅니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끌리는 그림입니다.

거기에 그림을 공부하면 그 느낌은 더 커지죠.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에서 질의 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의 쾌락을 다른 쾌락보다 더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가능한 답은 하나밖에 없다. 즉 어떤 두 가지 쾌락을 경험한 사람이, 그 후에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서, 주저없이 하나의 쾌락을 선택한다면, 바로 그것이 명백히 더 높은 쾌락이다.

라는 말을 통해서  쾌락의 높고 낮음을 말했습니다.  경박단소한 정보를 통해 급 흥분하는 쾌락은 급하게 사라집니다.
우리 주변에 급하게 흥분하게 해주는 쾌락도구 얼마나 많습니까.  대부분의 쾌락은  어떤 고통을 동반하지만  요즘은 무고통의 간편한 쾌락이 넘치고 넘칩니다.  

저도 보통때는 저급쾌락을 즐겨 찾습니다. 목마르면 물 마시기 보다는 냉장고있는 몸에 안좋다는 탄산음료 벌컥 벌컥마시죠
또한 건강에 좋지 않다는 술 담배를 찾죠.  이런 단순하고 저급한 쾌락에 탐닉하면 몸이 축나기도 하지만 지루합니다.
제가 일전에도 말했듯  요즘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질려 버리고  짜증나고 했던것이  급하게 쾌락을  주고 사라지는   예능프로그램의  존재방식에 짜증을 냈나 봅니다

강의에서 한 학생이 그렇게 말하더군요
분명 심슨가족이 더 웃기기는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쉽게 쾌락을 주지 못하죠. 하지만  햄릿을 느낄려면 일정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하고  책을 다 읽어야 하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햄릿이 주는 쾌락은 더 깊고 넓고 오래갑니다

맞습니다. 어렸을 때 읽은 명작이나  클래식 예술 영화가 저에게 더 큰 감동을 주고 그 쾌락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80년대의 히트작 '백 투 더 퓨처'의 쾌락은  이미 빛이 바래졌습니다. 
하지만  80년대 본 영화 '미션'의 감동은 오히려 세월의 더깨가 묻어서  감동이 증폭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왜 나는 것 일까요?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스러운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제러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 즉 쾌락의 높 낮음이 있다고 하는 것중 어떤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는 없습니다.  둘 다 공감가는 주장이고 세상사에 딱 뜰어맞는 철학도 아니고 둘다 결함이 있는 철학이기도 합니다.


긴 이야기를 했네요
서두에 말한 '카페 느와르'같은 예술영화를 말해보죠

먼저 예술 영화를 보는 행위는 허세가 아닙니다.
그건 개인의 취향입니다. 또한 아무나 도전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고요.  여기서 아무나는 뭐 대학원 이상 나와야 한다는게 아닌
적어도 영화를 이해할 정도의 교양을 갖추고 있어야 이해가 되고 그 안의 알레고리나 메타포와  오마쥬등을 느낄 수 있죠
아무런 정보도 없고 영화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카페 느와르'를 보면 3시간은 고통의 시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보고 싶다면  그런 고급쾌락을 느끼고 싶다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걸  손가락질 하고 허세라느니 내가 이해 못하는것은  감독이 잘못이라느니 하는 손가락질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대중성이 없는 영화라고 비판하는것은 철저히 경제적 논리에서 보는 비판일 뿐 입니다. 
감독이 대중영화를 만들고 많은 관객을 위해서 만든 영화가 대중성이 없다면 비판할 수 있지만 예술영화보고 대중성이 없다고 
비판하면 안될이리고 코메디이죠. 예술영화를 보는 소비자도 대중이긴 하죠. 다만 소수일 뿐이죠

그렇다고 '라스트 갓 파더'가  저질 영화고  '카페 느와르'가 고질 영화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각자 목적에 맞게 만든 영화이고  그 취향을 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주장은 제런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적인 말이죠
하지만  '카페 느와르'가  좀 더 깊고 오래가는 쾌락을 줄 수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 말이구요

따라서 두개의 공리주의가 서로의 결함을 벌충해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제 강의를 보면서 왜 요즘 사람들은 '타인의 취향'에  온몸을 떨면서 화를 내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취향이 소수의 취향이 되어서 희생당할까봐요?  다수의 테두리라는 보호막의 달콤함 안에 있고 싶어서요?


그런 실험이 있었죠
한 방에서 5명의 사람이 설문조사를 받고 있는데  앞문을 통해 연기가 계속 들어 왔습니다.
한 사람이 그걸 발견했고 주변을 둘러보니 4명은  그냥 그 연기를 보던 말던 계속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방은 곧 연기로 가득 찼지만 누구하나 그 것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방안에 연기가 가득차 앞이 안보일 때 한 사람이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4명은 연기자였습니다.  일부러 모른척 했던 것이죠.  이렇게 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진실마져도 왜곡해 버리는게 사람심리죠
특히 한국같이  다수의 힘을 믿는 공리주의 사회에서는  다수에 속하지 않으면 무척 불안해 하죠

자신이 속한 그룹이 다수라고 알려지면 그 때 부터 소수를 팹니다. 
동성애자같은 소수자들은 한국에서 몰매를 맞죠.

이런일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긴 합니다.  다만 관대함이 없는 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때로는 배타적인 모습으로 돌변하고 이방인을 공격합니다.  러시아의 극렬 민족주의자들인 스킨헤드와 우리사회가 근본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봅니다.
물론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요.


이 긴글을 다 읽는 분 별로 없겠죠. 그래도  읽은 분중에 자그마한 쾌락이라도 느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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