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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외국사진작가

어린이날에 생각나는 사진작가 루이스 하인(Lewis Hine)

by 썬도그 2013.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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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린이 날이였습니다. 전국의 어린이들이 행복한 하루를 보냈길 바랍니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 어린이들은 알고 있을까요? 소파 방정환은 작은 어른이라는 개념의 어린이들을 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하고 우리가 고귀하게 다루워야 할 존재 보다는 작은 어른이라는 개념으로 대우를 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1980년대 중반 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니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작은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는 큽니다.

작은 어른은 나이 어린 어른이기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거나 알바를 뛰면서 집안을 도와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부모님 세대들인 50,60년대 이전에 출생한 분들은 첫째 누나가 막내 동생을 업어서 키우곤 했었죠. 그리고 15살이 되면 공장에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왜 15살이냐고요. 적어도 초등학교는 나와야 했기에 초등학생 까지는 어린이 취급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갈 나이가 되면 학교 대신 공장으로 많이 향했고 우리가 폄하해서 부르는 공돌이 공순이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혹스러운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나마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교)이 공장에서 일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기에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모를거예요 이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이 그 나이때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들에서 꼴을 베는 노동을 했다는 것을 모를거예요


아동 노동을 사진으로 고발한 루이스 하인

몇년 전에 EBS에서 전 세계의 아동 노동을 고발하는 다큐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말 초등학생도 아닌 유치원에 갈 나이인 5살 정도 되는 아이가 형과 함께 뜨거운 벽돌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형과 함께 벽돌을 식히는데 골고루 식혀야 하는지 뜨거운 벽돌을 맨손으로 잡고 수시로 뒤집어줘야 했습니다. 

그 조막만한 아이는 뜨거운 벽돌을 만지면서 손이 뜨거워서 계속 울었습니다. 울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임을 알기에 울면서도 벽돌을 뒤집었습니다. 보통 아이는 울면 모든 것을 포기하지만 그 아이는 비록 울지언정 벽돌을 계속 뒤집더군요. 그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밤에는 자신들이 만든 벽돌로 만든 가건물에서 비를 피하고 이슬을 피합니다. 

눈물나죠. 그 어떤 슬픈 영화보다 더 슬픈 광경이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니까 그렇다고요? 아닙니다. 이런 모습은 초강대국 미국에서도 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은 소비의 블랙홀이었고 미국은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엄청난 물량을 생산했습니다. 그렇게 미국경제는 부강해졌고 화석연료를 이용한 산업의 급팽창 많은 노동력을 요구 했습니다. 

이에 많은 이민자의 자식들이나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린 자녀들을 공장에 보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공장에서 일했던 숫자는 150만명(1890년)에서 200만명(1910년)까지 늘었습니다. 어린 노동자의 증가는 어른보다 인건비가 싸다는 것과 미숙련공이지만 작은 공구를 잘 다루워서 작은 제품을 생산하는데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오늘 우리가 아이들에게 선물한 장난감 중 일부는 비슷한 나이 대의 다른 나라 아이들이 만든 장난감임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 장난감 중 일부는 같은 나이 또래의 다른 나라 아이들이 생산한 장난감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다보니 아이들은 체중미달과 척추측만증과 결핵과 기관지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주로 탄광, 방적공장, 통조림 공장등에서 아이들은 일을 했습니다. 

1904년 진보적인 아동 노동 위원회에서는 이런 아동노동의 심각성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 아동 노동 위원회는 뉴욕의 한 교사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합니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하인입니다. 
루이스 하인은 1907년 국가 아동노동위원회의 전속 사진가가 되어서 18년 동안 전국의 아동노동 현장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이 불쌍한 미 전국에 있는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광산, 정육점, 방적공장, 통조림 공장, 신발닦기 소년, 신문을 파는 소년,소녀들, 행상을 하는 아이들 등 전국의 노동을 하는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1908년 뉴욕, 의류 노동자


1908년 신시네티에서 바구니를 파는 소녀들


1908년 무를 파는 소년 소녀들


1908년 인디아나폴리스에서 신발을 닦아주는 소년


1908년 시가 공장에서 시가를 만드는 소년들


1908년  탄광에서 일하는 소년


1908년 인디아나폴리스 유리병 공장에서 병을 만들고 있는 소년들


1908년 인디아나폴리스의 통조림 공장에서 근무하는 소년 소녀들





1908년 에번즈빌에서 방적기계를 돌리는 소녀



1909년 볼티모어에서 딸기를 따는 소년




1909년 뉴저지의 한 볼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소년들


믿겨지시나요? 미국이 이런 나라였다는 것이요? 그러나 이런 모습은 서서히 70,80년대 한국으로 옮겨 옵니다. 오늘 구로공단 쪽방촌을 재현한 전시장에 갔는데 구로공단에서 근무한 여공들의 나이가 15살 16살이었습니다. 아세요? 인기 소설가 신경숙이 15살 나이에 가리봉동 쪽방촌에서 살면서 낮에는 가전제품 공장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여상에서 공부를 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갈 나이에 일을 해야 했던 우리의 80년대 모습

그리고 지금은 방글라데시나 인도나 인도네시아 쪽으로 그 아동 노동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커피 농장에서 하루 5달러도 안되는 돈을 벌면서 하루종일 커피를 따는 아이들이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현실을 외면하거나 크게 느끼지 못할 뿐이죠

루이스 하인은 이 아이들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공장장들은 물론 싫어했죠. 그러나 인터뷰를 한다는 핑계로 이 아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이 사진들은 아동노동 금지법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14세 이하(공장) 16세 이하(탄광)에서 노동을 하는 아이들은 8시간 이하만 근무해야하며 야근은 절대 불허한다는 아동 노동 금지법은 1920년 확정이 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보수들과 기업가들의 압력으로 인해 이 아동노동법은 1932년에 전국에 적용되죠.

이런 모습을 보면 무상급식 반대하는 한국의 보수들의 모습과도 링크됩니다. 아이들이 눈칫밥 먹는 것에 대한 서러움을 보수들은 절대 모릅니다. 눈칫밥은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되고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부적응자가 되는 것 아닐까요?

대가 없는 따스함이 아이들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데 보수들은 이걸 잘 모릅니다. 일한 만큼 번다? 그건 어른들이나 적용해야 할 말이지 아이들은 과할정도로 보듬어주고 보살펴줘야 합니다. 그게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어른답게 행동 했나요? 요즘 어른들 아이들 보고 혀를 차는데 혀 차지 마세요! 다 당신들 보고 자란 아이들이고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의 거울입니다. 

뭘 잘했다고 혀를 차세요??
다 그런 세상을 어른들이 만들었으니까 아이들이 엇나가는 것이죠. 아동노동은 이제 한국의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아동 학대는 여전히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패고 방관하는 어른들이 늘어가는 요즘. 과연 어린이를 우리는 어른이 답게 대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루이스 하인은 어른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런 불행을 그냥 보고 있지 않고 카메라로 담아서 세상에 고발했고 루이스 하인의 사진들은 '아동 노동 금지법'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어른들이 있기에 아이들은 아이다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의 어른들은 루이스 하인 같은 어른이 몇이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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