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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예스24블로그축제] 창문 너머의 슬픈 사랑을 담은 8월의 크리스마스

by 썬도그 2011.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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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기다렸어요"
"저 이거 빨리 해야 하거든요. 얼마나 걸려요 아저씨"
"저 미안하지만 조금만 있다 오면 안될까요?"
"안돼요 아저씨 여기 동그라미 쳐진 부분만 빨리 확대해 주세요"

정원은 막 장례식장에서 녹초가 되어 왔는데 주차단속원인 다림은 그 사정을 모르고 재촉을 합니다.
둘은 이렇게 첫 만남을 시작합니다.   약을 먹은 후 정원은 짜증스런 표정이 미안했는지   사진관 앞 나무밑에서 서성이는 다림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냅니다

98년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가끔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 다시 보곤 합니다. 
마치 내 유년시절의 까까머리의 그 사진 앨범을 넘길때의 흐르는 미소와 닮았네요.

이 영화가 내 영혼에 지문처럼 남겨진것은 정원와 다림의 시리드록 슬프고 순수하고 맑은 수채화 같은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정원은 서울 변두리에서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자그마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아주 순박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불치병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삽니다.  정원은 그런 죽음의 공포를 애써 외면하는건지 아님 초월하는 건지  그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전혀 없습니다.  병원복도에서 만난 꼬마아이와 장난을 치며  화낼만도 한데 모든 짜증을 다 참고  허허 너털웃음으로
넘기는 순수청년이죠. 그렇다고  성직자 같이 모든 것을 참는 청년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TV리모콘 조작을 잘 하지 못하자 버럭 화를 내기도 합니다.


다림은 주차단속원입니다. 우연으로 가장한 필연으로 다림은 정원이 운영하는 초원사진관에 주차단속 후에 사진을 맡기러 옵니다.  둘은 업무때문에 만나기 시작했지만 그 만남은 자연스럽게 호감으로 전이됩니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면서  호감 이상의 감정을 싹틔웁니다.  그러나  둘사이에는 큰 벽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벽이 있고 그걸 잘 아는 정원은  자꾸 머뭇머뭇거리게 됩니다. 

주차단속 도중 한바탕한 다림이 안식처인 초원사진관에 들어오자  자신의 신세한탄을 합니다. 고급카메라를 쓰면 자신을 무시 못할것이라면서 주차단속원이라는 신분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리고 아주 소박한 첫데이트이인 스쿠터데이트가 있고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 집니다.
 
정원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영화와 달리 모든 것을 안으로 삮힙니다.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 비슷한 시한부 인생을 소재로한  '편지'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두 영화는 참 많이 비교되었습니다.  영화 '편지'는 대놓고  시한부 인생이라는 아주 자극적인 최루성 소재를 적극 활용합니다.  하지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정원의 시한부 인생을 가지고 관객에게  이래도 안울어? 라고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그저 담담히 무정하게  정원의 사그라듬을 담습니다. 정원이 쓰러지고 병원에 업혀가는 장면 이후에도 무표정하고 삶을 달관한듯한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이런 정원의 사정을 모른채 다림은 정원의 순박하고 순수하고 친절함과 다정다감함에 빠져들고 아무도 찾는 이 없는 호수가에 물을 마시러 온 사슴같은 다림에게 정원은 서서히 빠져들게 됩니다.

 
"나 오늘 죽는다" 
정원은 농담처럼  친구 철구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비밀을 말합니다.  하지만 술 먹고 죽자는 말로 들어버리죠.
"내가 왜 조용히 해" 정원은 자신의 슬픔의 강을 경찰서에서 터트립니다.  
조용히 하라고 경찰관이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을 듣고 광분을 하게 됩니다.

정원의 속내가 유일하게 들어난 장면이기도 하죠.  

 " 나 들어가도 돼요?"  

 다림은 경찰서에서 한바탕한 다음날 주차단속원복을 벗고 사복으로 초원사진관에 들립니다.  이제 둘의 사랑은 
업무상이 아닌 사적인 영역으로 확대됩니다.

나 들어가도 돼요? 라는 말은 사랑해도 될까요? 라는 말로 치환될 수도 있습니다.
이 '8월의 크리스마스'는 창이 참 많이 나옵니다.   다림이  정원에게 다가갈때도 창밖에서  미소를 가득 머금고 예의 바르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원의 사랑은  창 밖의 다림에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정원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음을 깨닫고 더 이상 다림에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창밖에서 주차 단속을 하는 다림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답지만 그 창 너머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정원이 넘어야 할 창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다림도 정원의 창 너머로 넘어 갈 수 없음에 분노하며  돌맹이로 초원사진관의 유리창을 깨버립니다.  
다림의 정원으로 향하는 사랑에 대한 대답이 없음에 화가 났고  그 화가남은  정원이 병원에서 쓰러져 있는 동안 빈 초원사진관 유리창을 부셔트립니다.

결국 이 둘은  그 창을 넘어서지 못한채 끝이 납니다. 
또한 둘은 서로가 사랑하고 있다는 어떠한 징표조차 받지 못한채 알지 못한채 끝이 납니다. 어떻게 보면 둘다 서로를 짝사랑하다가  끝이 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사랑을 하는 이유는 바로 정원의 죽음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정원은  새로운 사랑을 하기 거북스러워 했고  만약 한다고 해도 다림에게 큰 상처를 줄것 같아서 죽음 처럼 사랑도 가슴속에 깊이 묻어버립니다.
마치 현상만 되고 인화가 안된 사진처럼  둘은 현상만 마치고  사랑이 끝이 납니다.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정원은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서 정원은 사랑도 추억일 뿐이라며 나즈막히 읇조립니다. 



 사진같이 영원히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난 정원

제가 사진을 좋아하다 보니 '8월의 크리스마스'속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 봤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면 갖은 폼과 세상에서 가장 기쁜 표정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웃지 않으면  왜 웃지 않느냐며 타박을 하면서 까지 웃는 표정이 사진의 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찍자는 말은  파티하자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행복할때 카메라로 그 순간을 영원으로 연장시킵니다.

하지만 사진이 기쁠때만 찍는게 아닙니다.  죽기전에 죽음을 기록하듯  우리는 영정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가장 슬픈 사진이 영정사진이 아닐까요? 더구나 죽을 날을 생각하며 찍는 영정사진은 더 슬프죠.  할머니는  초원사진관 문을 살짝 열고 들어 옵니. 낮에 식구들과 가족사진을 찍은 후 혼자 오셔서  수줍게 영정사진을 찍습니다.  

정원은 평소때 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영정사진보다 더 슬픈  정원이 스스로의 영정사진을 찍습니다.  이 장면에서 전 한참을 멍하게 있었습니다. 정말 이렇게도 영화가 나를 슬프게도 하는구나 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정원처럼 속으로 울었죠.

 


" 내 기억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 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정원은 그렇게 쓸쓸하게 추억이 되지 않는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랑에게 사랑한다는 대신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해 겨울 다림은 초원사진관 앞에 섭니다. 그리고 정원이 찍어준 자신의 사진이 쇼윈도우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다림은  정원이 자신을 어렴풋이 사랑했었음을 뒤늦게 와서 확인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멱살잡이식 최루성 영화는 아닙니다. 눈물은 눈가에 흐르는게 아닌 가슴속에서 흐르고 그 눈물은 이 영화를 본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흐릅니다.  삶에 대한 관조적인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던 영화입니다.  심은하를 발연기 배우에서 연기력을 인정 받게 되는 도약이 된 영화이고  한석규라는 배우의 재발견을 하게 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기전에는  죽음이란 추하고 더럽고 무섭고 외면해야할 존재로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이고  죽음이라는 마침이 있어야 삶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한참동안  죽음, 내 존재의 부재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었고 그런 감정의 폭풍은 98년 내내 제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진리를 알게 해준 영화.  정원과 다림의 순진하면서 순수하고 맑은 이야기 때문에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수 많은 영화 트랙에서  성큼 집어 올렸습니다. 

소설 '소나기'와 같은 감수성의 스펙트럼이 장대한 영화입니다.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그 고귀함은 세월의 더깨와 함께 깊어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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