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은은하게 빛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특히 2000년대 전후반으로 한국 영화 제2의 르네상스였던 시기에 나온 한국 영화들 중에 빛이 나는 영화들이 참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와 <시월애>입니다.
이 당시 한국의 뛰어난 영화들이 속속 할리우드에서 판권을 샀다는 기사들이 나올 정도로 김대중 정부 시절 문화 강국으로 발돋음하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BTS다 블랙핑크다 기생충에 한국의 다양한 드라마가가 넷플릭스를 통해서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지만 2000년대에는 할리우드에서 판권을 샀다는 이야기만으로도 국뽕에 넘쳤을 정도입니다.
전지현 최고의 영화 <시월애>
전지현를 세상에 각인한 영화는 누가 뭐라고 해도 2001년 개봉한 <엽기적인 그녀>입니다. PC 통신에서 연재된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영화는 딱 전지현 맞춤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로 전지현의 이미지를 현재까지 각인시킨 영화입니다. 그러나 전 전지현 최고의 영화는 1년 전인 2000년에 개봉한 <시월애>라고 생각합니다.
이정재와 전지현이 주연을 한 영화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전지현의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로 전지현의 청순한 이미지와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그렇다고 전지현이 엄청난 연기를 한 것은 아니고 영화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이후 출연한 <엽기적인 그녀>나 <별에서 온 그대>나 <도둑들>이나 <암살>에 출연한 모습이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이상하게 전 이 <시월애>의 전지현이 참 좋네요.
10년 만에 다시 꺼내본 <시월애>
2000년 추석에 개봉한 영화 <시월애>는 서울 관객 24만 전국 관객 80만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는 아닙니다. 요즘은 뜸하지만 당시는 이상하게 비슷한 소재가 연달아 개봉할 때가 많았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김하늘 유지태 주연의 <동감>이 더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비슷한 소재의 영화 <편지>를 기억하는 사람보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듯이 영화 <시월애>도 <동감>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많습니다. 좋은 영화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힘이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도 벌써 3번이나 리뷰를 쓸 정도네요. 넷플릭스에서 10년 만에 또다시 꺼내 봤는데 또다시 봐도 감동은 더 깊어지네요.
<시월애>라는 말을 들으면 10월에 만난 남녀의 사랑을 담은 영화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시월애는 시(時)월(越)애(愛)로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을 뜻합니다. 공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로맨스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영화는 시간 여행보다는 로맨스에 초점을 맞춘 영화입니다.
1998년에 사는 성현과 2000년에 사는 은주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시월애
애니메이션 성우인 은주(전지현 분)은분)는 이탈리아 어로 바다라는 뜻의 '일 마레'에서 이삿짐을 꺼내면서 입구에 있는 우체통에 다음에 살 사람에게 편지를 남깁니다. 그런데 그 우체통에서 편지를 꺼낸 건축학도인 성현(이정재 분)은 어리둥절해합니다. '일 마레'는 건축학과 교수인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 지어준 집으로 자신이 첫 입주를 하는 집입니다.
이상하다고 느낀 성현은 이모에게 여기 누가 살았냐고 전화로 묻지만 핀잔만 듣습니다. 이에 자신이 첫 집 주인이라면서 1997년이라고 적은 편지를 우체통에 넣습니다. 이를 읽은 은주는 장난이냐면서 1999년에 보낸다고 다시 답장을 보냅니다.
이상함을 느낀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심합니다. 이에 은주는 1997년에 사는 성현에게 98년 1월 9일에 눈이 많이 올 거라는 편지를 보내고 놀랍게도 은주의 말처럼 눈 예보가 없던 날에 눈이 내립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서서히 이 놀라운 사실을 믿게 됩니다. 영화 <시월애>는 다른 시간에 사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이런 소재의 드라마가 꽤 있습니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시그널>입니다.
두 사람의 믿기지 않은 사실은 우체통에 머리띠를 전달하면서 서서히 믿게 됩니다. 두 사람은 우체통을 통해서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짝사랑을 담은 영화 <시월애>
시간이 뒤틀린 것을 서로 인정하고 인지하게 된 은주와 성현. 우편함을 통해서 서로에게 물건을 전해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편지와 물건을 보내면서 교류를 합니다. 2천 년에 사는 은주는 좋아하던 사람이 미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같이 가자고 하지만 은주는 같이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습니다. 사랑에 대한 깊은 상처를 받은 은주. 이런 은주를 성현이 달래줍니다.
성현은 1998년에 사는 은주를 찾습니다. 은주는 성현을 몰라보지만 성현은 은주를 알아봅니다. 이 자체가 짝사랑의 시선입니다. 그렇게 은주를 만난 성현은 점점 은주에 대한 사랑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이런 성현을 알아보지 못한 은주는 과거에 사는 성현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을 과거에서 막아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성현. 하지만 성현은 은주의 부탁을 들어주러 집을 나섭니다.
영화 <시월애>를 빛나 게 한 공간 '일 마레'
1992년 <그대안의 블루>로 입봉을 한 감독 이현승은 뛰어난 비주얼리스트입니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해서인지 색에 대한 감각과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무척 뛰어납니다. 영화 <시월애>는 스토리도 독특하고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일 마레'라는 갯벌 위에 지은 집이 주는 공간의 매력이 거대한 파도 같습니다. 강화도 석모도에 지은 이 '일 마레' 세트장은 이현승 감독이 고집을 피워서 만든 공간이라고 하네요. 그 고집이 통했습니다. 갯벌 위에 떠 있는 듯한 '일 마레'가 주는 분위기는 이 영화의 매력의 50%를 차지할 정도로 아주 높습니다.
이러니 키아누 리부스와 산드라 블록이 주연을 한 <시월애>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제목이 <레이크 하우스>로 집을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레이크 하우스>는 원작인 <시월애>보다 재미도 없고 집도 '일 마레'보다 못합니다.
성현의 아버지가 설계한 '일 마레'를 고독과 친밀한 공간이라고 건축책에서 소개하듯이 성현과 여러모로 참 많이 닮았습니다. 동해는 청춘을 닮았고 서해는 고독과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중노년을 닮았습니다. 성현과 은주는 고독합니다. 성현은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고 은주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쓰라린 고독의 느낌을 그대로 건축으로 만든 공간이 '일 마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 마레'를 찾아갔지만 안타깝게도 2002년 태풍에 '일 마레'는 사라졌습니다. 영화에서 갯벌에서 혼자 공차던 성현이 집을 떠나기 위해서 은주가 선물로 준 키우던 물고기를 방생하기 위해서 계단까지 물이 찬 모습을 통해서 서해의 다이내믹함을 볼 수 있습니다. 서해 바다는 갯벌 때문인지 회색 빛이 가득합니다. 마치 성현과 은주의 마음을 대변하는 느낌이네요. 하나의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두 주인공의 마음 상태와 너무 잘 어울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월애는 강화도 옆 석모도의 서해와 제주도 우도의 남해 바다가 나옵니다. 서해 갯벌은 사랑이 매마른 고독 그 자체인 성현이 거니는 공간이고 남해 우도의 에메랄드 빛 바다는 슬픔을 안고 살지만 성현이라는 온기에 밝아지는 은주와 닮았습니다.
시월애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미니멀한 스토리와 이미지 그리고 음악
영화는 시간이 지나면 그 당시를 담은 기록물이 됩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기름종이 편지지, 잉크젯 프린터, 패밀리마트, 공중전화가 2000년도 당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느낌도 많습니다. 먼저 '일 마레'라는 공간은 20년이 지나도 아주 세련된 집입니다. 여기에 막 와인 열풍이 불던 시기의 와인과 스파게티도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방부제를 먹은 듯한 이정재, 전지현의 크게 변하지 않은 외모입니다. 연예인들이라서 그런지 20년이 지나도 두 배우 모두 외모가 크게 변하지 않았네요. 두 배우가 다시 시월애를 촬영해도 될 정도입니다. 미니멀한 스토리와 영화 전체가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영상도 꽤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습니다. 촬영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촬영 감독인 홍경표로 기생충을 비롯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전담으로 촬영하고 있고 이창동 감독의 버닝도 촬영했습니다.
스토리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소 황당한 공상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영화는 이 공상을 아주 매끄러운 로맨스 영화로 잘 담았습니다.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은 분들은 이 <시월애>가 자극적인 요소가 없어서 심심할 수 있고 추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 영화 <시월애>를 무척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음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현승 감독과 <그대안의 블루>에서 손을 잡았던 가수 김현철이 '시월애'의 OST도 담당했습니다. 다양한 노래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Must Say Good-bye라는 노래를 영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부릅니다. 노래가 무척 감미롭고 '일 마레'에 바다 안개가 낀 모습과도 참 어울립니다.
제작자 차승재
지금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뺨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과 자본력으로 매머드급 영화를 아주 잘 만듭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한국 영화 최전성기는 90년대 후반, 2천 년 대 초반입니다. 이 당시는 다양한 소재의 한국 영화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한국 영화 중흥기를 만든 사람이 바로 차승재입니다.
차승재라는 제작자가 만든 뛰어난 한국 영화들이 참 많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유령>, <봄날은 간다> 그리고 <시월애>도 차승재라는 뛰어난 제작자가 있었기에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시월애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
시월애를 보다보면 여기서 나올 분이 아닌데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MBC 전 아나운서 최윤영이 성현의 건축과 후배로 등장합니다. 당시 최윤영은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현승 감독의 간곡한 권유로 잠시 출연합니다.
영화에서 성현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건축학도이지만 토목공사 현장에서 근무합니다. 이 토목공사 현장은 공사 중인 서해대교와 가양대교입니다.
영화 속에는 아름다운 공간들이 꽤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 공간을 배경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서해바다와 제주도 우도가 근거리에 있는 공간으로 나옵니다. 성현이 은주에게 걸어보라고 추천한 보문리 물목이라는 곳도 실제 지명이 아닙니다. 에버랜드 근처의 호암 갤러리 근처의 길가입니다. 따라서 영화 보고 보문리 물목 검색해봐야 나오지 않습니다.
시월애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다시 보는 이유
아주 빼어난 스토리와 격정적인 이야기가 담긴 로맨스 영화는 아닙니다. 파도가 잦아든 서해 바다 같은 영화입니다. 따라서 심심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시월애는 볼 때마다 놀라운 영화 기억에 잊히지 않는 영화입니다.
시간의 뒤틀림을 통한 소재가 주는 재미도 큽니다. 2년 터울인 두 사람의 공간이 우체통을 통해서 이어진다는 설정을 과하게 사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역할로만 사용해서 영화는 찐덕거리지 않습니다. 두 배우의 역할과 힘이 큽니다. 전지현의 데뷔 시절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고 이정재의 담백한 연기도 참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공간 연출력을 잘하는 이현승 감독의 일 마레라는 공간이 담는 형언할 수 없는 짙은 푸른색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와인처럼 더 맛이 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2,000년에 대한 향수가 더해져서 저에게 있어 영화 <시월애>는 잊을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리메이크 한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2000년도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되어 있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아니냐고요? 지금은 디지털 세상이 아날로그보다 비중이 더 높아졌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의 감성을 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두 배우를 대신할만한 배우들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두 배우가 가진 이미지의 힘도 큽니다. 김현철의 음악도 마찬가지이고 이현승 감독과 같은 뛰어난 비주얼리스트도 많지 않습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을 담은 시월애. 시간이 20년이 흘러도 내가 좋아하는 한국 영화 TOP5 안에 항상 들어가 있는 영화입니다. 시월애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