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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20대를 담은 영화 '초록물고기'

by 썬도그 2015.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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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영화나 책은 10년 단위로 다시 볼 것을 권합니다. 왜냐하면 영화나 책 내용은 변하지 않지만 내가 변했기 때문에 같은 영화도 경험이 쌓인 나는 그 영화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이런 삶의 지혜를 얻게 된 것은 몇년 전에 본 영화 '박하사탕'부터였습니다. 
20대 후반 영화관에서 봤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그냥 그런 80년대 군부 독재 정권 시대를 그린 영화로 인지 했습니다. 당시 30,40대 기성세대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소리에 뚱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내가 30대가 되서 보니 안 보이던 부분이 한올한올 칼칼하게 올라오면서 모든 장면이 나의 삶과 연결이 되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경험에 따라서 같은 이야기도 달리 느껴진다는 것을요. 삶과 세상을 관통하는 영화들은 나이라는 경험이 어느 정도 차야 보이는 지 그때 알았습니다. 



20대에 영화관에서 처음 본 초록물고기

1997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초록물고기'를 종로3가 서울극장에서 봤습니다. 당시에도 나름 영화광이라서 기대작인 '초록물고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봤습니다. 워낙 평이 좋기도 했고 당시 가장 핫한 배우였던 한석규가 주연이라는 이유로 봤습니다. 

감독은 이창동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감독이지만 당시는 소설가 출신의 영화 감독이었습니다. 솔직히 소설가가 취미로 영화 촬영하는 줄 알았습니다. 잠깐의 외도로 느꼈죠. 그런 거부감도 있긴 했지만 한석규, 심혜진이라는 가장 핫 한 두 남녀 배우의 출연과 소설가 출신의 감독의 감성을 기대 하면서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약간의 흔들림은 있었지만 큰 느낌은 없었습니다. 막 전역한 나와 비슷한 20대 주인공이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에 살짝 감동 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심혜진이 펑펑 우는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관을 나섰습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해도 아주 또렸한 메시지는 있었습니다. 해체되어 가는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서 막둥이라고 불리는 가족의 막내가 신도시 개발의 희생양이 되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죠.



30대가 되어서 TV에서 본 '초록물고기'는 더욱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심혜진이 버들나무 아래서 펑펑 우는 장면을 오롯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도시 개발과 조폭 그리고 그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희생되어가는 청춘의 눈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40대가 되어서 EBS에서 한 '초록물고기'를 보면서 막둥이의 깊은 숨을 수는 쉬는 눈빛에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신도시 탄생의 불쏘시게 되는 20대 청춘의 슬픈 뒷모습과 기성세대가 20대를 착취하는 추잡스럽지만 너무나 현시적이고 현실적인 이미지를 또렸하게 봤습니다. 마치 거울에 비친 추악한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봤습니다.

30대 까지는 막둥이(한석규 분)으로 봤다면 40대가 보니 내가 마치 조폭 두목인 배태곤(문성근 분)이 되어서 막둥이를 바라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동화의 세계에서 정글의 세계로 넘어가는 20대 겪는 오춘기를 그린 '초록물고기'

20대는 시대와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사회가 깔아준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삶을 살던 10대를 지나 같자기 궤도가 사라진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놀고 싶으면 몇 년을 놀아도 되고 PC방을 간다고 누가 크게 뭐라고 하지 않고 술을 먹고 담배를 펴도 작작 피라고 할 뿐 끊으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대가 20대입니다.

10대는 자기 맘대로 하는 행동이 거의 없지만 어떤 행동을 해도 부모 책임이지만 20대가 되면 모든 자기 행동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은 20대, 뭐라도 될 수 있지만 뭐라도 되기도 힘든 힘겨운 세대가 20대입니다. 
막 전역한 막둥(한석규 분)은 미래의 계획도 없이 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 기차에서 미애라는 조폭의 여자와 스칩니다.

막둥은 삐걱 거리는 가족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막둥은 기술도 없고 학력도 좋지 못해서 빈둥거리지만 유일하게 깡다구가 있었습니다. 그 깡다구만으로 조폭인 배태곤(문성근 분)의 여자인 미애(심혜진 분)과 친해지게 됩니다. 미애가 기차에서 놓친 스카프를 전해주지만 미애는 막둥에게 선물이라고 줍니다.

막둥은 그런 미애에게 반해 버립니다. 상당한 미인인 미애에게 반해버린 막둥은 미애라는 환상에 머무를 수 만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미애의 남자인 배태곤이 깡다구가 좋은 막동을 주차 요원으로 발탁합니다. 이후 막동은 배태곤이 골치 아파하는 일을 해결해 주면서 조직에서 큰 성장을 합니다. 


 20대라는 나이가 그렇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에 고민이 참 많은 나이죠. 동화 속 세계에서 나와서 정글과 같은 현실 세계로 스스로 걸어들어가야 합니다. 막동에게 있어 조폭 생활은 현실이었습니다. 그 조폭의 현실 속에서 가끔 나타나는 현실 도피처가 미애였습니다. 이는 미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애는 조직의 두목의 애인이라서 자신의 삶을 살기 보다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때 순박한 청년이자 피난처인 막동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가까워지지만 현실을 알기에 서로에게 피난처 역할만 할 뿐 서로 다가서지도 못합니다. 
순박함이 가득 묻은 막동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동화의 세계와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큰 갈등을 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동화의 세계를 떠나 현실의 세계에 점점 몸을 밀어 넣기 시작합니다. 막동을 보면 성선설이 생각납니다. 아니 세상이라는 곳이 성선설이라는 이치로 굴러가는 것 같기도 하죠. 

배태곤이라는 두목이 신도시 개발 이권 다툼을 할 때 막동에게 거사를 부탁하면서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을 때 순대국밥이 아닌 떡볶이라고 하는 막동이를 보면서 막동의 소년 같은 심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신도시 개발의 그림자를 담은 '초록물고기'

지금이야 신도시 개발해도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서 조폭들이 많이 끼지 않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평촌, 일산 같은 경기도 신도시는 많은 이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지난 60년 간 한국 재태크 1순위는 부동산이었습니다. 수익률도 꽤 높은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쓰여졌던 시절입니다. 이런 노른자를 조폭들이 놓칠리 없죠.

배태곤은 베트콩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하는 다른 조폭 두목과 재개발 이권을 놓고 다툼을 합니다. 
이런 과정은 신도시 개발의 그림자를 간접적으로 그려집니다. 새로운 도시가 생기면 큰 빌딩이 드러서는데 그 빌딩의 긴 그림자는 막동에게 향합니다. 배태곤은 막동에게 상대 세력 두목을 제거할 것을 부탁합니다. 


가끔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주저했던 막동은 "식구들하고 같이 살면서 조그만 식당이나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구체적인 꿈을 말합니다. 자신의 꿈을 말하자 막동은 그 꿈을 실현할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사람을 죽인 막동은 어렸을 때 형이랑 초록물고기를 잡으러 갔던 그 때를 떠올립니다.

이 전화부스 장면은 한국 영화 명장면 중 명장면입니다. 살인을 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희미하게 웃던 장면. 



가족을 위해 희생 당한 가족 이야기, 초록물고기

가족은 환상입니다. 멀리서 보면 기쁨이 가득한 곳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밀어내고 싶을 정도로 악다구니가 많습니다. 오랜만에 식구들과 함께 야유회를 갔는데 거기서도 큰형을 술을 먹고 술주정을 하고 그런 모습을 말리면서 난장판이 됩니다. 이런 현실을 막동은 차를 몰고 빙빙 돕니다. 

이런 밀어낼 수도 없고 보듬기도 힘든 가족의 반목을 해결할 방법은 돈입니다. 큰 돈이 있으면 가족들간의 다툼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 막동은 몸을 던집니다. 보통 가족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큰 형이나 아버지가 희생을 치루지만 이 초록물고기에서는 막동이 희생 당합니다. 배태곤의 칼에 찔려서 차 앞유리에 쓰려져서 깊은 숨을 쉬는 장면은 많은 눈시울을 흘리게 합니다.

이 장면은 20대 때는 눈물을 흘릴 정도가 아니였는데 나이들어서 다시 보니 눈물이 흐르게 되네요. 이는 가족의 희생을 받아 먹고 살던 나이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는 나이가 되어서 막동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이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네요.  특히 그 위치에 가면 보이는 세상의 이치들이 보입니다. 이 장면과 함께 막동의 희생으로 막동의 식구들이 신도시 옆에 작은 식당을 하는 모습이나 그 식당이 막동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임을 알고 펑펑 우는 미애의 마음에 함께 흔들리게 되네요


신도시 개발의 그림자와 함께 해체되는 가족을 복원하는 과정을 한석규와 문성근 심혜진의 뛰어난 연기와 담백한 연출로 담은 뛰어난 수작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제는 대배우가 된 송강호가 이 영화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집니다. 너무 리얼한 연기에 실제 조폭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있었죠. 이 영화 이후에 넘버3에서 조폭 연기를 완성합니다. 

지금도 전국에는 막동이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화려한 도시의 조명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이요. 먹고사니즘이라는 철학이 지배한 한국에서 가족을 지켜나가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큰 나무 아래서 온 가족이 모여서 사는 것이 꿈이라던 막동은 큰나무집이라는 식당을 가족에게 남깁니다.  

그 큰나무집 식당에 임신한 미애와 함께 들어온 배태곤에게  요즘은 불신의 시대라면서 닭 잡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모습이 씁쓸하네요. 영화의 배경이 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신의 시대는 변하지 않않네요. 그러나 변치 않고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가족입니다. 가족이 세상 구성 단위의 가장 기본입니다. 그러나 그 가족을 해체하지 않고 이끌어 가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네요.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느꼈습니다. 한국 최고의 감독은 이창동입니다. 많은 분들이 박찬욱이나 봉준호 감독을 꼽지만 저에게 있어 최고의 감독은 이창동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후손들이 그 시대의 사료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한 세대의 공기를 아주 잘 담습니다. 사회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은유 가득히 비판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밀양, 시는 한국 사회를 직간접적으로 힐난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요즘 영화 안 찍으시는지 신작 소식이 없네요. 부디 또 다른 영화로 만나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소설가 출신이라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도 무척 좋은 분이죠. 이창동 감독의 데뷰작인 초록물고기는 신인감독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연출도 무척 뛰어납니다. 그래서 그해 청룡영화상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90년대 초 한국의 풍경 아니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잘 담은 영화 초록물고기입니다.

별점 : ★

40자평 : 신도시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 한국이라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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