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때 그와 동일하게 사진기자가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일찍 접을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가끔 시위 현장이나 사회 이슈 현장에서 유심히 보게 되는 사진기자들의 모습은 내가 생각한 그런 모습이 아니였다. 그들은 항상 바쁘고 이리저리 뛰는 모습이 많았고 가끔 거들먹 거리고 무례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높은 곳을 오르길 좋아하며 사진 채집이 끝나면 들소 때처럼 우루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몰려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난 "똑같은 앵글로 담을 거면 그냥 사진기자 2~3명이 와서 찍고 그걸 공유하지 왜 저렇게 에너지를 낭비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더 크게 실망한 건 사진기자들의 대우였다. 그들이 그렇게 똑같이 장소에서 비슷한 앵글로 담은 사진은 데스크라는 편집 기자에 의해서 무차별 난도질 당한다는 것이다.
자기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존재! 이런 현실을 알게 된 후 사진기자가 결코 내가 생각한 진실을 추적하는 자!가 아닌 사진 채집해서 데스크라는 갑에게 사진 상납하는 존재임을 느끼게 된 후 사진기자에 대한 미련은 싹 사라졌다.
여기에 돈 되는 사진, 언론사 논조에 맞는 사진만 담거나 괴도한 연출을 시도하고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 촬영하는 돈을 쫒는 악어새 같은 존재를 보게 되면서 사진기자에 대한 존경심은 혐오감으로 자주 바뀌게 되었고 지금은 사진기자에 대한 존경은 거의 사라졌다.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세상에 빛이 스며들지 않는 곳에 플래시를 터트리면서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존재를 카메라로 길어 올리는 사진기자들이 있고 그런 기자들에게는 여전히 존경심을 다 드리지만 대부분의 사진기자들에게서 그런 존경심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람, 기자가 아니지만 기자보다 더 울림이 큰 저널리스트 같은 이 사람에게서 한국 사회의 민낯과 현재를 느끼곤 한다. 그 사람은 바로 노순택 사진작가이다
<노순택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
많은 사진작가들을 소개하지만 존경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진작가는 몇 되지 않는다. 그중 한명이 바로 노순택 사진작가이다. 세상에 정말 많은 사진이 있고 사진 장르가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진 장르는 다큐멘터리이다. 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중에 아주 뛰어난 사진작가가 노순택 사진작가이다.
몇 년 전에 사진작가 최초로 현대미술관에서 주는 올해의 작가상을 받은 노순택 사진작가의 사진은 뭔가 오묘한 구석이 있다. 심각한 이슈와 사회적 갈등에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터트린다. 그의 사진은 웃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슬프면서도 웃기면서도 슬프다. 마치 하나의 잘 만들어진 연극 무대 위에서 뛰어 다니는 우리들의 삶을 재현한 모습이 보인다.
사진 뒤 배경을 보면 심각하고 우울하고 화나고 분노하는 사건인데 사진은 살짝 핀트 나간 것처럼 유머가 보인다. 그 유머가 대부분 블랙코미디라서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너무 슬프면 웃길수도 있구나라는 조소가 흘러나온다. 이 노순택 사진작가가 쓴 사진 에세이가 <사진의 털>이다
이 책은 노순택 사진작가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전국의 사회 갈등 현장에서 직접 촬영하고 쓴 사진과 글을 엮은 책이다. 씨네21에 격주로 연재 했던 것을 사진 에세이로 발간했다. 사진기자가 아니지만 매그넘 작가들처럼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어떠한 간섭도 없이 노순택 사진작가의 오롯한 시선만으로 담은 사진 기록집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사진채집가라고 하는 노순택 작가는 광우병 사태 현장에서 희망버스가 찾아간 고공 크레인 농성장에서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평택 대추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 현장에서 대북 삐라를 뿌리는 현장에서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에서 제주 강정 현장에서 이념 대결이 치열한 시위 현장에서 그 어떤 사진기자보다 자유롭게 촬영을 했다
그 자유로움이란 데스크가 없는 자유로움 사진 소재에 대한 자기 검열이 없는 자유로움이다. 그렇게 때문에 난 그의 사진이 좀 더 진실되어 보인다. 그리고 언론이 관심 가지지 않는 대상들을 찾아서 담는 모습을 통해서 대안 언론을 넘어 언론의 참 모습까지 느낀다.
이 '사진의 털'은 에피소드를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의 코드와 맞아서 그런지 너무 잘 읽히고 재미있다. 맞다. 재미있다. 그게 매력이다. 노순택 사진작가의 사진은 재미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분 글도 참 잘 쓴다. 그것도 척하지 않고 우리가 쓰는 구어체로 잘 쓴다. 가끔 래퍼가 아닐까 할 정도로 글에 라임도 있다. 사진과 글 모두 비유력이 예사롭지 않다. 툭툭 던지는 말 같은데 그의 글들은 예리한 글들이 많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사진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사진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허나 대단한 것에 관한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진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지경인지 왜 이 지경인지 사고를 촉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비극으로 삶을 마감했던 독일의 문예비평가가 말했다던가. 지금의 문맹은 글을 읽지 못함이지만, 미래의 문맹은 이미지를 읽지 못함일 거라고, 지금은 바로 그 미래다.
<사진의 털 서문 중에서>
노순택 작가는 말한다. 사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그러나 그 사진으로 인해 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사진이 많지 않는 세상 그의 사진은 그래서 힘이 있다. 좋은 사진은 좋은 물음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에서 가장 눈길을 끈 글은 가장 뒷부분에 나오는 기자협회에 대한 비판이다.
기자협회에 가입된 언론사에게만 <한국보도사진전>의 입상 기회를 준다는 말에 어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최근 한국보도사진전 사진을 보면 느낌을 끌어내는 사진이 거의 없다. 대부분 달력 사진에 흔한 정치 이슈 사진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다 살롱 사진이다.
그래서 이제는 보도사진전 안 본다. 봐도 시큰둥이다. 그게 내 현재의 심정이자 시선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멋대가리 없는 사진들만 언론사에 실리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해외의 유명 보도 사진 콘테스트 사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응적인 사진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 노순택 사진작가의 사진이 좋아 보인다. 노순택 사진작가는 사진은 털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깃털이라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사진은 하나의 끄나플이자 마중물이다. 사진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만, 사진은 사람이라는 몸통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의 몸통들인 사람들을 움직이는 모습을 가끔 본다. 해변가에 싸늘한 시체가 된 쿠르디라는 시리아 난민 어린이를 담은 사진이 세상을 움직였 듯, 사진은 세상을 움직이는 시동키 같은 존재다. 감히 누가 어린 아이 시체를 찍느냐면서 나무랄 수 있겠는가.
사진이나 찍고 앉아 있네라는 조소가 들리는 세상이지만 그 사진이나 찍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노순택 작가의 사진을 통해서 언론이 담지 못하는 더 참혹스러운 세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세상 어두운 곳에 빛이 되어준 노순택 사진작가의 사진은 그래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