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은 가라! 얘들은 가! 어리다고 못 보는 영화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경마장 가는 길>입니다. 1991년 12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길거리 게시판마다 붙어 있었지만 미성년인 저는 그냥 포스터만 봤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중 한 명인 구본창 사진작가가 촬영한 이 <경마장 가는 길> 영화 포스터는 별 정보가 없지만 몰래 본 친구들의 전언으로 이 영화가 그렇게 야하다는 말이 참 많습니다. 아니 경마장 가는 길에 모텔이 그렇게 많은가?라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 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본 사람들 대부분이 재미없다고 적극적으로 말리던 영화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영화평론가들이나 영상자료원에서 출간한 한국영화 100선에 이 영화가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이 이 영화를 이토록 한국영화 100선에 오르게 했을까요? 마침 네이버TV에 경마장 가는 길을 무료로 볼 수 있기에 봤습니다.
한국 영화 사상 최악의 남자 캐릭터 R이 만드는 3류 불륜 드라마
보다가 너무 열이 받아서 모니터 속의 문성근의 뒤통수나 두 R을 힘차게 걷어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 있으면 어찌나 찌질하고 위선적이고 토악질 나는 행동들의 연속인지 역겨움까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도만 다르지 우리도 문성근이 연기하는 R과 크게 다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R도 R이지만 강수연이 연기하는 J도 참 짜증 나는 캐릭터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오랜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문학박사인 R(문성근 분)은 공항에 마중나온 J(강수연 분)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불륜 관계입니다. R는 자신의 고향인 대구에 두 눈 멀쩡히 뜨고 두 아이까지 낳은 R의 아내(김보연 분)가 있음에도 대구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프랑스 유학시절 만난 J와 서울에서 노닥거립니다.
J는 프랑스에서 R을 만나서 3년 가까이 동거를 했습니다. J는 R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R이 써준 박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이게 J가 R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떠나지 못합니다.
R은 문학 박사지만 돈은 많지 않습니다. 컴퓨터도 자동차도 여관비도 모두 J가 냅니다. J는 중소기업 사장의 딸이라서 돈이 넉넉합니다. 그렇다고 씀씀이가 헤픈 여자나 오렌지족은 아닙니다. R이 이깟 돈이라면서 돈을 찢어발기자 그 찢어진 돈을 다 줍습니다.
R은 프랑스에 있으면서 J의 몸이 그리웠다면서 J를 품으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J가 자꾸 피합니다. R은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에서 3년 가까이 동거를 했던 사이인데 이상하게 서울에서 피합니다. 이렇게 자꾸 피하기만 하자 R은 투정을 부리고 화를 내는 등 신경질을 내지만 그럼에도 한사코 J는 R과의 잠자리를 피합니다.
이유를 계속 캐묻자 J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에 쿨하게 떠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자 J는 또 R을 잡습니다. J는 하소연을 합니다. 아내랑 이혼을 해야 자신과 살 수 있지 않냐면서 항의를 합니다. 그렇다고 이혼한다고 해서 자신과 결혼한다는 약속도 안 한 R. R과 J는 티격태격을 하다가 결국 J가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합니다.
이에 쿨하게 보내주는 듯한 R은 갑자기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면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 및 계간지에 실은 글이 자신의 글이라고 폭로하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그리고 박사 학위 대필을 대가로 3천만 원을 요구합니다. 보다 보면 저런 쓰레기 인간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형적인 홍상수 감독 영화 속 위선적인 먹물들의 느낌과 일맥상통합니다.
다른 점은 홍상수 영화에 나왔던 교수 및 전문 직업인 남자들을 모두 뭉쳐야 <경마장 가는 길>의 R과 비슷할 정도로 R은 한국 영화 사상 최악의 빌런입니다. 대구의 부모들이 힘들게 대학을 보내주고 박사까지 됐고 프랑스까지 갔다 왔으면 돈을 벌어서 효도를 해야 할 생각은 안 하고 아들과 딸이 어떻게 크는지 관심도 없고 아이들 앞에서 아내에게 이혼하자는 말만 합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캐릭터가 1명도 아닌 남자, 여자 주인공 2명이 2시간도 넘게 짜증 나게 합니다.
이 영화는 스토리 자체는 별거 없습니다. 불륜남녀가 밀땅을 하는 저질 3류 연애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인 <경마장>을 쓰고 시나리오에도 관여한 하일지 소설가가 최근에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것을 보면 영화 따라 간다는 생각도 잠시 했네요.
<경마장 가는 길>이 주목 받은 이유는 오로지 새로운 형식 때문
영화 제작사의 대표가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을 읽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읽다 말았다고 할 정도로 영화 스토리 자체나 이야기는 건질 것이 없습니다. 바람난 박사라는 인간이 돈 많은 제자 같은 여자 꼬셔서 놈팡이처럼 지내는 모습일 뿐이죠.
이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은 이전의 한국 영화들과 그 형식이 많이 다릅니다. 먼저 스토리 구조입니다. 이전 한국 영화들이나 지금도 대부분의 영화들은 기승전결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인공을 소개하고 캐릭터를 구축한 후에 사건을 만나서 주인공이 변화를 하거나 그 사건을 해결하거나 고통받거나 하면서 성장을 하면서 끝나거나 사건을 해결하면서 끝이 나야 깔끔하죠.
그러나 <경마장 가는 길>은 이게 없습니다. 별 설명도 없이 J와 R JR 같은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그래서 J와 R인가? 그런데 이 두 남녀가 헤어지자, 만나자, 만나자, 헤어지자의 티키타카를 2시간 넘게 하다 끝납니다. 축구로 치면 킥 오프하고 공을 차서 슛을 차서 골대를 넘어가던 골대 안으로 들어가던 골대를 맞던 뭔가 시원하게 터트려야 하는데 2시간 내내 내 진영에서 패스 돌리기만 하다 끝납니다.
이런 식으로 구성한 영화가 <경마장 가는 길>이 처음입니다. 그렇다고 티키타카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패스를 주고 받을 때 똑같은 패스를 주고받지 않죠. 반복하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 '반복과 차이'를 잘 다루는 감독이 홍상수입니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보면 모든 영화가 똑같으면서도 또 다릅니다. 그 다름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봅니다.
이렇게 반복과 차이는 우리의 일상과 비슷합니다. 우리의 삶이 매일 같이 사건 사고가 일어나나요? 매일 출퇴근하고 주말에 쉬고 하는 반복의 연속이면서 가끔 코로나같이 일상 전체를 바꾸는 일이 나지만 또 그 일상에 적응합니다. 이렇게 <경마장 가는 길>은 일상 그대로를 담은 다큐멘터리 느낌도 납니다.
이는 촬영 기법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마치 두 남녀의 불륜을 다큐로 담은 듯한 느낌으로 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한국에서도 이런 영화가 있다면서 좋아했던 홍상수 감독은 <경마장 가는 길>을 이어받아서 지금도 '차이와 반복'을 이용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별 사건 사고 없는 영화들이 꽤 만들어지지만 91년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형식이었습니다. 물론, 대중들은 지루한 영화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나마 강수연의 베드신이 있다는 소리에 호기심으로 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90년대 포스트 모던한 한국 사회를 넌지시 그러나 깊게 묘사한 <경마장 가는 길>
아직도 기억나네요. 015B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뮤지션이라는 기사를 읽으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뭐지? 90년대 초 당시 한국은 포스트모더니즘 광풍이라고 할 정도로 온갖 문화 현상에 '포스트 모더니즘' 꼬리표를 붙였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탈피한다는 뜻입니다. 모더니즘은 뭘까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는 쉽게 말해서 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장에서 만들어낸 공산품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공산품은 가내수공업 제품보다 품질 자체는 떨어질 수 있지만 대량 생산을 해서 생산단가를 낮추고 가격을 낮출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렴한 공산품을 대량 소비를 하는 시대가 자본주의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싼 공산품을 입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공장을 돌리는 공장의 주인인 자본가들은 돈을 쓸어 담기 시작합니다.
한국에 공장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60~70년대 한국은 근대화 물결이 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품의 혜택을 받고싼 공산품으로 삶을 영위합니다. 공산품은 싸지만 개성은 없습니다. 개성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제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초기 자본주의는 몰개성을 담보로 싼 공산품을 널리 멀리 공급해서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동일한 옷과 신발을 신는 것을 점점 싫어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나이키를 선망하지만 모든 학생이 나이키를 신으면 실증을 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나만의 신발, 개성이 있는 신발을 원합니다. 이때가 90년대 초입니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고 말한 X세대, 압구정, 오렌지족이 나오던 시기가 92년 전후입니다. 이 90년대 초 한국 사회는 공산주의 자본주의로 싸우던 흑과 백의 이념 시대를 지나서 다원주의 사회로 막 접어들던 시대였습니다. 87년 6.10 민주화 항쟁을 정점으로 사람들은 이념의 시대에서 후기 자본주의 시대로 전환이 됩니다.
물질적인 것, 쾌락을 죄악시 하던 구도자들의 삶을 살던 사람들이 내가 입고 먹고 마시는 것에 신경 쓰기 시작하고 개성이 중시하는 시대로 접어듭니다. 서양 흑인 음악인 힙합과 랩 음악이 유입되기 시작하고 강남 졸부 2세들이 아버지의 돈을 가지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여기에 해외 유학파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에서 R은 한국인임에도 프랑스에서 몇 년 살았다고 말끝마다 한국 사회를 비판합니다.
서울 밤거리를 보면서 이게 600년 역사를 가진 서울이냐면서 밤만 되면 십자가들이 가득 보인다면서 유럽의 공동묘지 같다는 말을 합니다. 한국 사회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꽤 있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역겹습니다.
R은 그렇게 서양 서양 하면서 정작 첩과 같은 J를 떠나지 못합니다. 가부장적이고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이라는 전근대적인 봉건적 인물인 R이 하는 말과 행동은 너무 크게 차이가 나 있습니다. 이런 먹물들은 현재도 참 많습니다. 라떼들은 어느 시대나 다 있기 마련이죠.
J도 그렇습니다. J도 도덕성은 높지 않습니다. R이 써준 박사 논문으로 박사가 된 점 자체가 부도덕한 일이고 이 부도덕을 막기 위해서 R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외에도 90년대 초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도 꽤 있습니다.
90년대 초 마이카 시대라서 거리에 차가 급속하게 늡니다. J는 차 안에서 R에게 99년에는 서울시 평균 주행 속도가 7km라는 소리를 하는데 중부고속도로가 뚫려다는 소리에 R이 깜짝 놀랍니다. 여기에 해외에서 온 먹물들이 주도권을 잡는 모습 등등 여러가지로 90년대 풍경을 잘 담고 있습니다. 다만 90년대 서울 풍경은 생각보다 많이 담기지는 않네요. 한글과 컴퓨터 CD를 사서 좋아하는 모습이나 테니스라는 막 불기 시작한 테니스 열풍도 담고 있습니다. 지금도 테니스 치는 사람들은 골프와 함께 고급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하기야 영화 내내 여관 가자 말자 소리가 많고 R은 허구헛날 ~~ 가자 ~~ 하자고 모든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편히 잘 서울에 집도 없는 인물입니다.
새로운 형식미만 보이는 <경마장 가는 길>
새로운 형식미, 일상의 기록 같은 다큐 같은 영화, 차이와 반복을 통한 기존 스토리텔링을 깬 모습 등등 새로운 형식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라서 한국 영화사적인 의미는 큽니다만 영화 자체의 재미보다는 분노만 치밀어 오릅니다. 물론, 모든 영화가 선남선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만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R과 J를 통해서 90년대 초 불륜 남녀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극혐 캐릭터들의 노닥거리는 걸 2시간 내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은 아니네요.
감독은 많은 문제작을 만든 장선우 감독입니다. '우묵배미의 사랑', '남부군', '화엄경', '꽃잎',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쁜영화', '거짓말' 등등 만들었다 하면 한국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네이버 TV나 유튜브에서 <경마장 가는 길>을 검색하면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경마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별점 : ★★★
40자 평 :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알리는 총성만 요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