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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세상에대한 단소리

한국인의 강인한 생활력을 느끼게 해주는 남대문시장의 역사

by 썬도그 2012.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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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아티스티인 백남준은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남대문, 동대문시장에서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6.25동란과 군사독재, 부정부패, 산업화,재벌독점,환경오염에서도 두 시장은 살아 남았고 불이나 폭삭 주저 앉았나 싶더니 다음날 여지없이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남대문시장은 한국의 전통시장중 1호 시장이라고 할 만큼 규모면에서나 역사적으로나 전통시장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입니다.  위드블로그와 함께 전통시장 살리기 캠페인에 참여중인데  제가 맡은 남대문시장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 남대문 시장의 역사가 참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있는 자료들과 책을 뒤적이면서 옛 이야기를 찾아 봤습니다.



대동미를 관리하던 선혜청이 생기면서 시장이 형성되다


 

 
남대문시장은 역사가 무려 600년이나 된 시장으로 조선과 일제치하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 합친 역사와 비슷합니다.
태종 14년인 1414년 남대문 언덕의 도로 양편에 조정이 임대한 시전 형태로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장이 형성 된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인 1608년(선조 41년) 대동미, 대동포,대동전의 출납을 맡아보는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 되면서 부터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된 조선이고 처참한 나날이었지만 그럼에도 조선왕조는 세금을 쌀과 돈으로 걷었고 그 세금이 바로 대동미, 대동포, 대동전이었습니다.  이 대동미,포,전의 입출납을 관장했던 관청이 선혜청이었습니다. 남창동에 있던 선혜청은 남대문시장에 가면 퇴계로 쪽에 붙어 있는 4호선 회현역 5번출구 부근의 악세사리 상가 쪽에 있었습니다.

삼남지방에서 온 특산물과 쌀등의 곡식들이 마포나루를 통해서 선혜청에 도착했고 이 특산물과 함께 팔도의 상인들도 함께 흘러 들어와 자연스럽게 저작거리가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고종때 인천항의 개항과 함께 일본상인과 청나라 상인이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남대문 근처에 있는 수표교나 명동지역과 남대문 등지에 자리를 잡고 수입 직물, 잡화, 피혁, 모피등을 판매했는데 조선 상인들과 마찰이 심했습니다. 여기에  남산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일본 상인들이 진고개와 남산지역에서 조금씩 내려와서 칠패 시장으로 접근합니다.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칠패시장은 서울역인 남대문 밖의 시장이었는데 칠패와 남대문 안쪽의 시장들과 함쳐지면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죠.


조선 후기에는 남대문 안팎으로 2개의 대형 시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대문로의 시전행랑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남문내 장시'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남대문 밖에 있던 서울역까지 아우렀던 '칠패'가 있었습니다.  이 두 시장은 1896~1897년 남대문로 정비사업으로 인해 모두 선혜청 안으로 옮겨져 재편되었습니다.

이후 남대문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남문내 장시'는 매일 새벽시장이 열려서 채소,어육등 신선제품들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새벽 일찍 일어나야 싱싱한 채소와 고기와 생선을 살 수 있었고 게으름을 피우면 좌판이나 행상이 아닌 점포에서 신선제품을 사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찍 일어난 새가 가장 싱싱한 먹이를 먹는다는게 헛말이 아니네요

남대문시장은 일제치하가 되기 전 까지는 일본상인들의 끊임없는 도발을 막아냈지만 일제강점기가 된후 1921년 3월 친일파인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서 장안의 중소 유통기능을 담당케 합니다.  미곡 잡화, 과실등과 같은 곡물류가 주 거래 상품이었는데 1922년 일본인 소유의 '중앙물산주식회사'로 경영권이 넘어갑니다. 

1936년 3월에는 남대문시장이라는 명칭도 사라지게 되고 중앙물산시장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이 터지죠. 현재의 남대문시장의 형성된것은 54년 2월 남대문주식회사가 설립되기 시작 부터죠.

뭐 요즘 남대문주식회사가 말이 많죠. 용역을 동원해서 가판대를 비싸게 팔고 노점상들에게 매일 돈을 뜯는다고 하는데요. 이 고질병은 수십년 째 고쳐지지 않네요. 서울시도 경찰도 방관하는 것 같은데요. 어떤 대책이 나왔으면 하네요


50,60년대 서울 최대 청과물 시장이었던 남대문시장

저도 몰랐는데 남대문시장이 옷가게나 수입상가가 있는 곳이 아니였네요. 지금은 약간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50,60년대는 
청과물시장으로 유명했고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서울 인근의 경기도의 상인들이 줄을 서서 청과물을 사갈 정도로 대규모 청과상가가 있었습니다. 이 청과물 시장은 구한말 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6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공성,유방,남일,우신등의 대형 청과물 상가등이 있었는데 용산과 청량리 쪽으로 청과물시장들이 이동하게 됩니다. 남대문시장이 솔직히 지금도 교통이 썩 좋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교통이란 저 같은 소비자가 아닌 대형트럭으로 물건을 싣고 지방으로 가는 소매업자나 지방 도매업자들이 주차를 해놓고 물건을 싣고 옮기기가 힘들죠.

용산 청과물시장은 저도 기억합니다. 80년대 엄마 허리까지 오는 키였던 저는 용산 청과물시장에서 배추,무 같은 청과물을 사러 갔는데 그때 홍수가 나서 용산 청과물시장이 물에 잡깁니다. 그 어린나이에 수박이 둥둥 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 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청과물시장 자리에 전자랜드가 들어섰지만요

용산에 있던 청과물시장은 다시 강남의 가락시장으로 옮겨갔고 이명박 대통령이 추운 겨울에 노점을 하는 할머니를 안아주기도 했죠.

60년대 남대문시장은 청과물시장과 함께 또 하나의 주력종목이 있었는데 바로 현재에도 남대문 하면 생각나는 봉제시장이 있었습니다. 대도마키트는 동대문 평화시장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패션상가였습니다.  동대문과 달리 대중용 옷을 많이 선보였는데요. 현재는 동대문에 좀 패션상가들이 밀려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남대문시장은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나까마 상인들이 보따리로 들고 온 불법 외국수입물의 해방구 도깨비시장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까마'라고 하기에 뭔 소리인가 했습니다. 그 놈 나까마야.   나까마?? 뭔 소리지
나중에 알았는데  나까마는 보따리 장수를 말합니다. 외국제품을 보따리로 불법드로 들여오는 수입업자를 나까마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FTA다 뭐다 해서 외국물건 중 수입이 안되는게 없고 수출 못할 것이 없는 자유무역의 신봉자인 한국이었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한국은 철저한 보호무역 국가였습니다. 한국 제품은 외국에 수출하기 쉬웠지만 외국물건은 철저하게 수입을 금지 했고  좀 못나고 질과 성능이 꼬져도 국산을 쓰라고 국가가 강요 했습니다.

그래서 성장한 기업이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아닙니까? 이 대기업들이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산장려운동과 국가의 보은이 컸고 가장 큰 도움을 준게 국민들입니다.  우리 제품이 해외에 나가서도 잘 팔리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죠. 지금은 덜 하지만 나까마가 사가지고 들어온 일제 미니카세트인  소니의 워크맨이나 아이와 같은 제품을 쓰면 몇몇 민족성이 뛰어난 학우가 분기탱천해서  매국노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신문들은 어떤 탤런트나 영화배우가 외제차 탄다더라 하면서 고자질을 하면 국민들은 벌때 같이 일어나 국산자동차 타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었습니다.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건만  현대자동차나 삼성 LG전자 보세요. 외국에서는 같은 제품을 싸게 팔면서 국내에서는 비싸게 팔잖아요. 뭐 단순 비교하긴 힘들고 그들의 항변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국민들이 그 어려웠던 시절 그렇게 도와준 것을 안다면 좀 더 싼 가격에 제품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현대자동차가 아주 심합니다.

딴소리만 했네요. 각설하고

나까마들은 일본, 미국등 외국 제품들을 몰래 밀수해서 들여왔는데 지금은 니콘과 캐논이 정식 한국지사를 세워서 직접 판매를 하지만 9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한국에 지사가 없었습니다. 니콘은 아남으로 캐논은 LG상사 쪽으로 판매를 했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쌌습니다. 관세가 엄청 붙나 봅니다. 

지금도 병행수입제품이라고 해서 정식수입제품이 아닌 일본 제품을 보따리에 싸서 들여오는 나까마 제품 가격이 정식수입품보다 싸죠.  96년 알바에서 처음으로 산 카메라가 바로

 
캐논 EOS 1000QD입니다. 당시 중고렌즈까지 해서 40만원 정도에 산 기억이 나는데 별로 쓰지 못하고 지금은 봉인상태에 있네요. 이 제품을 남대문시장 억불카메라에서 샀습니다. 억불카메라는 다음 포스트에 소개를 자세히 하죠

이렇게 불법으로 수입한 외국 물건들을 좌판을 깔고 판매하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장이 도깨비 시장입니다.
불법이기에 눈치를 많이 보는 시장이었고 단속이 뜨면 사라지는 시장입니다.  모든 불법 시장이 그렇듯 빠르게 열렸다가 빠르게 사라집니다. 이 도깨비 시장은 남대문의 대표적인 문화중 하나였는데 50,60년대는 용산 미8군기지에서 흘러나온 PX물건들이 순식간에 풀렸다가 순식간에 팔려 나가곤 했습니다.  대동상가뒤에 PX물품을 파는 곳이 많았죠

뭐 알몸으로 들어갔다가 완전군장하고 나온다는 곳이 남대문시장이었습니다.


70,80년대 원아동복, 부르뎅등 아동복의 메카가 된 남대문시장

 


부르뎅 골덴바지 하나 입는게 자랑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70년대 아동기를 지낸 분들이라면 부르뎅이나 원아동복 선전을 
보면서 자랐죠. 봉제시장과 청과물시장이 두 축이었던 남대문시장은 청과물시장이 청량리와 용산으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거리가 됩니다.  그중에서도 다른 시장과 차별화 된 것이 있는데 바로 아동복시장입니다.

부르뎅, 원아동복, 크레용, 포키, 마마, 포핀스등 다양한 아동복 메이커가 등장하면서 아동복 시장의 메카가 됩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여전히 아동복시장은 건재하고 있죠. 다만 1999년 원아동복이 문을 닫게 되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여전히 간판이 있네요.  다시 부활한 듯 합니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비싼 옷 입힐 필요 있나요, 메이커 입히는거 다 부모님들 허세죠. 아이는 그 메이커의 의미도 모르는데요. 
그런면에서 남대문에서 싸고 질 좋은 아동복 사는 부모님들이 실속파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남대문시장을 처음 가게 된것은 80년대 였습니다. 고등학교때로 기억되는데 그냥 여기저기 친구랑 돌아다니다가 남대문 시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랐습니다.

골라골라하는 남대문에서 들을 수 있는 흥겨운 소리가 마치 꽹과리 소리 처럼 경쾌 했습니다.
더 페이스샵의 정운호 사장이 이 골라골라를 리어커 위에서 외치던 열혈 청년이었습니다.  

'골라 골라 미스김도 골라'  이번에 찾아가니 그 추임새는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예전 그 복잡함은 여전하더군요
70년대 전국 기성복의 50%의 물량을 유통했던 남대문시장. 이때가 남대문시장의 절정기가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68년 77년 대형 화재로 무너져 내린 남대문시장,  강인한 생명력으로 되살아 나다



80년대 어린시절에 아침에 일어나면 매주 듣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밤새 연탄가스 중독으로 몇명이 죽었다는 소리와
밤사이에 어디서 불이 났다는 화재뉴스, 지금은 그런 뉴스를 거의 듣기 힘들지만 80년대는 매일 듣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화재가 많이 나는 이유는 화재예방문화가 없었던 것도 큰 역활을 했죠

특히 전통시장의 낡은 배선들과 어지럽게 쌓아 올린 재화들, 거기에 불에 잘 붙는 재질들은 한번 났다하면 대형화재가 됩니다. 작년에 동대문시장에 갔다가 화재를 목격했는데 큰 불은 아니였지만 한참을 진화 하더군요.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봉제상가가 많아서 한번 불이 나면 대형으로 이어집니다.

남대문시장도 두번의 대형화재가 있었습니다. 68년 대형화재와 77년 대형화재가 있었는데 75년 96년등 남대문시장 화재는 정말 많았습니다. 지금은 방화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남대문시장에서 화재소식을 들을 수 없네요. 

 
남대문시장 화재는 신문 4컷만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요
화재에 대한 공포는 모든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있을 것 입니다.

68년 남대문 대형화재때는 불도저라는 별명이 있었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불난 상가를 허물고 그 자리에 지상 25층 지하 3층의 대형 건물을 지어서 대형 주차장도 만들겠다고 했는데  세운상가를 만드는데 온 신경을 썼는지 골조 공사만 살짝 하다가 그대로 멈추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그 골조 공사를 하다만 흔적이 있다고 하네요
25층짜리 건물이 올라갔다면 어땠을까요?  전 시장은 낮은 건물들이 시장의 매력이지 대형 빌딩이 시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 높은 빌딩은 시장이 아닌 사무직을 위한 업무의 장소이지 시장과는 어울리지 않죠. 만든다고 해도 지금같이 10층 이하의 건물이면 몰라도 25층은 무모한 높이죠.  누가 25층까지 물건을 오르내리고 하겠어요

당시는 고속승강기도 없었을텐데요. 세운상가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한 듯 한데 천만 다행입니다. 어디를 가나 토건 신봉자들이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형화재가 난 68년 광장시장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조세저항 시위를 했다고 하는데요.  대형화재로 시름에 빠져있던 상인들에게는 세금이 큰 고통이었나 봅니다.

세금감면이나 1,2년 정도는 세금을 내지 않도록 정부가 배려해야 하는데
그런것 신경도 안쓰고 그냥 내라고 했나 보네요. 뭐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조세저항이 있었다는 자체가 세금을 내라고 했기에 시위까지 했던 것 아닐까요?









2천년대 마트시대 이후 쇠락해 가는 남대문시장, 다양성으로 승부해야 한다



 남대문극장을 봤습니다. 80년대 동시상영관이 붐이였던 시절 종로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남대문시장 포스터가 보이곤 했죠.  지금은 영업을 안하는 것으로 아는데 저기서 동시상영 영화 많이들 봤을 것 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동시상영 영화도 했지만 상당히 에로스러운 성인영화도 상영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마져도 찾는 사람이 없게 되었네요

남대문시장은 93년도 당시만 해도 하루 50만명의 유동인구와 하루 매출액이 300억이기도 했습니다. 
전국 시장중에서 가장 큰 규모죠. 하지만 2002년 이후 매출이 30%나 하락합니다. 그 이유는 마트 때문입니다.

작년 11월에 동대문 장난감 도매상가를 갔는데 그 가게 주인분이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봤는데 소비자들이 많이 찾아오지만 소비자 보다는 지방 도매,소매상인들이 많이 와야 하는데 오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 이유는 지방에도 마트들이 빼곡하게 있어서 장난감 사러 지방 장난감가게가 가지 않고 마트가서 장난감을 산다고 하네요

이렇게 마트는 싼 가격과 편리성과 주차장을 무기로 기존 전통시장을 무너트리고 있고 지방의 전통시장들이 무너지면서 그 전통시장에 물건을 공급하던 대형 전통시장인 남대문시장도 힘에 부치게 됩니다.

지방 상인들이 더 이상 남대문을 찾지 않게 되니 남대문상인들도 울상이 되죠. 그래도 아직까지는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다양한 제품과 상품, 싼 가격이 매력적인 시장입니다.  


안경, 악세사리, 여성,남성복, 가방, 장난감,먹자골목, 문구,수입물건, 꽃상가,그릇상가,카메라 상가 등이 있고 러시아,중국,일본 상인이나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죠. 

물론 동대문시장과의 경쟁도 있고 마트와의 길고 외로운 싸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대문만이 가진 문화와 매력을 발견하고 마트와 동대문이 가질 수 없는 장점을 키워간다면 예전 명성에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항상 활기찬 표정을 할 수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백남준이 말했듯 강인한 생명력이 남대문시장의 힘이고 한국인의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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