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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세상에 대한 쓴소리

신안 염전 노예의 집단 광끼는 대한민국 전국에서 벌어지는 일상다반사

by 썬도그 201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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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2월 6일 지적 장애인 채모 씨(48)가 어머니 품으로 안기면서 펑펑 우는 모습을 봤습니다. 구로 경찰서인지 소방서인지에서 제공한 그 영상을 보면서 무슨 사연이 있나 했습니다. 이 사건은 많은 언론들이 보도를 해서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지적 장애인 채모씨는 직업 소개소 직원 고모 씨(70)에 소개로 전남 신안군 외딴섬 염전에서 지난 5년 2개월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 5년 2개월 동안 염전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했지만 월급을 단 한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유명한 섬 노예사건입니다. 외땀 섬에서 노예처럼 생활 하다가 도망치거나 신고로 풀려난 사건은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비일비재하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혹자는 그럽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현대에도 벌어질 수 있나?
자기가 탈출하고 싶으면 탈출 할 수 있고 다른 섬 마을 분들에게 말하면 되지 않나?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아니 모든 섬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협조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도덕이 마비된 섬은 집단 광끼로 물든 교도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지적 장애인 채모씨가 읍내에 머리 깎으러 나왔다가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고 우체국에 신고를 한 이유도 주목해 봐야 합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경찰도 섬 사람과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이는 구조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수십 년 아니 수세기 동안 섬이라는 지형을 이용해서 노예로 살았던 사람은 꽤 많았을 것입니다. 전 이 '섬 노예'사건을 보면서 2차 대전 시의 독일 국민들이 떠올랐습니다. 히틀러를 지지했던 그 독일 국민들은 과연 모두 악마였을까? 아니면 집단 광끼에 물든 사람들이었을까?

 "집단 광끼"가 어떻게 현대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지에 대한 구조적인 모습을 좀 생각해 봤습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이 집단 광끼를 만든다


사진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B%B0%80%EA%B7%B8%EB%9E%A8_%EC%8B%A4%ED%97%98

1961년 예일 대학교 심리학과 조교수였던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을 했습니다. 
이 실험은 간단한 실험이었습니다.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라는 실험을 하겠다면서 4달러를 주고 피실험자를 모았습니다. 
피실험자는 학생 역할과 선생님 역할로 나뉘어서 실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밀그램은 학생 역할을 하는 피실험자를 배우로 바꾸었습니다. 
피실험자는 감독관이 있는 방에 들어가서 학생에게 암기한 단어를 묻습니다. 칸막이로 된 뒤에 있는 학생이  암기한 단어를 잘 대답하면 통과지만 말을 못하거나 틀리면 가벼운 체벌인 15볼트의 전기 쇼크를 줍니다. 버튼을 누르면 15볼트의 전기가 흐르고 학생은 고통을 받습니다. 전기는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벽 뒤에 있는 학생은 연기자가 들어가서 볼트를 올릴 때 마다 거기에 맞게 고통스러운 소리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전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밀그램은 과연 이 선생님 역할을 하는 피실험자들이 감독관의 지시를 얼마나 잘 따를까 궁금 했습니다. 
학생이 틀릴 때 마다 감독관은 전기를 높이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15볼트에서 최대 450볼트까지 순차적으로 올리라고 요구하면서 피실험자들이 주저할 때 감독관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말하며 전압을 올릴 것을 요구 했습니다. 
과연 몇 %의 피실험자들이 최대 볼트인 450볼트까지 올렸을까요?

밀그램은 0.1% 정도만 450볼트까지 올릴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 450볼트면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도 올릴까? 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65%의 피실험자가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습니다.
무려 65% 피실험자들이 학생이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 올렸습니다. 


이 실험은 아직도 화제가 되고 있고 권위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쉽게 복종을 하는 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이 권위에 대한 복종 실험이 현재 진행형인 나라입니다. 한국은 수평적 사회가 아닌 수직적인 사회입니다. 권위있는 사람이 까라고 하면 까고 기라면 기는 사회입니다. 물론,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권위에 목숨을 거는 나라입니다. 

윗 어른이라는 권위자 혹은 사장님 직급이 높은 상사가 말하면 그 말이 이치에도 상식에도 어긋나는 말이라고 해도 이견을 낼 수가 없는 사회입니다. 권위자의 말이 절대적으로 맞겠지!라는 무거운 기운이 자리잡고 있는 나라입니다. 어른이 말하는데 이견을 내면 싸가지 없다고 하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런 수직적인 사회를 가진 한국은 권위자의 말에 아주 쉽게 믿음을 줍니다. 그래서 권위자 코스프레를 하고 사기를 치는 인간들이 참 많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같은 말을 해도 양복을 입고 하는 사람의 말과 후질근 한 작업복을 입거나 꾀죄죄한 복장을 한 사람의 말 둘 중에 어떤 사람의 말을 잘 믿습니까?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양복을 입고 만나면 머리를 숙이면서 작업복을 입고 만나면 거들떠도 안 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사진 저작권에 대한 내 블로그 글을 봤다는 언론사 기자분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 제가 사진 관련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다음에 연락 주겠다며 전화를 끊더군요. 전 압니다. 그 기자가 다시 전화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요. 왜냐하면 사진 관련해서 좋은 글을 썼지만 사진에 대한 권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글이 중요하고 생각이 중요하고 주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글과 생각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권위가 필요 했던 것입니다. 


몰상식하고 비도덕적인 사람이 권위를 가지면 집단 광끼는 시작된다

섬 노예 사건은 집단 광끼입니다.  권위자 혹은 권력자의 암묵적 동의가 없었다면 저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섬과 같이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인지 잘 아는 곳이라면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지시 혹은 암묵적인 동의를 하지 않고서는 저런 섬 노예가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이 권력을 가진 권위자가 바르고 정직하고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몰상식하고 비도덕적인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집단 전체는 몰상식이 상식이 되고 비도덕이 도덕이 되어서 집단 광끼로 물들게 됩니다.

혹자는 이번 일이 전라도 섬에서 일어났다고 전라도를 폄하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런 사람 자체도 집단 광끼 최면에 걸린 지역주의자입니다. 이런 모습은 섬에서 자주 일어나긴 하지만 육지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기억나세요? 밀양 여중생 사건!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집단 광끼의 사건이었습니다. 피해자인 여중생을 보듬어줘야 할 마을 주민들이 피해자를 여론재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런 곳이 바로 지옥이구나를 느끼게 되더군요. 더구나 같은 또래의 학생들 마저 손가락질 하는 모습에서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영화 '이끼'는 이런 폐쇄적인 집단이 어떻게 미쳐가는 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 이끼에서는 마을 이장이 마을의 권위자로 나오는데 한 외부인이 이 집단 최면에 걸린 마을을 분쇄를 합니다. 이렇게 외부인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투입되지 않으면 이런 집단 광끼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밀양 뿐입니까?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자신도 피해자면서 집단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회사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중년의 반도체 근로자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세요. 내부고발자들이 한국이라는 집단체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보시면 밀양, 신안?? 이런 곳 탓할 필요 없습니다. 한국이라는 사회가 집단의 연속이고 집단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말을 할 수가 없는 사회입니다. 
그랬다가는 내부 고발자라는 선인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닌 낙인이 찍혀서 회사를 나와야만 합니다. 이런 집단 광끼가 신안만의 문제가 아닌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입니다. 불법영업하는 곳에 미리 전화를 주는 경찰들이 있는 나라, 내부 고발하면 퇴사하라는 압력을 넣는 나라,  나에게 유리하면 잘못 된 일도 눈 감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나라에서 신안의 섬마을만을 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이 섬마을의 집단 광끼를 물타는 글이 아닙니다. 그 신안 섬마을의 문제 아니 섬마을의 노예문제를 뿌리 뽑으려면 내부 고발자 같은 선한 사람들이 1,2명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라도의 한 병원 의사가 섬에서 의사로 근무를 했다면서 섬 노예에 대한 옹호성 발언을 페이스북에 한 모습을 보면서  외부인력도 시간이 지나면 그 집단과 동조화 되는 모습에 더 크게 놀라게 되네요. 

좋은 게 좋은 거다?? 전 이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쁜 것도 집단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다라고 강요하지 않나요? 


수 많은 비리와 끊임없이 일어나고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가는 것은 정치인들이 썩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썩었기 때문에 그런 썩은 정치인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안의 집단에 대한 충성과 소수의 희생을 당연시 하는 문화와 함께 권위자의 명령에 토를 달지 못하는 이 수직적인 사고방식이 만연한 나라에서는 저런 집단 광끼는 아주 자주 일어나고 있고 일어 날 것입니다.

히틀러가 탱크를 몰고 정권을 잡았습니까? 
히틀러도 투표로 선출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한 것도 우리 같은 일반 시민들이었고 그런 집단 광끼에 물든 독일인이었습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처럼 집단 광끼에 걸려 있어도 인류애라는 보편적인 상식을 지키는 독일장교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집단 광끼는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서 우리 곁으로 옵니다. 광끼에 걸려 있는지 그 당시는 모릅니다. 내가 그 집단을  준거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외부의 비판을 막아내는 쉴드질 전사가 될 것입니다. 이 집단 광끼를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는 자신의 집단과 자신을 관조적으로 보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객관은 아니더라도 나와 내 집단을 외부의 시선으로 보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이 집단 광끼의 최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시선에서 건강한 비판이 나오고 그 건강한 비판을 잘 수용하는 집단이 건강한 집단이 될 것입니다. 
저 신안 섬마을은 건강한 비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붉어졌고 이는 섬마을의 문제를 넘어서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내가 속한 집단을 공격하는 외부의 시선을 병원균 취급하면 열심히 쉴드질 하는 분들이 꽤 많을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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