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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슬픔의 삼각형은 빈부격차와 남녀평등을 섞은 블랙 코미디

by 썬도그 202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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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슬픔의 삼각형>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제가 극찬한 <헤어질 결심>을 제치고 대상을 받았을까 궁금했습니다. 게다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이미 2017년에 <더 스퀘어>라는 예술계를 조롱에 가깝게 비판한 영화로 이미 황금종려상을 받았는데 5년 만에 또 받았네요. 이러기 쉽지 않은데요. 

 박장대소하면서 보는 영화? 단 한 번도 웃지 않은 영화 <슬픔의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

<슬픔의 삼각형>은 어제 그리고 오늘 영상자료원 지하 시네마테크 1관에서 무료 상영합니다. 어제 평일 낮임에도 관객석 50% 이상 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이 <슬픔의 삼각형>은 기생충과 소재가 비슷하지만 좀 더 확장했습니다. 기본적인 소재는 계급 사회를 담고 있으면서 그 계급 사회를 전복시켜서 역지사지를 보여주는 블랙코미디입니다. 여기에 남녀평등이라는 요즘 가장 핫한 이슈까지 섞었습니다. 

블랙코미디 장르지만 전 단 한번도 웃지 않았습니다. 웃기지가 않더라고요. 그냥 비루한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 웃기지가 않았습니다. 다큐 보고 웃지 않듯이요. 그런데 옆에 앉아 있는 분은 초호화요트에서 펼쳐진 부자들의 만찬 장면부터 쉴 새 없이 웃더니 영화 끝날 때까지 깔깔거리면서 보시기에 이게 웃긴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슬픔은 세계공통어이지만 웃음은 그 나라의 문화와 환경에 큰 영향을 받기에 같은 장면에서 모두가 울지만 모두가 웃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누군가에게는 박장대소하는 코미디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회 비판 다큐멘터리로 다가올 수 밖에 없네요. 영화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참! 제목 슬픔의 삼각형은 영화 초반에 나오는데 우리가 슬플 때 미간을 찡그리게 되는데 눈썹과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깁니다. 이 주름이 삼각형 형태라서 슬픔의 삼각형이라고 합니다. 이 슬픔의 삼각형을 가진 패션모델인 주인공 칼을 보고 심사위원들이 보톡스를 맞아서 지워야 한다는 말이 초반에 나옵니다. 

패션계의 계급과 남녀 평등을 담다

슬픔의 삼각형

칼은 패션모델입니다. 이 패션모델 업계는 여자모델이 더 많은 돈을 버는 분야입니다.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외치지만 그건 이론이고 세상은 실전이고 실전에서 패션모델하면 여성이 더 가치 있고 수요가 높아서 여성 모델이 남성 모델보다 3배나 더 많이 법니다. 여자들이 패션에 더 신경 쓰고 패션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하니까요. 

슬픔의 삼각형

칼의 여자 친구는 칼보다 더 잘 나가는 야야입니다. 야야는 칼보다 더 많은 돈을 벌지만 자신이 사겠다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계산서를 보고서 계산을 하지 않고 칼에게 오늘 잘 먹었어 식으로 말합니다. 황당한 칼. 아니 자신이 계산해 달라는 식으로 말하는 야야에게 뚜껑이 열립니다. 그리고 다 말합니다. 네가 내기로 한 저녁이니 네가 내라고요. 물론 처음에는 정중하고 돌려서 말하지만 이에 화가 난 야야는 지급 정지된 신용카드 대신 현금까지 내려고 합니다. 

슬픔의 삼각형

이에 화가난 칼은 택시기사의 조언을 듣고 야야를 따라가서 꼬치꼬치 따집니다. 야야 니가 더 많이 벌고 저녁은 니가 내기로 했으면 니가 내야지 그걸 가지고 자신을 쫌생이 취급하는 것이 남녀평등이냐고 따지죠. 전형적인 밥값 가지고 싸우는 오래된 커플의 싸움이죠. 요즘은 덜한다고 하지만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성역할에 대한 비난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면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터치페이를 하기도 하지만 번갈아 가면서 내고요. 보다 공평한 행동은 돈을 더 많이 버는 야야가 더 많이 내는 것이지만 이건 논란의 여지도 있고 동의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보통 번갈아 내서 내면 됩니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총 3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1화 칼과 야야편에서는 남녀평등 문제를 통한 젠더 갈등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남녀 관계가 평등한 것 같지만 엄연히 갑과 을의 관계임을 보여주죠. 동시에 패션업계가 평등사회를 액세서리로 사용하지만 결코 평등하지 않은 강력한 계급사회임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예술계도 경험해 보면 고상한 것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학연, 지연 등등 인맥으로 끌고 밀고 학교에 대한 서열 등등이 있더라고요. 칼과 야야는 호텔에서 진실을 담은 대화를 통해 화해를 하고 호화요트에 탑승합니다. 

세상 갑부들이 가득한 호화 요트에서 펼쳐지는 진상극

슬픔의 삼각형

칼과 야야는 호화 요트에 무료 탑승을 합니다. 야야가 유명한 인플루언서라서 협찬을 받고 무료 탑승을 하고 조건으로 야야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됩니다. 야야는 갑부는 아니지만 그렇게 갑부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먹지도 않는 파스타를 들어 올리고 사진을 찍는 등 허세의 세상의 일조를 하는 야야 커플. 이 호화 요트에는 다양한 갑부들이 탔습니다. 수류탄을 만들어서 큰돈을 번 사람도 있고 러시아에서 비료 생산 독점 지위를 이용해서 이 호화 요트를 사고도 남을 정도로 돈을 번 러시아 갑부 커플도 있습니다. 

슬픔의 삼각형

어떻게 보면 야야 커플이 이 호화 요트에서 가장 가난한 커플입니다. 그중에서도 야야의 을이 된 칼은 자격지심이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웃통 까고 갑판에서 청소하는 남자를 보고 야야가 가볍게 한 인사를 가지고 불쾌해하더니 이걸 직원에게 말합니다. 놀랍게도 가볍게 한 지적으로 인해 그 청소하는 남자는 요트에서 퇴함조치 당합니다. 

슬픔의 삼각형

네 칼이 이 요트 승객 중에 가장 밑에 있지만 그 밑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승무원들 전체가 을입니다. 갑이 가볍게 던진 돌맹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었습니다. 칼은 이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미안하기도 하고요. 자신의 위치가 을이 아닌 갑일 수도 있구나를 깨닫습니다. 어떻게 보면 설국열차의 요트 버전 같기도 합니다. 

슬픔의 삼각형

진상은 한 둘이 아닙니다. 러시아 갑부 아내는 고생하는 승무원들을 위한다면서 갑자기 모두 수영복 입고 슬라이드를 타라고 아량을 배풀죠. 진상이죠. 자기 딴에는 여유를 베풀고 휴식을 주겠다는 마음이겠지만 상대방이 원치 않은 편의 제공이나 베풂은 베풂이 아니라 무례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 의견을 묻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승무원들은 NO를 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상하 관계라서 승객이 요구하면 YES만 해야 합니다. 

이걸 보면 우리 자본주의 세상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갑의 아무 생각 없는 베품으로 인해 NO를 할 수 없는 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세상의 모습을 요트 안에 욱여넣었습니다. 이게 영화 <슬픔의 삼각형>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전 기생충처럼 좀 더 은유적이고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이 우아해서 좋은데 <슬픔의 삼각형>은 그냥 직접 보여주고 대사로 담아 버립니다. 세련미는 좀 떨어집니다. 

슬픔의 삼각형

직설의 압권은 선장(우디 해럴슨 분)입니다. 선장은 자신의 본분을 잃고 선장실에 틀어 박혀서 술을 마시기만 합니다. 직무 유기죠. 이런 선장은 고발 조치 당해야 합니다만 절대 권위가 지배하는 요트 안에서 그런 선장을 누구도 경고하거나 제지하지 못합니다. 결국 이 술에 찌든 선장은 승무원 폴라의 요청을 무시하고 폭우가 치는 목요일에 선장 주최 만찬을 준비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선장이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전 이 자체가 좀 기이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흔들리는 배에서 수 많은 갑부들이 음식을 먹고 구토를 합니다. 여기서부터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지만 전 룰도 안 지키는 선장이 만든 진상극에 짜증만 나더군요. 구토하는 장면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나오고 나중엔 똥이 역류해서 변기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든 말든 선장은 미국인인지만 공산주의자이고 러시아인이지만 자본주의를 숭상하는 러시아 갑부와 대화를 통해서 갑부들을 선내 방송을 통해서 조롱합니다. 

너무나도 불편한 장면, 너무나도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고 세련되지 못해서 이 장면들을 보면서 <헤어질 결심>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수 없이 외쳤네요. 보통 이런 작품성 높은 영화들은 호불호가 잘 안 갈리는데 전 중간에 나갈까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해적이 등장하고 요트를 폭파시킵니다. 

을이 갑이 된다고 세상이 바뀔까? 

슬픔의 삼각형

3화에서는 요트가 파괴되고 구명정을 타고 탈출한 일부의 승무원과 승객이 이름 모를 곳의 해안가에 떠밀려 옵니다. 
보통 수천 억짜리 요트가 파괴되면 자동으로 위치 전송이 되고 구조 헬기가 뜨거나 구조대가 급파 되어야 하는데 영화는 그런 것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해적이 왜 요트를 폭파시키겠어요. 그냥 인질로 삼아도 돈 많이 받을 수 있는데요. 어려 모로 어설픈 상황 전개입니다. 다만 감독은 전복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급전개를 합니다. 

갑부와 승무원 2명이 섞인 피난민들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사냥도 할 줄 모르고 탈출하기 위한 노력도 딱히 안 합니다. 그러다 구명정이 하나 떠밀려오게 되고 그 안에 화장실 청소 승무원인 애비 게일이 타고 있었습니다. 애비 게일은 모든 것을 합니다. 문어를 잡아서 요리를 하는데 반을 자기가 가지고 가는 모습에 승무원 폴라가 왜 그러냐고 하니까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는데 자신이 선장이라고 합니다. 계급 전복이죠. 이에 황당해 하지만 갑부들과 다른 승무원들은 인정을 합니다. 캡틴이라고 말하자 애비 게일은 문어 한 조각을 던져줍니다. 

슬픔의 삼각형

3화를 보면서 이래서 이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구나 느낄 정도로 3화는 전복된 계급 사회를 잘 보여줍니다. 을이었던 애비 게일이 갑이 되고 모든 남자를 따르게 만듭니다. 부계 사회에서 단박에 모계 사회로 전환시킵니다. 그리고 몸을 파는 것이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닌 남자도 할 수 있음을 칼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유쾌한 전복입니다.  과자 하나에 몸을 파는 칼을 보면서 관객석은 웃음바다가 됩니다. 여기서는 저도 피식하고 좀 웃었지만 전 칼을 보고 웃은 것이 아닌 그런 칼을 보면서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말을 하는 야야가 웃겼습니다. 

애인과 과자 둘 중 하나 선택하라는데 과자를 선택하면서 애인에게 필요 이상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충고 이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욕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마치 유리병 속에 든 포도를 움켜 잡고 손을 빼지 못하는 원숭이처럼요. 그냥 손에 든 포도를 내려놓으면 유리병에서 손을 뺄 수 있는데요.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3화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상, 계급 사회, 물질과 권력 관계 및 남녀평등 등의 다양한 현존하는 현시적인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담백하고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담고 있네요. 이 3화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좋게 평가하기 어려웠을 텐데 3화가 진국이네요.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애비 게일을 통해서 을이 갑이 되면 더한 갑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많은 세상 을들이 갑질을 호소하지만 그런 을이 갑이 되면 다를 것 같죠? 아닙니다. 대부분은 똑같은 갑질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조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은 건 부자들도 악의가 없는 친절이지만 그게 을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불편함을 모르는 갑들이 많은데 이 불편함을 알려면 어려서부터 을로 사는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면 됩니다. 그래서 서로의 입장을 알고 서로 교류를 하다 보면 서로 공존할 수 있지만 어려서부터 철두철미하게 갑으로만 살았던 재벌 2세들이나 갑부 남편을 만나서 호위호식하면서 살면 을을 무시한 친절로 인해 을을 상처 입게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이런 영화들이 부자들의 각성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한국의 모 대기업 회장이 교도소에서 재벌 2세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인들이 재벌을 보는 시선을 그때 알았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자와 빈자가 공존해서 사는 세상을 만드려면 이런 각성제 같은 영화들이 많아졌으면 하네요. 

별점 : ★ ★ ★☆
40자 평 : 남녀평등, 자본주의 ,계급사회 등 현재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사회 문제를 몽땅 담은 블랙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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