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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서울여행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

by 썬도그 201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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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을 끼고 정동 로터리 쪽으로 걷다보면 시간의 타임워프가 일어납니다. 정동길에는 수 많은 근대 유물들이 가득합니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도 있고 정동교회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중명전은 가보질 못했네요


수 없이 정동길을 지나갔지만 중명전을 가보지 못한 이유는 이 중명전이 대로변에 있는 것이 아닌 살짝 골목을 들어가야 보이기 때문이고 항상 의경이 있어서 고위 관료의 집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지난 광우병 촛불시위 때는 전경 중대가 항상 배치되어 있어서 제 상상은 확신이 되었습니다.

정동극장 로비를 촬영 한 후에 우연히 근처에 있는 중명전을 들어가 봤습니다. 아니! 이런 곳이 있었다니하는 장탄식이 나옵니다. 참! 사진은 날이 좋은 날 찍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네요. 미러리스로 찍었는데 같은 사진이라도 이렇게 빛 좋고 날 좋은 찍으니 사진이 더 좋아 보이네요


중명전이름은 많이 들어 봤습니다. 저는 덕수궁에 있는 전각이 중명전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 근대 건물이 중명전이네요
관람은 무료이고 관람시간은 오전 10시 부터 오후 5시 까지로 아주 짧습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고요

중명전 건물은 원래 덕수궁의 일부였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지금의 덕수궁은 일부만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중명전 처럼 흩어지게 되거나 사라졌습니다.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의 크기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과 중명전을 넘어서 아주 컸었습니다. 하지만 잦은 화재와 개발 등의 이유로 축소 되었죠


앞 마당에는 작은 잔디가 있네요


전 이런 건물이 너무 좋아요 아파트만 쳐다보다가 이런 고풍스러운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서울은 깊고 넓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붉은 벽돌이 참 단아하고 차분하고 고풍스러운데요. 이런 근대 건물이 많은 군산에 올 봄 여행을 떠나볼 생각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장소가 있기도 한 군산이지요




건물을 둘러 봤습니다. 쭉 둘러보니 뒷터도 꽤 정갈하게 잘 다듬어 놓았네요


하얀 돌담이 푸른 나무와 잘 어울립니다




건물을 둘러 본 후에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 봤습니다


발코니에는 나무 의자가 있는데 볕 좋은 날 벽에 기대서 졸고 싶을 정도로 좋네요


로비에는 바닥에 멋진 문양이 유리로 막혀 있는데 딱 보니 이 건물은 최근에 복원 공사한 것 같네요


중명전은 작은 박물관 같았습니다 여러가지 관람 자료가 있네요


중명전이 뭐하던 곳인지 잘 몰랐는데 여기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네요
그래서 중명전을 비극의 장소라고 하는군요


중명전은 약 3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1899년 장로교 여선교사들이 지은 정동여학당 터에 황실 도서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1904년 덕수궁에 대형 화재가 났고 이 대화재는 해외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엄청난 화재였습니다. 뭐 일본인들이 방화했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죠



덕수궁이 화재가 나자 고종은 거처를 중명전으로 옮겼고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곳에서 비극이 일어납니다.

1905년 11월 일제는 무장군인을 앞마당에 배치한 후 을사늑약을 쓸 것을 독촉하죠. 살벌한 분위기를 매일 같이 연출했지만 고종은 끝끝내 그 독촉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은 망국으로 치닫고 그 역사의 흐름을 고종 혼자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고종은 이토우 히로부미의 강압과 을사5적이라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5인방에 의해서 옥새도 없이 을사늑약은 체결됩니다. 

문제는 이 을사5적의 후손들이 여전히 떵떵거리고 산다는 것과 함꼐 친일세력이 보수의 옷을 입고 여전히 한국의 이너서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친일파로 분류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한국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극일을 외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냥 독도는 우리땅! 하면 애국인가요? 참 답답한 나라입니다. 역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친일의 후손들이 떵떵거리는 사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먹고사니즘이라는 대한민국 유일한 철학으로 설명이 가능하긴 합니다. 

이토우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 당해서 죽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위대한 이유는 이 이토우라는 인간에 대한 거룩한 심판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건물은 유럽 풍인데요. 누가 지었을까요? 누가 설계 했을까요?


바닥에는 강화유리로 바닥 문양을 보호하고 있는데 이 문양은 러시아풍 문양입니다.


진한 노락색이 현재 덕구궁이니고 옅은 노란색 부분이 옛 경운궁(덕수궁)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명전에서 고종은 1907년 헤이그특사를 파견합니다. 
참! 요즘 학생들 근현대사를 안 배운다고 하는데 이런 역사공부를 하지 않고 어떻게 미래를 내다 볼 수 있고 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을까요? 현대사를 일베라는 똥통에서 배운다고 하는데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데기 끼리 서로 현대사 가르친다고 하는데 구데기에서 파리만 나올뿐이죠. 


중명전 모형도 있습니다


이게 복원 이전의 중명전이군요. 
중명전은 석조건물이지만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쓰이다가 1925년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983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됩니다. 


 

복원은 아주 잘 되어 있네요. 천장에 있는 전등도 옛것 그대로입니다


아! 이분이군요. 사바찐, 한국의 근대 건물들의 설계를 많이 했던 러시아인 사바찐, 덕수궁의 정관헌도 그렇고 서울과 인천지역에 그가 설계간 근대 건물이 꽤 많습니다. 이 사바찐은 대한제국에 고용되었던 분이네요. 이분에 대해서 참 관심이 많은데 자료가 많지 않아요.


고종의 옥새도 있는데 모조겠죠?



헤이그 특사를 보내서 대한제국의 강탈을 세계에 알렸지만 일제가 이걸 보고 고종을 아주 미워하다 못해 죽일려고 했을 것입니다. 고종의 독살설은 설로 되었지만 일제가 죽인 것은 정황상 명확합니다.  

이 고종의 죽음으로 인해 드디어 국민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느끼게 됩니다. 솔직히 을사늑약이니 한일 합방이니 서민들의 삶에는 당장 큰 변화가 없기에 뭐가 뭔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종의 죽음은 국민적인 충격이었고  백성들의 절규는 컸고 이후 큰 만세시위로 이어집니다.


중명전, 이곳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숨쉬는 곳입니다. 이곳을 허물지 않고 보존한 모습은 참 좋네요. 이런 아픈 역사도 가르쳐야 제대로된 역사관을 가지게 되죠. 하지만 가끔 보면 숨기고 싶은 역사는 흙으로 덮고  없던 것처럼 혹은 거론도 하지 않는 무리들이 아직도 세상엔 많네요

삶은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어야 삶이지 기쁨만 있으면 그건 정신병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사도 기분 좋은 역사와 부끄러운 역사 혹은 치욕적인 역사 모두를 가르쳐야 합니다.  잘난 역사는 우리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부끄러운 역사나 치욕적인 역사는 우리에게 반성의 성찰을 주기 때문입니다

종로 정동길을 걸으실 예정이라면 중명전 꼭 들려 보세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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