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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옛날 영화를 보다

20년만에 다시 본 비포 썬라이즈에서 새롭게 발견한 풍경들

by 썬도그 2016.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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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링드링드링! 셀린(줄리 델피 분)은 카페에서 손 전화를 들고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멍하니 쳐다보는 제시(에단 호크 분)에게 눈치를 주죠. 이에 제시는 똑같이 손전화를 받고 셀린의 수다를 받아줍니다.

"얘 오늘 굉장히 근사한 남자를 만나서 비엔나 역에서 내렸어"라고 시작하는 수다는 제시에 대한 평을 친구에게 합니다. 제시는 그런 능청스러운 셀린의 귀여운 연극에 맞장구를 칩니다.


기억은 다른 기억들로 덮어지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집니다. 1996년 개봉한 '비포 썬라이즈'를 영화관에서 봤는지 비디오로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기억에 납니다. 셀린이 드링드링드링! 소리를 내면서 제시와 귀여운 상황극을 하는 이 장면이요. 

영화의 많은 부분이 생각나지 않지만 이건 아직도 기억납니다. 미국 청년과 프랑스 숙녀의 하룻밤 사랑 이야기. 그 추억속 영화를 20년 만에 다시 봤습니다. 뭐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3부작의 시작점입니다. 참 독특한 3부작이죠. 배우와 감독과 이야기가 영화 속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동일하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이 비포 3부작은 영화와 같이 늙어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친구 같은 영화입니다.


미국 청년 제시와 프랑스 숙녀 셀린의 해뜨기 전까지의 하루를 담은 '비포 썬라이즈'

1996년 국내 상영되어서 지금까지 세대를 뛰어 넘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비포 썬라이즈'의 인기는 어디서 올까요? 그건 아마도 청춘이 소재이자 주제가 되어서 그러지 않을까요? 청춘은 녹슬지 않고 항상 푸르니까요 그리고 누구나 청춘이라는 계절을 지나고 있거나 지나봤습니다. 청춘이라는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청춘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미소가 지어져서 그렇지 않을까요?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하지만 그 아픔에는 사랑의 아픔도 있을 것입니다. 영화 '비포 썬라이즈'는 그런 사랑의 아픔을 근사하고 아름답게 잘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한 부부가 열차 안에서 싸움을 합니다. 이 싸움 소리에 프랑스로 가던 셀린은 가방을 챙겨서 자리를 옮깁니다. 자신의 옆자리로 이동해온 셀린을 제시가 쳐다 봅니다. 그렇게 서로 눈이 마주치게 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갑니다. 둘은 너무 말이 잘 통해서 식당칸으로 옮기자고 하고 자신은 누구이며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지 등을 말합니다. 제시는 미국 청년으로 유럽을 부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이제 여행을 마치고 비엔나 역에 내려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셀린은 프랑스인이며 방학을 맞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쉴새 없이 수다를 떱니다. 대화가 잘 맞는 걸 보니 두 사람은 아주 죽이 잘 맞습니다. 그러나 비엔나 역에 도착한 열차에서 제시는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헤어질 준비를 합니다. 이때 제시가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합니다. 짧게 만났지만 서로 결혼을 하고 세월이 지나 결혼 권태기에 빠졌을 때 이날의 우리를 그리워할 수 있다면서 나와 함께 비엔나에서 내려서 같이 하루를 보내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에 셀린은 고민을 하다가 제시와 함께 비엔나에 내립니다. 이렇게 열차에서 만난 두 남녀는 비엔나에서 해뜨기 전까지 비엔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하루밤을 보냅니다. 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담은 영화가 '비포 썬라이즈'입니다.  


여행+ 청춘 + 유럽 + 수다

이 영화는 젊은 분들이 좋아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 나이 중에 가장 싱그럽다는 20대 초반의 청춘 남녀입니다. 20대 초반을 돌이켜보면 하루 하루가 행복이었습니다.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몸과 수 많은 만남이 매일 일어났죠. 

이 청춘에 여행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섞으면 기쁨이라는 화학작용이 더 커지게 됩니다. 영화 '비포 썬 라이즈'는 그 이 3가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잘 섞은 칵테일 같은 영화입니다. 여기에 누구나 가고 싶고 특히 젊었을 때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유럽이라는 테이블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영화가 개봉하던 90년대 중반은 막 유럽 배낭 여행의 붐이 일어나서 이 영화가 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고풍스러운 도시 비엔나에서 펼쳐지는 두 청춘 남녀의 하룻밤 이야기. 참 상큼하고 물기 머금은 과일 같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20년 만에 보면서 이전에 느끼지 못한 것들이 많이 보이네요. 영화는 변하지 않았지만 제가 20년 동안 성장하고 나이들면서 쌓은 경험이 많다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새롭게 보이는 것들을 소개합니다. 


세월은 변하지만 삶의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이니 CD보다도 LP가 더 많았던 시절입니다. 레코드 가게에서 음악을 청음하는 두 청춘 남녀를 보니 90년대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90년대 분위기를 많이 풍기냐? 그건 아닙니다. 비엔나라는 중세풍 도시에서 잘 차려 입은 두 청춘 남녀라서 그런지 촌티가 나는 것은 없습니다. 

게다가 두 주인공이 삶과 죽음과 현 세상을 진지하게 말하는 철학적인 대화를 주로 나누기 때문에 세월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20대 나이에 나오기 어려운 속 깊은 이야기에 깜짝 깜짝 놀랍니다. 셀린은 제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새로운 기기가 시간을 단축해줬다고 좋아하면서 그 기기로 인해 생긴 시간으로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일을 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뜨끔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스마트폰이 처음 나올 때 인류의 일상을 보다 편리하고 시간을 단축해 한다고 좋아했지만 스마트폰 때문에 밤낮으로 일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놀란 것은 20대 청춘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대화들이 꽤 많이 나온 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기대와 함께 자신이 요즘 생각하는 것들을 줄줄줄 나열합니다. 이 영화는 대사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냥 수다라고 넘기기에는 꽤 들어볼만한 대화들이 많습니다. 

이 수다쟁이 커플은 '비포 썬셋', '비포 미드나잇'까지 이어지죠. 특히, 긴 대사를 롱테이크로 담는 연출력과 두 배우의 연기가 시종일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유럽과 미국, 여자와 남자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두 청춘 남녀의 생각의 차이도 점점 도드라지게 됩니다. 먼저 제시는 현실주의자입니다. 게다가 미국인 답게 실용주의자라서 환상 같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반면, 셀린은 환상을 믿는 유럽 여자입니다. 설사 그게 거짓이라도 달콤한 거짓말도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손금을 봐주는 한 집시 할머니가 셀린을 보고 하는 말에 좋아하는 셀린과 달리 제시는 다 뻥이라고 힐난하죠. 이런 생각의 차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넘어서 미국인과 유럽인의 차이도 살짝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 다툼을 하는 정도는 아니고 그 차이를 통해서 서로에게 더 깊이 빠져듭니다. 마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신대륙을 만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마 두 커플이 쉴새 없이 대화를 하는 것도 서로가 색다른 시선과 모르던 지식을 서로 공유하면서 느끼는 쾌감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하네요. 

한편으로는 20대에 볼때는 두 남녀의 대화를 꽤나 진지하게 들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들으니 그냥 흔한 두 대학생들의 대화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제가 20년 전 당시에 죽음, 삶과 같은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친구가 주변에 없어서 우러러 봤나봅니다. 



아름다운 소소한 에피소드들

드링 드링 드링!이라는 카페에서의 손전화 에피소드만 유난히 많이 기억나는데 20년 만에 보니 내가 잊고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꽤 많습니다. 페리스 휠 안에서 첫 키스를 하는 두 주인공과 강변에서 시를 지어주는 부랑자를 만나고 아름다운 골목에서 대화를 하는 모습. 


내일 헤어져야 하는데 돈이 없다면서 술집에서 와인 1병을 주시면 나중에 갚겠다는 에피소드 등등 잊고 있었던 사랑스러운 에피소드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두 남녀가 서로를 원하지만 구대륙 신대륙의 거리만큼 먼 현실적인 거리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모습도 많이 보이네요. 



돈이 없어서 호텔이 아닌 공원에서 빌린 와인(?)으로 밤새 대화를 하고 새벽에 열차역으로 가기 전에 서로를 기억하겠다면서 눈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은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서로를 촬영하고 함께 셀카를 찍고 메신저로 수시로 연락을 하고 화상 채팅을 할텐데 90년대 중반은 휴대폰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더 애절하고 간절한 시대가 아니였을까요? 보고 싶으면 바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시대의 고즈넉함이 잘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 잘생긴 '에단 호크'와 아름다운 미모의 '줄리 델피'의 푸릇푸릇한 모습도 빼 놓을 수 없는 매력입니다. 


청춘과 여행은 참 묘하게 잘 어울립니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열차 옆자리에 예쁜 여자나 잘생긴 남자가 앉을 것이라는 환상을 확대한 느낌 같네요.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사람이 없는 이곳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셀린의 대사였습니다. 날 알아보는 사람도 내가 누구인지 정의 내리지 않아서 내 멋대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 이는 청춘이라는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일이 낯설고 첫 경험인 청춘이라는 여행을 잘 담은 영화가 '비포 썬라이즈'입니다.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짜증났던 것은 번역입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존댓말을 합니다. 서로 진한 키스까지 하는 사이인데 "키스 해도 될까요?"라는 존댓말이 어울리지 않듯 존대로 담은 번역은 아쉽기만 합니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두 배우와 감독은 다시 만나서 이 뒷 이야기를 담은 '비포 썬셋'을 선보였고 '비포 미드나잇'으로 마무리합니다. '비포 미드나잇'은 중간까지 보다가 말았습니다. 다 보게 되면 하나의 인생이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 만큼 이 영화는 영화속 시간과 제 삶의 시간이 동기화 된 영화입니다. 그 만큼 저에게는 아주 소중한 영화입니다. 
20년만에 찾아낸 청춘이라는 앨범을 먼지 불어내면서 본 느낌이네요. 청춘은 그 자체로 에너지이자 미소입니다. 환상을 사랑하는 여자 분들에게 더 추천하는 영화 '비포 썬라이즈'입니다. 참 이 영화 지금 재개봉 중입니다. 

별점 : ★★★★
40자평 : 유럽이라는 잔에 담은 청춘 두 방울, 여행 한 방울을 섞은 싱그러운 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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