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는 깊은 공감대를 만듭니다. 단 5분 만에 너무나도 크게 공감해서 네 생각 전체가 동기화되었습니다. 인천의 재개발 지역에서 사는 계나(고아성 분)홍대를 졸업하고 언론 고시를 통과하기 위해서 공부 중인 남자 친구 뒷바라지를 하면서 오늘도 무려 2시간 넘는 출근 시간을 버티고 견디면서 강남의 한 회사에 출근합니다. 그렇게 녹초가 된 몸으로 출근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에 눈물이 핑 돕니다~~~
지옥 같았습니다. 뭐 다른 나라도 그렇다고 하지만 출근길 지옥철을 몇 번 경험하고 나면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자주 많이 듭니다. 그런 생활을 몇 년 하다 보면 사람의 영혼이 털리고 번아웃 증상이 생깁니다. 주말에는 시체처럼 잠만 자고 평일에는 일만 하던 그 지옥 같은 생활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습니다.
추위를 못 견디는 펭귄 계나가 한국을 떠나는 이유 한국이 싫어서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통근 시간만 하루 4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강남에서 자취를 하면 되지만 월세 아끼려고 그 긴 시간을 버팁니다. 그렇게 번 돈을 부모님은 재개발 이후 지어지는 아파트 평수 늘리는데 보태달라고 말하죠.
계나는 동물의 왕국에서 항상 맹수들에게 잡아 먹히는 '톰슨가젤' 같다고 느낍니다. 정글 같은 약육강식과 경쟁이 기본 룰인 한국에서 사는 것이 너무 버겁습니다. 특히 추위를 많이 타서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고 싶어 하죠. 남자 친구는 드디어 기자가 되었지만 남자 친구 부모님들은 계나의 집안 사정을 듣고는 특별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계가를 더 위축 들고 자격지심을 갖게 만듭니다.
계나는 떠납니다. 하고 싶은 것 하라는 말에 짐을 싸서 뉴질랜드로 향합니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중략) 내가 여기서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장강명 소설 원작의 영화 <한국이 싫어서> 소설보다 10배는 더 재미있게 보다
2023.09.22 - [문화의 향기/책서평] -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그냥 호주 어학연수생 이야기를 짜깁기 한 책
<한국이 싫어서>가 부산 국제 영화제에 상영된다는 말에 근처 도서관에 가서 읽어봤습니다. 장강명 소설가는 보수 언론 기자 출신의 소설가입니다. 이 장강명 소설로 유명한 것이 <댓글부대>입니다. 저는 <현수동 빵집 삼국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장강면 소설가의 장점은 기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현실을 약간만 다듬은 너무나도 실제 같은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성에 있습니다. 발품을 팔아서 취재한 내용을 윤색해서 소설로 만드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는 싫었습니다. 그냥 뉴질랜드 등에서 어학연수나 살았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짜집기한 수준이라고 할까요? 너무 재미가 없어서 후딱 읽고 덮었던 기억이 납니다. 1년도 안 된 책이지만 거의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영화는 다릅니다. 시각의 힘을 잔뜩 싫어서 소설에서는 잘 그려지지 않던 이미지가 바로바로 와닿습니다. 이게 영화의 힘인가 봅니다.
계나의 힘든 삶 또는 우리 주변의 흔한 직장인의 이미지를 초반 몇 장면으로 나를 빨아들입니다. 감독이 누군가 봤습니다.
장건재 감독이네요. 1977년 생으로 나이가 꽤 있는 감독입니다. 필모를 보다가 탄식이 나오네요. 이 감독님이 2015년 <한 여름의 판타지아>를 만든 감독이었군요. 어쩐지. 꽤 만듦새가 좋고 이음새도 좋아서 뭐지 이 매끄러운 연출은?이라고 했네요.
영화는 교차 편집을 통해서 한국에서의 삶과 뉴질랜드의 삶을 교차로 보여줍니다. 시간 순서도 현재와 과거가 혼재합니다. 그럼에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 뉴질랜드에서 회상하는 과거 한국의 장면이 나오고 한국 장면에서 다시 뉴질랜드로 전환되는 것이 매끄러워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계나 대학 친구인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겨울에서 슬리퍼를 신고 있던 친구를 만나면서 계나가 밥 한 번 쏘겠다는 말을 영화 초반에 보여주고 이 친구가 만나서 햄버거를 먹던 가게를 보여주는 장면과 이후 지쳐 있는 계나가 햄버거 가게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장면의 전환은 한순간에 눈물이 핑 돌게 하네요.
죽은 원작도 살리는 재주가 있는 재주꾼입니다. 그렇다고 원작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크게 와닿지가 않더라고요. 그러나 고아성과 뉴질랜드에서 만난 재인을 연기한 주종혁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홀려서 봤네요. 여기에 계나 부모님이나 김지영 배우 남자친구 지명을 연기한 김우겸 배우 등등 너무나도 현실적인 캐릭터를 잘 연기해서 몰입하면서 봤네요.
한국이 싫은 사람에게 좋은 한국이 싫어서
누군가 한국이 싫으냐고 물어보면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 한국이 싫습니다. 다만 떠나고 싶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비되어서 몸만 오면 되는 수준이라면 떠나고 싶습니다"
전 계나와 같은 이유로 한국이 싫습니다. 회사에서는 편법이 난무하고 흙수저로 태어나면 한국에서 살아가기 퍽퍽하죠.
그럼에도 한국을 떠날 정도는 아닙니다. 제가 한국이 싫은 이유는 단 하나. 모든 것을 경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협력, 협동 이런 거 없이 쟤를 제쳐야 네가 이긴 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노력을 통해서 경쟁에서 승리하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대입 제도죠. 학교 공부는 대학 입학 판별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죠. 공부의 재미를 알려주는 것이 아닌 대학교 줄 세우기 도구로 전락한 나라가 한국입니다.
계나도 말했지만 자살률 OECD 1위라는 불명예를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출생률만 신경 쓰지 왜 사람들이 자살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나라에 안 태어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기에 결혼을 해도 애를 낳지 않고 결혼 자체도 요즘은 남녀 혐오 갈등으로 잘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인도네시아 갑부 출신 유학생의 입에서도 나오지만 한국은 엄연한 계급 사회입니다. 흙수저, 금수저 구분을 합니다. 여기에 남들도 구분질을 잘 하죠. 뉴질랜드 같은 백인을 가장 상위, 그다음이 자신들인 일본인, 한국인이 있고 그 밑에 중국인과 동남아시아인을 깔아 놓는다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정확한 지적을 합니다.
이걸 통틀어서 한국이 싫은 이유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불공평입니다.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봉건주의 습속이 참 많습니다. 계나가 뉴질랜드에 처음 갔을 때 들은 말이 여기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저는 너무 좋더라고요.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는 공평하게 출발하고 노력한 만큼 올라간다는 소리로 들렸으니까요. 뉴질랜드에서는 영어 잘하는 아시아인, 못하는 아시아인으로만 가르는데 한국은 편가라는데는 도가 텄죠.
계나는 다양한 친구와 남자 친구를 만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캐릭터는 재인입니다. 어학반에서 같이 만난 재인은 껄렁껄렁한 한량 같았지만 너무나도 참하고 착실한 청년이었고 이 재인의 되바라짐에 탐복을 하게 되네요. 계나가 재인과 결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뉴질랜드 vs 한국의 삶
그래서 뉴질랜드가 천국이고 한국은 헬조선이라는 소리냐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선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한국인이고 여길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나 한국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떠나면 다 해결이 되나? 그런데 대부분 그렇지 않나. 떠나면 거기도 지옥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죠.
실제로 해외의 삶은 너무 지루한 천국이고 한국은 다이나믹한 지옥이라고요. 이런 2분 법적인 시선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영화에서 뉴질랜드에 잘 정착한 한 가정의 가장은 수시로 지진 못 느꼈냐면서 지진 노이로제에 결렸습니다. 밤에 할 게 없다고 투정이나 부립니다. 이런 분들은 뉴질랜드와 어울리지 않죠. 문제는 영화 후반에 뉴질랜드 지진 소식과 한인 일가족 자살 사건을 담은 것은 기계적 평형을 맞추기 위해서 뉴질랜드가 살기 퍽퍽해라고 일부러 넣은 장치인 듯합니다. 이게 너무 눈에 거슬리더라고요. 기계적 평균의 도구잖아요.
뉴질랜드의 삶이 어울리는 톰슨 가젤 같은 계나에게 어울리고 시끌 복잡해도 재미가 넘치는 한국이 좋은 사람도 있겠죠. 취향, 성향, 성격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뉴질랜드의 파티 장면과 함께 한국에서의 파티 장면도 넣는 듯 최대한 양쪽의 좋은 점을 많이 담으려고 하네요. 이 와중에 계나는 흔들립니다.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추위를 많이 타는 펭귄 파블로의 선택
남극에서 태어난 펭귄이 추위를 타면 안 됩니다. 그럼 살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의 지옥 같은 생태계, 약육강식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추위를 많이 타는 펭귄 파블로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납니다. 계나도 떠납니다. 계나는 추위를 많이 타서 뉴질랜드로 향했지만 계나가 떠난 이유는 추위가 아닙니다. 한국이라는 추위만 가득한 시스템이 싫어서 떠난 것입니다.
긴 통근 시간, 차별이 가득하고 흙수저, 금수저로 가르는 계급사회. 소설은 2015년에 나왔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은 계나가 뉴질랜드로 떠난 10년 후에도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들 이 극심한 경쟁 시스템에 죽어가고 있지만 누구도 개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오오오력이라고 꼰대들이 노력을 외칠 때 조롱하던 10년 전 20대이자 현 30대들이 세상을 바꿀까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그냥 이 방향대로 갈 듯 합니다. 세계 최고의 천민자본주의의 나라. 경쟁만이 유일한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하는 생각이 더 심해지겠죠. 그래서 계나의 마지막 선택을 전 응원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선택할 수 있다면 전 한국을 절대 선택 안 할 겁니다. 한국의 지옥 같은 사회 시스템과 함께 날씨도 갈수록 싫어지네요. 좀 지루할 수 있지만 계나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절박하게 공감이 되다 보니 꽤 몰입하면서 봤네요. 다만 단점도 있는데 어떤 큰 서사가 있는 것이 아닌 원작도 그렇지만 여러 가지 외국 유학 생활을 짜깁기 하다 보니 어떤 강렬하고 흡입하게 하는 힘은 좀 약합니다. 공감대는 높으나 재미까지는 좀 갸우뚱하게 되네요.
그럼에도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힘은 참 좋은 영화였습니다. 추천합니다. 계나 남친 부모와 상견례를 한 후 계나와 아버지가 식탁에서 막걸리 한잔하는 장면이 영 잊혀지지가 않네요
별점 : ★ ★ ★ ★
40자 평 : 떠나보니 더 진하게 보이는 헬조선의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