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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비오는 청춘에게 한줄기 빛을 보여주는 날씨의 아이. 추천영화

by 썬도그 2019.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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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젠젠~~ 아직도 이 노래는 제 귓가에 맴돕니다. 정말 잘 만든 애니였고 2번을 봐도 3번을 봐도 감동은 바래지지 않네요. 일본 애니 <너의 이름은>은 무려 371만이라는 많은 관객을 동원한 애니였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아주 잘만들어진 애니입니다. 작화, 음악, 스토리텔링, 소재, 주제 모두 완벽했습니다. 

유일하게 아쉬웠던 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나만의 감독이 아닌 대중의 감독으로 넘어간 듯한 점이 유일하게 아쉬웠습니다. '신카이 마코토'감독이 대자본을 만나서 제대로 터진 영화가 <너의 이름은>입니다. 이 영화의 후속작 같은 영화가 10월 30일 개봉했습니다.

날씨를 다루는 10대의 이야기를 담은 <날씨의 아이>

<날씨의 아이>는 2016년 개봉한 <너의 이름은>의 작화팀과 래드윔프스 그리고 신카이 마코토가 다시 힘을 합친 애니입니다. 어떻게 보면 후속작 느낌이 드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공간은 동일합니다. <너의 이름은>의 두 주인공인 미츠하와 타키가 살고 있는 공간입니다.  실제로 <날씨의 아이> 중간에 반가운 타키와 미츠하가 주인공인 호다카와 만납니다. 

호다카 목소리는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소년 장교로 출연한 '다이고 코타루'가 연기를 하고 히나는 '모리 나나'가 연기를 합니다. 

히나는 아픈 엄마를 간호하다가 기도를 합니다. 매일 비가 내리는 도쿄를 보면서 엄마와 함께 밝은 햇살을 보고 싶다고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를 하늘이 들었는지 한줄기 희망의 빛이 특정 건물 위로 내립니다. 히나는 병원을 나와 그 빛이 닿는 건물 옥상에 올라갑니다. 옥상에는 작은 신전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을 지나자 히나는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집니다. 

호다카는 가출 10대 청소년입니다. 갑갑한 시골 생활이 싫었는지 부모님이 싫었는지 구체적으로 가출 이유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답답하고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 일상을 벗어나기 좋은 곳이자 가출을 결심하게 한 한줄기 빛을 따라서 도쿄에 흘러 들어옵니다. 도쿄는 매일 비가 내렸습니다. 갈 곳도 없고 잘 곳도 없는 호다카는 pc방을 전전하거나 남의 집 문 앞에서 자는 등 혹독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가출 청소년을 고용해줄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할 수 없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돈으로 저녁마다 패스트푸드점에에서 스프만 먹던 호다카를 안쓰럽게 본 알바생 히나는 호다카에서 근사한 햄버거를 무료로 제공합니다. 호다카는 도쿄로 오던 배에서 자신을 구해준 스가 아저씨가 준 명함을 꺼내서 스가 아저씨가 있는 사무실로 갑니다. 스가 아저씨는 잡지사에 미신과 같은 도시괴담 같은 허무맹랑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납품하는 외주 업체에서 근무합니다. 

그렇게 가출 고등학생인 호다카는 자신 같은 어린 학생을 제대로 된 월급을 주지 않는 악덕한 것 같으면서도 호다카의 사정을 알고 받아주는 의뭉스러운 스가 아저씨와 스가 아저씨와 함께 일하는 20대 누나인 나츠미와 함께 도시 전설을 취재하러 다닙니다. 

그렇게 취재와 심부름을 하면서 도쿄라는 정글에 정착하기 시작한 호다카는 자신에게 따뜻한 햄버거를 준 히나를 우연히 지나가다 봅니다. 히나는 조폭 같은 아저씨에게 성인 클럽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있었습니다. 히나는 알바를 짤리고 초등학생 남동생을 돌봐야 합니다. 악마의 유혹에 빠지려고 할 때 히나의 호의를 받은 호다카가 히나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히나와 호다카는 친구가 됩니다. 히나는 자신을 구해준 호다카에게 자신에게 있는 신기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히나가 기도를 하자 매일 비가 내리던 도쿄에 잠시나마 비가 그치고 태양이 피어납니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한 호다카는 히나에게 '맑음 소녀'라고 명명하고 맑은 하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맑은 날씨를 제공하고 돈을 받는 날씨 장사를 합니다. 

그러나 날씨를 조정할 수 있는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히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날씨에 빗댄 항상 비가 오는 우리네 10,20대들의 고민을 담다

스토리는 <너의 이름은>보다 확실히 못합니다. 엉성함도 보입니다. 먼저 호다카가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가출을 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다 보니 호다카의 불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지 못합니다. 덕분에 관객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측으로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점은 좋지만 그럼에도 호다카의 가출 이유가 간단하게라도 담겼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드네요. 

또 하나는 히나입니다. 엄마를 하늘 나라로 떠나 보낸 두 어린 학생이 같이 산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상처 때문에 국가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바만 전전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습니다.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스토리가 엉성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 <너의 이름은>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밝은 면만 가진 청소년들의 모습을 담았다면 이 <날씨의 아이>는 청소년들의 어두운 면만 담았습니다. 스토리도 어른들이 파 놓은 세상에 굴러 떨어지는 두 주인공을 보이고 있고 그나마 멀쩡해 보이고 평범한 도쿄에서 사는 중년의 아저씨도 이 두 어린 청소년에게 따뜻한 국밥 보다는 이용해 먹을 궁리 또는 자기의 안위부터 챙기고 두 청소년 주인공을 바라봅니다. 

내용이 어둡고 습하고 축축하다 보니 제가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본 것도 있을 겁니다. 

호다카가 도쿄에 오기전부터 도쿄는 매일 비가 내렸습니다. 무려 2달 내내 내리고 있고 앞으로도 비가 계속 온다는 일기예보만 있습니다. 

“신기해, 날씨 하나에 사람들의 감정이 이렇게나 움직이다니”

날씨를 조정할 수 있는 무녀 같은 히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합니다. 무쓸모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히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날씨 조정 능력에서 발견합니다. 이는 호다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녀 같은 히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돈도 벌고 사람들이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문이 잠겨 있으면 처음에는 문을 열려고 시도를 합니다.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하면서 희망은 줄고 절망감은 커져갑니다. 그렇게 절망감만 가득한 잿빛 하늘이 되면 문을 누가 열어 주기 전에는 그 문이 열려 있었는지도 깨닫지도 못합니다. 일본의 10,20대 그리고 한국의 10,20대들 특히 20대들이 학습된 무기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뭘 해도 안 된다는 절망이 기본 삶의 태도가 되었습니다.

어둡고 습합니다. 학습된 무기력이 매일 내리는 도쿄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던 호다카와 히나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에 보이는 어른들은 자기들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나마 스가 아저씨가 쉴 공간을 마련해 줬지만 이 스가 아저씨도 대충은 선하고 대충은 악한 아저씨입니다. 

2달 내내 비가 오는 도쿄는 학습된 무기력이 일상인 도쿄의 젊은이들을 그대로 투영했습니다.  이런 무기력한 삶,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너 때문이라는 병균이 쉽게 퍼집니다. 

날씨가 맑으면 사람 기분도 맑아지고 날씨가 좋지 못하면 마음까지 우울해집니다. 날씨는 사람 마음을 움직입니다. 어떻게 보면 날씨가 사람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건 아무런 연관도 상관도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 비오는 날씨가 더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날씨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나빠졌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경향이 있지만 딱 집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원인과 결과를 따지기 보다는 두루뭉수리하게 바라보니 여론에 휘둘리고 남의 의견을 자기 의견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흐릿한 생각이 모이면 피어나는 것이 마녀 사낭입니다. 그리고 잿빛 하늘의 원인을 제공한 희생자를 찾아서 몽둥이질을 합니다. 

너 때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어른, 내탓이라고 자책하는 자존감 없는 잿빛 청년들의 삶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나버린 난, 영원의 틈에서 몸부림치고 있어. 포기한 자와 영리한 자만이 승자의 시대에 어디선가 숨을 쉬어"
날씨의 아이 OST 중 하나인 래드윔프스의 '사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을까?'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노래 가사에 울먹였습니다. 우리 아이들, 내가 준 바통을 쥐어야 할 우리 10,20대들이 신음하고 울고 있습니다. 제가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런 고통의 가해자가 우리 기성 세대입니다. 더 큰 문제는 고통을 주는 줄을 기성세대 대부분이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 때는 말이야', '근면 성실하고 노력 해야'한다는 허언에 가까운 구시대의 가치관만 주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대학생들과 청년에게 월세 올릴 생각이나 하고 있죠. 

이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비가 내렸고 계속 비가 내립니다. 우울이 일상이고 저성장이 고착화 되었습니다. 청년 실업은 하늘을 찌르고 취직을 해도 그 돈으로 먹고 살기도 빠듯합니다. 3평도 안 되는 고시원 침대에 몸을 누이면 세상은 고시원만하게 보입니다. 뒤에 돌이 굴러와서 자면서도 도망쳐야 합니다. 하루 하루가 공포의 나날이고 절망의 나날입니다. 그런 청년들에게 우리 같은 기성세대 특히 경험이 진리였던 농경 사회의 삶에서 한치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노인들은 회초리를 듣고 요즘 것들, 아랫 것들 하면서 손가락질만 합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매일 비가 오는 세상을 만든 어른들을 비난해야 할 청춘들이 자기가 노력을 안 해서 자기가 무능해서 무가치해서 내가 가난한 것이라고 자책을 한다는 겁니다. 영화 <날씨의 아이>는 자기 때문에 비가 계속 온다고 생각하는 무녀 히나에게 손을 내미는 영화입니다. 지금도 많은 청춘들이 자학하면서 맑은 하늘이지만 마음 속에는 비가 내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날 손가락질 해도 너 때문에 사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날씨의 아이>는 표면적으로는 가출 고등학생과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 가장의 사랑 이야기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적란운처럼 여러각도로 해석할 것이 많습니다. 비오는 도쿄는 3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사는 도쿄에서 사는 청춘들의 현재를 보여주고 히나가 기도할 때 마다 나타나는 희망 같은 빛 한줄기는 99% 절망 속에서 1%의 희망을 보고 오늘을 견디면서 사는 청춘의 삶을 비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야기의 레이어를 하나 더 입힙니다. 바로 마녀 사냥입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저성장 시대의 우울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불경기라는 단어는 이제 귀에 딱정이가 생길 정도입니다. 우리는 호경기가 올 것이라면서 희망을 가지면서 동시에 대통령과 경제관료들을 욕합니다. 그러나 호경기는 오지 않는 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선진국치고 호경기가 있는 나라는 달러를 마음대로 찍고 통화량 늘려서 거품이나 만드는 미국과 일본 정도 밖에 없습니다. 

내일도 모래도 3년 후에도 비가 계속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 비오는 저성장 시대에 맞춰 사는 사람이 오히려 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 현명한가요? 이 비오는 날씨 같은 저성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희생양을 찾죠. 희생양을 잡아서 하늘에 재물로 바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희생양의 희생은 가볍게 여기는 모습. 바로 SNS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유명 연예인도 그렇고 한 관료의 사퇴도 그렇고 우리는 온갖 에너지를 총 동원해서 십자 포화로 한 사람의 인격을 살해합니다. 그렇게 인격 살해된 사람은 무가치한 사람, 투명 인간인가요? 이런 미디어와 개인 미디어가 합심해서 한 사람을 십자포화하는 인격 살해의 시대를 영화 <날씨의 아이>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인격 살해의 시대에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 넘치는 이유가 염치가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계속 활동하고 그걸 쓰레기 언론들이 우상화 시켜줍니다. 하지만 히나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들은 가장 먼저 소멸해 버립니다. 특히나 이제 막 싹을 피우는 10대들은 어른들이 만든 숲에서 싹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햇빛을 받지 못하면서 쓰러지고 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의 주인공이 마음을 여는 것도 성숙한 어른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 한마디였죠. 모두가 히나를 손가락질 할 때 누군가는 히나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의 결정으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도 대(大)  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하는 것이 당연시 해서는 안 된다고 <날씨의 아이>는 말합니다. 

공리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든 승자독식 사회에서 질식해 가는 가진 것 없는 청춘들의 삶과 마녀 사냥이 일상인 살벌하고 삭막한 도쿄를 호다카와 히나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특히 호다카가 전력질주를 하는 장면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 번도 누굴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소년이 사랑을 위해서 달립니다. 처음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요즘 도쿄 청년들은 결혼도 관심 없고 사랑도 관심 없다고 하죠. 저와 동년배인 '신카이 마코토'감독이 도쿄에 사는 아니 일본에 사는 10,20대 세대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의 이름은>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한 진혼곡이었다면 <날씨의 아이>는 항상 비가 오는 듯한 삶을 살고 있는 일본의 10,20대 청년들을 향해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손을 내미는 애니입니다. 

애니 작화의 최전선을 보려면 <날씨의 아이>를 봐라

좀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죠. '신카이 마코토'감독은 배경의 신입니다. 이는 엄청난 칭송이지만 동시에 캐릭터 작화는 아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하늘 풍경을 묘사하는 데는 세계 1등입니다. 이런 마코토 감독이 비를 표현하는 영화를 만듭니다. 

마코토 감독의 2013년 개봉작 <언어의 정원>은 혁명 같았습니다. 어떻게 애니가 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빗방울인데 이건 실제 비보다 더 영롱명료합니다. <날씨의 아이>는 물 만난 물고기였습니다.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영화 내내 내립니다. 폭우, 가랑비, 옆에서 내리는비, 올려다 본 비, 아스팔트에 튀기는 비, 폭풍우 등 다양한 비를 놀랍고 경이로울 정도로 잘 묘사합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이야기가 좀 맹숭맹숭한데 작화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습하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보니 이야기가 공감은 가지만 마음 아파서 외면하고 싶은 구석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화 때문에 감동은 더 크게 증폭합니다. 특히 클라이막스 장면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조금 눈물을 지렸습니다. 

신이 만든 아름다움이 더 많은 세상이지만 이렇게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도 꽤 많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네요. 2D인지 3D인지 구분이 안 가는 작화는 디즈니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정교하고 화려합니다. 허언 좀 보태서 인류 최고의 작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말에 대한 호불호. 스포 있어요

이부분은 스포가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스킵해 주세요. 




히나가 희생양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간 걸 호다카가 차원의 문을 통해서 데리고 옵니다. 대신 히나가 있는 도쿄는 매일 비가 내리다는 조건입니다. 호다카는 그걸 알면서도 히나를 데리고 옵니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3년 내내 도쿄는 비가 왔고 도쿄가 물에 잠깁니다. 물에 잠긴 도쿄를 보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어? 이거 뭐야. 애니가 왜 이러지? 돈 벌기 싫은가? 이런 애니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돈이 잘 벌립니다. 디즈니 이 영악한 회사가 세드엔딩이 없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하죠. 대부분이 세드엔딩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도쿄가 잠겼습니다. 그 모습에 당혹스럽고 불편했습니다. 모두가 고통을 받는 결말? 그렇다고 히나를 희생한 결말이 해피엔딩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히나를 구하면서도 도쿄도 구하는 결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이기적인 결말인 두 주인공은 모두 돌아오고 도쿄는 물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이게 세드엔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스가 아저씨와 <너의 이름은>에서 나온 후미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호다카가 자기 선택 때문에 도쿄가 물에 잠긴 것 같다며 자책하려고 하자 어떻게 세상 일이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냐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합니다. 이기주의자 스가 아저씨가 호다카가 히나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장면에서 각성을 합니다. 떠나간 아내를 그리워하며 매일 술에 찌들어서 살던 스가 아저씨가 변했습니다. 후미 할머니도 도쿄는 원래 바다였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누구 때문이 아닌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하는 후미 할머니. 

모든 사람에게는 고통과 슬픔이지만 두 주인공은 비가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결말을 싫다고 할 때 누군가는 이런 결말도 의미가 있지라며 손을 내밀어주길 바랬다는 마코토 감독.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두 주인공에게는 이런 결말이 유일한 희망이고 탈출구였다고 느껴지네요. 솔직히 좀 충격적인 결말이고 대중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고통 받고 있는 10,20대들의 고통소리를 듣지 않고 무시하고 오히려 손가락질 하는 다수의 목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골목길에서 울고 있는 청춘에게 손을 내미는 이런 결말. 자기 때문이라고 울고 있는 그런 청춘에게 손을 내밀어서 나에게 피해를 준다고 해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결말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르고 감독 본인도 호불호가 있을 것을 각오하고 그렸다고 하니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입니다. 

잿빛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청춘들을 위한 영화 <날씨의 아이>

밝고 맑은 소재는 아닙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우울을 뛰어난 작화가 날려버립니다. 노래도 아주 좋죠. 특히 노래 가사들은 꼭 챙겨서 보세요. 

흥미로운 내용도 있습니다.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가 잠시잠깐 나옵니다. 타키와 미츠하가 함께 사는 도쿄. 그리고 우리의 안 쓰러운 호다카와 히나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청춘들이 위로를 받을 영화입니다. 다만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 일은 날씨 때문도 아니고 너 때문도 아니야. 그냥 그런거야. 그게 세상이야라고 말하는 <날씨의 아이>입니다. 행여나 일본 불매 운동 때문에 주저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카이 마코토'는 지한파 감독이고 한국인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을 너무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감독입니다. 무명 시절의 영화를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지금의 마코토를 만들어 준 것도 있으니까요. 

별점 : ★★★★
40자 평 : 비가 오는 것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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