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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by 썬도그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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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이 한 유튜브 채널에서 추천 영화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추천했습니다. 가끔 이 영화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알고 있어서 볼까 말까 했지만 뭔가 어두운 면이 있지 않을까 해서 쉽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장항준 감독이 추천하기에 약간의 노력과 함께 봤습니다. 마침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네요

놀라운 연출과 색감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여러모로 놀라운 영화입니다. 먼저 영화 스타일과 연출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즘 영화들은 너무 점잖고 안전빵 연출과 너무 전형적인 화면 구성과 연출이 많아서 뻔한 영화들이 많지만 이 영화는 다릅니다. 독특한 연출과 과한 채도 및 스토리가 엉켜서 이런 영화가 일본에서 나온 적이 있나? 할 정도로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영상이 가득합니다.

CG는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마츠코의 마음을 표현할 때는 디즈니 애니 풍으로 변하고 행복 로드를 걷는 모습 등등 마츠코의 마음을 그대로 영화에 옮겨 놓습니다. 특히 후반 검은 쓰레기봉투가 까마귀로 변하는 CG는 2023년 CG보다 더 뛰어나고 할 정도로 놀라운 CG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2007년 영화에서는 드론이 없었는데 마치 드론처럼 자유롭게 강변을 나는 영상은 어떻게 촬영했을까 하는 궁금증까지 느껴지게 하네요.  아마 모형 비행기에 카메라를 달고 촬영했거나 당시에 있었던 헬리캠으로 촬영한 듯 하지만 그럼에도 꽤 자연스럽게 잘 뽑아냈네요. 이외에도 영화가 상상의 장면과 뮤지컬 장면이 많은데 이 모든 것을 현란하면서도 힘 있게 담습니다. 

카메라 앵글도 과감합니다. 다소 애니 같은 앵글도 보여주지만 전경에 꽃을 배치하면서 영화가 다소 과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그 과함을 상쇄하는 카메라 앵글을 보여주네요. 여기에 이 영화는 꽤 많은 음악이 나와서 뮤지컬 장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데 뮤지컬은 아니지만 꽤 많은 노래들이 나옵니다. 몇몇 노래는 영화가 다 끝나고도 귓가에 맴돕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마츠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제목처럼 스토리가 다소 혐오스러울 수 있습니다. 보다가 이건 뭐야? 어쩌라는 거지?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소리인가? 숨 쉴 공간조차 주지 않고 주인공을 학대하는 느낌이 들어서 보다가 한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 나온 대사가 계속 떠오릅니다. 

"행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극소수, 슬픔 한숨을 짓거나 술독에 빠져 있거나 일찌감치 인생을 끝내거나"

이 대사는 처음에는 별 내용이 아닌 줄 알았지만 영화를 볼수록 이게 핵심 주제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츠코의 인생을 보다 보면 한숨이 나오고 왜 저런데라는 화가 나면서도 마츠코의 선택이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습니다. 이런 감정은 영화 중반부터 계속되다가 영화 마지만 장면에서 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또 모든 것이 이해되는 참 독특하고 놀라운 영화가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53세의 나이에 타살로 사망한 고모 마츠코를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은둔형 외톨이처럼 사는 조카가 아빠의 부탁으로 유류품을 회수하려고 갑니다. 아빠는 자신의 누나의 삶이 시시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조카는 고모가 살던 집에 갑니다. 집에 가보니 온통 쓰레기 천지이고 노숙자는 아니었지만 노숙자 같은 삶을 살다가 쓸쓸하게 죽은 고모의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장 강렬했던 건 벽에 칠해진 '태어나서 죄송합니다'입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적었을까요. 이 글을 보니 한 영화가 떠오릅니다. 아이유, 강동원, 송강호가 주연을 한 <브로커>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태어나줘서 고마워'입니다. 두 문장은 내용이 정 반대이지만 삶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한 문장입니다. 

태어나서 미안한 삶이 있고 고마운 삶이 있을까요? 분명 있을 겁니다. 다만 이걸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태어나서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하는 말이고 태어나줘서 고마워는 남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은 같은 삶이지만  내가 보는 삶과 남이 보는 삶이 다릅니다. 보통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하죠. 그러나 초식동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마츠코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이게 이 영화의 매력이자 호불호가 강한 이유입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마츠코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고 싶지만 아픈 동생이 아빠의 모든 사랑을 가져간 듯합니다. 항상 근엄한 표정의 아빠를 독차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코미디언의 웃기는 표정을 지을 때만 아빠가 웃습니다. 중학교 교사인 마츠코는 핸섬한 동료 교사의 데이트를 받을 정도로 행복한 일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아빠는 아픈 동생을 두고 무슨 데이트냐고 타박을 하죠. 이에 폭발한 마츠코는 집을 나갑니다. 여기에 학교에서 도난 사고가 났는데 모든 것을 마츠코가 뒤집어쓰고 해고까지 당한 상태입니다. 

이후 마츠코는 폭력을 휘두르는 시인을 만나는 등등 만나는 남자들마다 폭력적이거나 마츠코를 가지고 노는 천박하고 무례한 남자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마츠코가 좋은 남자를 만나고 고를 능력이 있었다면 그 팔자를 벗어날 수 있어서 마츠코의 이런 불행이 자업자득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편견을 깨기 위해서인지 이발소 남자 등을 넣어서 이게 선택의 문제가 아닌 운명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또한 비슷한 처지의 교도소에서 만난 동성 친구도 넣어서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확실히 합니다. 그럼에도 이해를 한다고 해도 살인까지 하는 등등의 행동에 마츠코에 대한 연민의 정은 크지 않습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하지만 마츠코가 자신이 삶의 목표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얼마나 살고 싶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츠코는 자신과 함께 살던 남자들이 배신을 하거나 자살을 할 때마다 자신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나 드라마 속 이야기이고 삶은 생각보다 깁니다. 그것도 너무 길어서 문제인 삶도 있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는 '삶은 생각 보다 길어'라는 대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중간중간 내 삶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만 죽어서도 안 되지만 죽지도 못합니다. 마츠코는 내 인생은 끝났다고 수 차례 말합니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고 사라지고 멸망되지 않습니다. 끝났다고 해도 삶은 또 이어집니다. 그렇게 새로운 남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다가 삶의 목표가 생깁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목표로 했는데 그 목표가 얼마나 쉽게 배반 당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그럼에도 마츠코는 계속 삶을 이어갑니다. 삶의 이유가 사랑이라서 또 다른 사랑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면서 마지막 사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츠코는 삶을 놓습니다. 

성공담만 추앙하는 세상에서 실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기승전 해피엔딩이라는 디즈니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합니다. 세상이 그렇지 않거든요.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성공하고 승리하고 행복을 쟁취한다는 식의 디즈니 영화의 목표는 돈입니다. 행복하고 너도 성공할 수 있어. 모두 행복하자고~라고 외치면 돈이 더 많이 벌리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행복 비즈니스의 최고봉이죠.

어디 이뿐일까요. 지금도 수 많은 강사들이 성공 비법, 행복 비법이라면서 자신의 성공담을 들려주면서 돈을 받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이 그런 성공담, 성공 비법을 돈 주고 삽니다. 그런데 그 성공은 그 사람의 성공이지 나의 성공으로 거의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어졌다면 모두가 성공했게요. 그냥 성공 팔이들이고 행복 팔이들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건 웃음과 성공과 행복이 아닌 나도 불행해! 나도 슬퍼! 라면서 공감해 주고 어깨 한쪽을 빌려주는 겁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가 존재하는 이유죠.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슬픔이 같은 영화입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실패한 삶을 위한 위로주같은 영화

이런 나도 살았어. 희망도 느끼고 다시 시작하려고도 했어. 그런데 운명이라는 것이 있더라고. 그렇지만 살았잖아. 살아갔잖아. 성공하는 삶이 추앙 받는 세상이라고 해도 불행한 사람이 훨씬 더 많고 한숨만 쉬는 사람이 더 많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라는 보기 드문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영화들이 거의 없습니다. 돈이 안 되는 이야기죠. 누가 실패한 삶, 우울증 걸릴 것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 결코 혐오스럽지 않고 인생 영화라고요. 만약 삶에 만족스럽지 않고 한숨만 가득하시다면 이 영화 추천합니다. 저도 한 때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으려고 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또 살아지게 되고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몇 개를 포기하고 대신 새로운 재미와 흥미를 찾고 나서는 강인한 영혼을 가지게 되었어요. 굳은살이 생기고 그때의 면역 때문인지 지금은 누구보다 즐겁게 살려고 합니다. 수시로 오던 우울도 기억도 안 나고요. 

만약 그 시절에 이 영화를 봤다면 좀 더 빨리 빠져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가 아닌 '이 영화가 태어나서 너무 감사합니다'가 맞는 말일 겁니다.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사람은 죄송할 일이 없어요. 정작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 안 하거든요. 마츠코의 삶은 파란만장하고 비록 살인까지 저지른 삶이고 결코 성공하지 못한 삶이지만 비슷한 삶을 따라가려던 조카가 고모의 삶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삶을 생각하는 모습이 이 영화의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누구나 꽃길을 걸을 수 없어요. 실패하고 넘어지고 피흘리고 쓰러지고 술독에 빠지고 강가에서 과거만 회상하면서 살 수도 있어요. 그런 삶이 외면하기에는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그런 모든 실패의 삶에 대한 위로주 같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라는 것도 성공의 반대말로 사용하는 것이지 실패와 성공은 제 3자가 내리는 정의이지 자신의 내리는 정의는 아니에요. 마츠코는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외면하는 기억하기도 싫어하는 삶일 수 있지만 조카의 삶을 변화시키는 나비가 되어서 다시 피어날 겁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좋아하나 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츠코가 만난 모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이고 장항준 감독이 왜 이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는지 알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 전까지는 별 감정 없이 보다가 마지막 합창 장면에서 저도 눈물이 핑 도네요. 모두가 꽃길만 걸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세상은 제로섬 게임이 아닌데 누가 잘되면 누구는 불행해지는 무한 경쟁이 미덕인 한국의 삶의 방정식인 제로섬 게임 강국 한국인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다시 느끼지만 한국과 일본 영화의 전성기는 2000년대가 아니었을까 하네요. 이런 놀라운 이야기와 연출과 연기는 자본주의가 집어삼킨 지금은 정말 보기 어려워졌네요. 

별점 : ★★★★
40자 평 : 실패해도 괜찮아 그것도 아름다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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