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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옛날 영화를 보다

배우, 연출, 스토리, 영상이 모두 빼어난 수작 '삼포가는 길'

by 썬도그 2016.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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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 밭 앞에서 영달(백일섭 분)은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 눈 위를 걷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막노동을 하는 영달은 밥집 여주인과 바람을 피우다가 들켜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무일푼에 갈 곳도 없는 영달 옆에 10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만기 출소한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보이는 정 씨(김진규 분)이 다가옵니다. 아무 인연도 없는 두 사람은 마을까지 동행합니다.


그 마을 식당에서 국밥을 먹던 영달과 정 씨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지청구를 귀동냥하게 됩니다. 백화(문숙 분)라는 작부가 도망을 쳤고 잡아오면 1만 원을 주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마침 갈 곳도 없던 영달은 이 말에 솔깃해합니다. 정 씨는 자신의 고향인 삼포로 가는 길이라서 겸사겸사 도망친 백화를 찾는데 동행을 합니다.

그렇게 길가에서 오줌을 싸던 백화와 두 사람은 사나운 만남을 합니다. 영달은 현상금이 1만 원이 걸렸다고 능글맞게 말하고 이에 백화는 사나운 소리를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악인이 아님을 알고 두 사람의 동행에 끼게 됩니다. 서울깍쟁이 같은 작부 백화와 세월 따라 바람 따라 흐르는 삶을 뜨내기 영달과 교도소에서 출소한 과묵한 성격의 정 씨는 정 씨의 고향인 삼포 가는 길을 같이 걷게 됩니다.



스크린을 꽉 채운 문숙이라는 이름을 가진 별


이 영화 <삼포 가는 길>은 황석영 원작의 영화입니다. 예전부터 이 영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중 한 편이라고 해서 보려고 했는데 그 기회를 참 많이 놓쳤네요. 그러다 문숙이라는 배우를 알게 된 후 필름 되감기를 하고 있습니다.


문숙이라는 배우를 알게 된 것은 작년에 본 <뷰티인사이드>에서 입니다. 한효주의 설득과 추천으로 단역으로 출연한 문숙은 단역이지만 또렷하고 강한 느낌의 눈과 눈썹을 가진 분이라서 천상 저 배우는 배우 밖에 못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빛이 나는지 스크린을 꽉 채우더군요. 그리고 이분을 뒷조사를 해보니 영화 <태양을 닮은 소녀>와 <삼포 가는 길>에 출연했더군요.

이 영화를 보게 한 결심은 어제 KBS 시사기획 창에서 한국 영화 검열을 다루면서 이만희 감독을 집중 조명했습니다. 이만희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작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회고전 하기도 했습니다. 문숙은 22살 당시에 이 영화를 출연했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만희 감독과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를 촬영 중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 충격으로 문숙이라는 배우는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이렇게 생기 넘치고 아름다운 배우가 젊은 나이에 스크린에서 사라진 것은 너무나도 안타깝네요.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다시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뜨내기 3명의 거칠지만 따스한 동행길

교도소에서 출옥한 정 씨,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막노동을 하는 영달, 그리고 전국 곳곳을 다니면서 술집 작부를 하고 있는 생활력 강한 여자 백화는 정 씨의 고향인 삼포 가는 길에 동행합니다. 처음에는 백화를 팔아서 현상금을 받을 욕심이었던 영달은 백화의 당찬 기세와 발랄함에 녹아 버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 화냥년, 뜨내기라고 비난하지만, 그 말에 가시가 아닌 온기가 담겨 있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영달의 츤데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밀착하게 합니다.

이 모습을 정 씨가 흐뭇하게 지켜봅니다. 세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깊게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달은 자신의 고향조차 말하지 않을 정도로 여자에 고향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으로 비추어집니다. 이는 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백화도 전국을 돌아 다니면서 술집 작부로 살아온 지 3년이나 된 베테랑입니다. 삶은 고단하고 힘들지만 그걸 크게 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뭐 내 잘못인가?"라고 당차게 말하죠. 그 대사가 계속 씹혔습니다. 그래 백화도 정 씨도 영달도 자기 잘못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들을 떠돌게 하였습니다. 특히 영달과 백화는 거친 변화가 가득한 세상의 공전궤도에서 벗어난 고장 난 인공위성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돈이 넉넉지 않은 세 사람은 정처 없이 남쪽으로 걷다가 마을에 들어가 장례식장에서 공짜 밥과 술을 먹고 튀는 등 흥겨운 동행을 합니다. 특히, 눈밭 위에서 술을 먹고 춤을 추면서 가는 장면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백화는 '아싸라비아'를 연신 외칩니다. '아싸라비아' 이 '아싸라비아'를 검색해보니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일본어가 어원이고 여기 맥주와 안주 추가요! 라는 말이더군요. 술집 작부인 백화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말이죠.


돈은 넉넉하지 못하지만 세 사람은 눈이 가득 내린 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점점 더 친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구도는 기시감이 많이 듭니다. 최인호 원작의 고래사냥이라는 영화도 그렇고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도 비슷한 구도입니다. 


남자 2명에 여자 1명, 여자는 술집 여자, 그 여자와 함께 동행하는 로드무비는 꽤 있었습니다. 해외에서는 영화 '길'이 인물 구성은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고요. 고래사냥과 세상밖으로가 이 영화 <삼포가는 길>보다 후에 나왔으니 원형은 <삼포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영화 모두 빼어난 재미를 담고 있네요. <삼포가는 길>이 좀 더 문학적이라면 고래사냥은 좀 더 경쾌하고 세상 밖으로는 코미디가 더 첨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설경이 가득한 '삼포가는 길'

영상자료원 유튜브 계정으로 본 <삼포가는 길>은 영상이 무척 깨끗했습니다. 영화 중간에 잠깐 비가 내리는 것과 후반에 독일어 자막이 있는 것을 보아 원본 필름이 훼손되어서 해외 프린팅과 여러 가지 프린팅을 섞어서 만든 듯합니다. 또한, 디지털 작업 전에 복원 작업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네요. 이는 영상자료원의 노고가 가득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한국 관공서 중에 가장 일 잘하는 곳이 영상자료원이 아닐까 할 정도로 정말 고생도 많고 일도 잘합니다. 
말끔한 영상은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이 만나서 더 큰 빛을 냈습니다. 영화 <삼포가는 길>는 영화 내내 설경이 펼쳐집니다. 폭설이 내리고 눈이 쌓인 길을 하염없이 3명이 걷고 또 걷습니다. 아름다운 설경과 뛰어난 영상미는 이 영화를 더 깊게 빠져들게 합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가득 묻히고 걷는 세 사람을 하얀 설경이 씻겨 주는 느낌까지 들 정도입니다. 

여기에 마을 어귀 빈집에서 망우리라고 하는 쥐불놀이를 하는 마을 아이들을 배경으로 고향 이야기를 하는 영달과 백화의 이야기는 구슬프기만 합니다. 



70년대 산업화의 굴레에 치인 뜨내기들


70년대는 한국이 막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실시하던 시기였습니다. 일본 등에서 받아온 해외 차관으로 전국에 공장을 세우고 길을 만들고 거대한 다리를 놓던 시기였습니다. 이 거대한 성장이라는 바퀴 밑에 세 주인공이 있습니다. 백화와 영달과 정씨가 처음 만나는 장소는 도로 공사장 옆입니다. 여기에 영달이 쉽게 막노동 일자리를 얻는 과정이나 낙원 같은 삼포라는 어촌을 향하던 정 씨가 새로 개통한 남해대교를 지나가는 마지막 장면 등은 70년대 산업화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인 남해대교를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정 씨의 모습은 박정희 정권이 정권 홍보 차원에서 강제로 넣으라고 했다더군요. 그 장면은 정말 생뚱맞았습니다. 영화는 산업화의 온기를 느낄 수 없거나 느끼더라도 그 산업화의 부속품 같은 뜨내기들의 삶을 조명하는데 느닷없이 산업화의 상징인 거대한 다리를 보여주면서 끝이 나죠. 이는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가수들 앨범에 무조건 1곡의 건전가요를 넣게 했던 꼰대 놈들이 지배하던 세상을 보여줍니다.

좋게 해석하면 70년대 몰염치가 일상이던 꼰대 놈들이 가득했던 증거자료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 증거로 남기게 되엇네요. 




문숙, 백일섭의 뛰어난 연기가 가득한 영화


개인적으로 백일섭이라는 배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립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에 자주 안 나온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죠. 그러나 이 개인적 감정까지 녹이는 백일섭의 인생 연기를 이 영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백화와 치고 받는 츤데레 연기와 능글맞은 연기는 아주 뛰어납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했지만 문숙이라는 배우 자체의 매력과 생기발랄한 모습은 이 차가운 풍경만 가득한 영화에 온기를 넣어줍니다. 정 씨의 김진규야 워낙 대배우라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3명의 배우가 뿜어내는 연기력은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영화를 가득 채웁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세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백화는 영달과 함께 살길 바라지만 영달은 그런 백화를 품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같은 부계 사회는 남자가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달은 미래가 없는 뜨내기인 삶으로 백화를 품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백화는 자신은 생활력이 좋다고 말하지만 끝끝내 거부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세 사람이 헤어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역에서 영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백화가 서울로 올라갈 수 있는 기차표와 달걀을 건네줍니다. 참 슬픈 장면이죠. 잠시 잠깐 동행한 사이지만 비슷한 처지라서 그런지 세 사람은 같은 모닥불을 쬐었습니다.



 20대들을 바라보는 40대의 시선이 담긴 <삼포가는 길>


좋은 영화입니다. 배우가 좋고 이야기도 좋습니다. 여기에 연출과 영상미도 빼어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각도로 영화를 해석하게 하는 다의성도 풍부합니다. 전체적인 구도는 3명의 동행기이지만 좀 더 들여다 보면 두 비슷한 삶을 사는 부초같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는 두 청춘 떠돌이를 40대의 고향이 있는 관찰자가 관찰하고 조언하는 느낌입니다.

40대면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나이인데 정 씨는 영달과 백화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백화가 위험해지자 내가 백화의 아버지라면서 술집에서 데리고 나오는 장면을 보면 영락없는 백화의 아버지로 보입니다. 두 청춘의 부초같은 삶을 정착하게 만드려고 노력하는 정 씨의 모습이 마치 제 모습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이 힘겨워하는 두 청춘에 자꾸 훈수를 두고 싶어집니다. 밝지만 명확하지 않는 미래 때문에 고통 받는 청춘이 영화에 담깁니다. 

백화처럼 살았으면 합니다. 백화처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당당함이 계속 눈에 밟히는 영화네요
지금 많은 영달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미래가 명확하지 않고 직장이 없기에 백화 같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화는 70년대라서 희망으로 맺음을 했지만 2016년 삼포가는 길은 말 그대로 연애,결혼,출산를 포기한 삼포세대로 가는 길이 오버랩되네요. 삼포를 하는 것이 내 잘못이 아니면 누구 잘못일까요? 그 해답은 각자 내려야 할 것입니다. 


40자평 : 변두리 삶을 사는 뜨네기들의 온기있는 동행기
별점 : ★

삼포가는 길은 https://www.youtube.com/watch?v=Drz_bK4GkTE 에서 무료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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