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넷플릭스 영화 순위 2위를 달리고 있는 일본 영화 <치히로 상>은 이렇게 높은 순위까지 오를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적으로 일본 드라마나 애니나 한국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하니까요. 또한 요즘 일본 영화 중에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는 대부분이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런데 2위? 호기심에 봤습니다. 한 번에 보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번 끊어서 볼 정도로 아주 큰 몰입감을 주는 영화는 아닙니다만 후반 1시간은 치히로의 서사가 펼쳐지면서 다 보았네요. 좋은 영화입니다.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일본판 드라마 아저씨라고 할까요?
좋은 사람을 만드려면 좋은 어른 1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사지 걸이었던 치히로 상의 바닷가 마을에 온기를 나누다
치히로 상(아리무라 카스미 분)은 마사지 업소에서 일을 했던 마사지 걸입니다. 퇴폐업소에서 근무해서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 것이 당연하지만 치히로는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벤또 가게에서 계산과 주문을 받는 알바를 하면서 바닷가 마을에 정착을 합니다.
치히로는 마음씨가 참 곱습니다. 동네 노숙자 할아버지에게 벤또를 주면서 식사를 대접함을 넘어서 자신의 집에서 목욕을 하라면서 목욕탕도 빌려주죠. 노숙자에게만 잘하는 건 압니다. 동네 고양이에게도 한부모 가정 아이인 마코토가 콤파스로 팔을 찔러도 혼내지 않고 오히려 벤또를 먹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이런 치히로를 훔쳐보는 여고생 쿠니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수근 거리건 말건 밝게 사는 치히로를 몰래 촬영하다가 치히로에게 들키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숨죽이듯 살아야 하는 쿠니코에게 있어 치히로는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동경하게 되죠.
그렇게 쿠니코는 치히로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됩니다. 여기에 엄마가 밤에 야간 업소에서 일을 하는 초등학생 마코토도 치히로를 따르게 됩니다. 치히로는 항상 밝고 맑습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치히로. 여기까지 보면 그냥 흔한 명량 드라마인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보다 말았습니다. 이야기가 좀 뻔하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다시 찾게 만드는 건 배우 아리무라 카스미의 힘입니다. 참 매력적인 배우입니다. 맑고 밝은 모습을 잘 보여주는 배우입니다. 치히로는 그렇게 바닷가 마을에서 잘 정착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야간 업소에서 근무할 때 알았던 바질 언니가 찾아옵니다. 그렇게 과거를 잊고 사는 듯한 치히로와 와인을 마시면서 옛이야기를 합니다.
치히로는 노숙자 할아버지가 객사를 하자 할아버지를 산에 묻어줍니다.죽은 갈매기도 묻어줍니다. 온기가 가득한 치히로. 정체 모를 할머니 병실에도 찾아가서 병간호까지 합니다. 이런 치히로의 온기 이면에는 고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반의 지루함을 지우고 치히로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가족에 상처 받은 사람들을 품는 치히로
일본 월간 만화잡지 '엘레강스 이브'에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연재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치히로 상>은 마음속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치히로라는 치료의 스펀지가 아픔의 독을 훔쳐내고 있습니다. 치히로 주변의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가족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영화에서 가족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죠. 디즈니 영화처럼 그럼에도 가족이 최고다 식으로 그리는데 실제로는 가족이 행복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고통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가족만큼 큰 고통을 주는 존재들도 없죠.
여고생 쿠니코도 싱글맘 아래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마코토도 아버지를 때리고 도망쳤다는 타니구치라는 청년도 다 가족에게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오해도 받습니다. 마코토 엄마가 쫓아와서는 애 밥 굶기는 엄마 취급 하지 말라면서 마음대로 호의를 베풀지 말라고 다그치기도 하죠. 치히로는 그런 것도 다 받아줍니다. 정식으로 사과를 합니다.
그리고 치히로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엄마가 죽었는데 장례식에 올것이냐고 묻습니다. 치히로는 무미건조한 말로 안 간다고 했습니다. 치히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후반은 전반의 다소 노곤노곤하고 지루함을 달래면서 큰 울림을 줍니다. 치히로는 엄마가 죽었는데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냉정한 태도의 이유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치히로라는 이름이 진짜 이름이 아닌 전에 알던 한 어른의 이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이 영화 <치히로 상>이 주는 큰 온기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드려면 좋은 어른이 1명 이상 있어야 한다
최근 한 20대 엄마가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서 잠시 아이를 혼자 두고 성매매를 하러 갔다가 아이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너무나도 가슴 아픈 뉴스라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네요. 먼저 이 사건의 이면을 보면 아이가 혼자 있으면 안 되기에 주변 복지센터나 주민센터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말하고 잠시 아기를 맡길 공간을 찾아야 합니다. 없으면 상담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20대 미혼모 엄마는 해결을 못했습니다. 아마 이 미혼모가 주변에 친구나 가족이 있었다면 가슴 아픈 일이 없었을 겁니다. 친구가 있었다면 잠시 맡아줄 수도 있고 아니면 해결책을 마련하려고 했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딸이 미워도 자식 아닙니까? 부모님들이 도와주셨어야죠. 그 어린 나이에 아이 혼자 키우기 위해서 성매매까지 하는 극한 상황까지 가지 않게 막았어야 합니다. 판사는 사회도 책임이 크다면서 집행유예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뉴스 댓글에 또 무너졌습니다. 악플이란 악플은 다 달리더라고요. 뭐 악플이 세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각박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참 많아요. 그 20대 미혼모 옆에 좋은 어른 1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저 자랄 때도 가장 필요했던 것은 좋은 선생님, 좋은 참고서, 좋은 학원이 아니었습니다. 내 고민을 들어주고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했습니다. 부모님은 내 세대의 사고방식과 달라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1명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무척 외로웠어요. 그런데 그 고독과 외로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아이의 좋은 어른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치히로가 그랬습니다. 책에 있는 김밥이 너무 맛있게 보여서 김밥을 만들었는데 엄마가 쓸데 없는 짓을 했다고 혼을 냈습니다.
그 못생긴 김밥을 맛있다고 칭찬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평생 잊지 못하는 치히로. 치히로는 가슴이 뻥 뚫린 채 살고 있었습니다. 남자와 잠자리를 해도 사랑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치히로가 주변 사람에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정착하지 못한 홀씨 같은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책임질 것이 없으면 오히려 사람이 더 따뜻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치히로가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준 것은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함도 있어 보이네요. 치히로는 그런 말을 합니다. 어떤 남자가 한 말이라면서 우리는 각기 다른 행성에서 지구로 온 외계인이라고 그래서 서로 공감하기 쉽지 않다고요. 자신과 같은 행성에서 온 사람을 1명 만나본 치히로는 그 온기를 홀로 지내는 여고생과 초등학생에게 나눠줍니다.
이게 바로 내리 사랑이 아닐까 해요. 우리는 가족 안에서만 내리사랑을 말하지만 점점 가족이 해체되고 소형화되면서 가족보다는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 같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친구도 그중 한 명이죠. 특히 좋은 어른을 만난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행운입니다. 검사 출신 못난 아버지가 학폭 아들을 행정소송까지 가는 그런 못난 사랑 말고 자전거 보조바퀴처럼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가게 해주는 지지대 역할을 해주는 어른을 어린 시절 만난다면 그보다 큰 삶의 행운이 있을까요? 대부분은 이 역할을 부모들이 하지만 부모가 삶의 가해자가 되는 가정들이 문제입니다.
치히로는 뻥 뚫린 가슴을 안고 같은 행성에서 온 두번 째 사람을 만납니다.
인간은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화 <치히로 상>은 마지막 엔딩 장면도 꽤 좋습니다. 뻔한 결말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치히로가 뿌린 온기라는 씨가 발아되어서 또 다른 고립된 삶을 사는 아이가 기대서 울 수 있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오랜만에 좋은 일본 영화를 봤네요. 추천합니다. 보고 나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욕망이 불끈 쏫아 날 겁니다.
별점 : ★★★☆
40자 평 : 어린 시절 울고 있는 내 손을 잡아준 그 이름 치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