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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세상에 대한 쓴소리

자전거를 타고 간 xx고등학교

by 썬도그 201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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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있죠.  리즈 유나이티드가 90년대까지만 해도 프리미엄 리그 4강안에 들었지만 지금은 3부리그와 2부리그를 왔다갔다 하는 팀이 되었습니다.  리즈시절이란 말은  쉽게 말하면 잘나갈때라고 보시면 됩니다

직역이 아닌 의역을 하자면  '소싯적'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xx고등학교가 소싯적에는 명문학교였습니다.  지금의 50,60대 이상 분들에게는 잘나가던 명문학교였다고 입학하자 마자 들었습니다.

전 그런 말이 젤 싫어요. 큰 저를 보고 외삼촌이 어렸을 때는 참 예뻤는데~~ 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아! 어쩌라고요.  어렸을 때 예뻤는데 지금은 아니다?  생긴게 내맘대로 되는것도 아니고 내 기억에도 없는 어리시절을 끄집어 내면서 비교하는 그 말은 정말 앞에 듣는 조카 기분 상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xx 고등학교가  xx 시보다 더 유명했던 시절을 좔좔좔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리즈시절 다 지나고 쓰려져가는 건물 그것도 88년도임에도 아직도 퍼세식 화장실이 있는 학교를 다니는 재학생들은 참 맥빠지게 하는 소리들 합니다.

그렇게 소싯적 이야기를 귀에 딱정이가 질 정도로 들었습니다.
과거 잘나가던 시절을 얘기하면 뭐합니까?  현재가 중요한거죠. 그런 말들을 
xx 고등학교 출신의 선생님들이 할때마다 짜증이 났습니다. 제자들이자 후배들인 우리에게 열패감을 심어줄려고 작정을 한건지. 하여튼 선생님들도 말을 할때 그 말을 듣는 학생들이 입장도 생각해 주셨으면 하네요

전 
xx 에 없고 서울시 대방동에 있는  xx 고등학교에 나왔습니다.
이런 열패감은 입학하자마자 모든학생에게 퍼졌습니다.  성보고등학교의 시설을 귀동냥으로 들을때면 불끈 화가 나기도 했죠.

수세식도 아닌 무슨 빗물받이 경통과 같은 곳에 오줌을 친구들과 싸면서 느낀 절망스러운 모습에 한숨만 나왔습니다. 그 
xx 고등학교를  자전거로 타고 가봤습니다.


택시기사에게  xx 고등학교 가자고 했더니 경기도  xx 시로 달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xx 고등학교를 모르는 분들은  xx 시에 있는 남자고등학교로 알고 계실것 입니다. 실제로  xx 여고가  xx 시에 있는데  xx 고와  xx 여고가 바로 옆에 있는줄 아시는분이 많죠

하지만 
xx 고등학교는 동작구 대방동에 있고  xx 시가 생기기전부터 있던 학교이고 올해로 개교 75년이 된 역사가 오래된 학교입니다.  이  xx 고등학교는 대방동에 있는데  여의도가 가깝다는 이유로 많은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잘 안나오는데 80년대만해도  '한지붕 세가족',  '사랑이 꽃피는 나무'등을 여기서 촬영했습니다. 가끔 야간자율이라고 말하고 타율이라고 읽는 야간타율학습 시간에 사랑이 꽃피는 나무 촬영이 있으면 이미연 볼려고 몰려 나갔던 기억이 나네요

이미연의 인기란 지금의 김태희 인기를 넘어설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이 언덕길을 순돌이 아빠가 올라오던 장면들이 생각나네요
xx 고등학교는 이 언덕 제일 끝에 있습니다.



학교를 가는 골목은 그대로이지만 집들은 달라졌네요. 예전에는 주택들이 있었는데 이젠 연립주택, 혹은 다세대 주택이 되었네요.   xx 고등학교를 다시 찾은건 약 5년만의 일입니다




교문에 김어준의 나를 만든 첫경험이라는 플랜카드가 있네요.
딴지일보는 막 전국에  ADSL이 깔리던 시절 인터넷의 한 문화코드로써  엽기라는 유행어를 만든 싸이트이죠. 그 딴지일보를 만든 사람이 김어준입니다.  똥꼬털 휘날리며~~~ 식으로 엽기적인 표현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죠 저 또한 모뎀소리 지글거리면서  그 딴지일보 읽어 보겠다고   어머니에게 욕 먹으면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김어준은 말을 참 잘합니다. 직설적이고 정확하고 뛰어난 대중친화적인 어휘력과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은 개그버젼 박경철이 아닐까 할정도로 참 재미있고 박학다식한 분이기도 합니다. 요즘 2시의 데이트에서 연애와 국제정치를 하는데 완죤 좋습니다.  이 김어준이 
xx 고등학교에서 며칠 전에  강의를 했군요

멋진데요. 




xx 고등학교는 시설이 너무 낡았었습니다.  88년 당시에는  제 3공화국인가를 MBC에서 했는데  드라마 촬영을  xx 고등학교에서 했습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라서 그런지 드라마세트장 역활까지 했습니다. 

그 모습에 친구들과 개탄을 했죠. 얼마나 시설이 낡았으면  60년대 배경의 드마라를 학교에서 찍냐하고 개탄을 했죠.
하지만 
xx 고등학교는 대신에 넓은 운동장과 거대한 나무들이 사람마음을 포근하게 해줍니다.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가 절 반겨주네요.  저 나무 밑에서  옆반하고 농구시합, 축구시합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4.19 이전에 3.17의거가 있었습니다. 3.17의거? 이거 잘 모르실거예요. 이승만정권이 부정선거를 한 3.15선거 후 이틀뒤에  xx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를 합니다.

지금은 대학생들도 시위 거의 안하고 해도 자신들과 관련된 등록금시위정도만 하지만 이 60년대 고등학생들을 달랐습니다. 선거권도 없는 고등학생이 사회의 불의를 보고 일어나서 항의시위를 했습니다. 이 3.17 의거가 있고 한달뒤에 4.19 학생운동이 일어납니다.  
xx 고등학교의 자란스러운 역사죠.  저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xx 고등학교는 허물이 많은 학교이기도 합니다.
먼저 이 
xx 고등학교 설립자를 살펴보겠습니다.

xx 고등학교는 1938년 원윤수, 김석원 두 설립자가 만든 학교입니다. 
김석원은 아시는 분은 잘 아실것입니다.  야인시대에도 잠깐 나왔고  영화 포화속으로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학도병을 모우고 지휘했던 분이기도 하고요. 



김석원은 김석원장군이라고 완성되는 분입니다. 카이저 수염과 철모가 어울리는 분이기도 합니다. 
일제시대 일본 육사를 나와 중일전쟁때 엄청난 전투 전과를 거둡니다.  김석원 장군이 일본도를 꺼내들고 돌격! 앞으로 하면 중국군과 만주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죠.  전형적인 돌격부대 스타일이었습니다.  김석원의 일본 이름은 가네야마입니다.
일본 엘리트코스로 일본군을 지휘하면서 큰 공을 많이 세웁니다. 장개석이 알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심지어 공을 세웠다고 일본군에서 돈을 받기도 합니다.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학병강제동원령을 설파하면서 조선인들에게 일본강제징용에 지원하라고 연설과 강연을 많이 합니다. 이런 이유로 김석원장군은 친일파99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분입니다.   그리고 해방이 됩니다.

북한은 모르겠지만 한국은 친일파에 대해서 아주 너그러웠습니다. 이승만정권은 일제시대때 권력을 잡았던 일제 앞잡이들을 다시 군과 경찰과 행정부서에 재배치하죠. 미국이 한국의 역사공부를 조금만 했다면 결코 일제시대에 동족을 팔아먹었던 친일파들을 단지 경험자라고 우대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승만정권과 함께 친일파들을 재기용하죠

여기서부터 한국의 친일파 청산은 물건너갔고 지금도 친일세력들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습니다.
친일파청산하자고 하면 특정정당의 특정 대권후보가 나서서 반대하죠.  왜! 하필 지금이냐~~~~

김석원장군은 해방 후 자숙의 시간을 가지다가  이승만의 권유로 다시 육군소장이 됩니다. 친일파이긴 하지만 그의 군인으로써의 능력은 대단했고 한국전쟁때도 그의 활약담은 아주 유명합니다. 적의 포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카이저 수염 휘날리면서 긴칼을 뽑아서  뛰어난 병술로 북한군을 물리치거나 격퇴시켰습니다

김석원이 아무리 뛰어난 전과를 한국전쟁때 세웠다고 해도 그의 과거까지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일본군 앞잡이였고 
일본군으로 부터 훈장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인터넷에 보면 김석원을 찬양하는 글과 비판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참고해보셨으면 하네요


xx 중고등학교 설립에 대한 내용을 보니  두가지 의견이 있네요. 하나는 민족정기와 조선민족의 무지와 몽매를 척결하기 위함이라고 한 의견이 있고  또 하나는 무관학교를 세울려고 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게 정확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열렬한 일본군 활약과  일본군에 입대하라는 연설을 하고 다닌것으로 봐서는  
xx 중고등학교도 무관학교로 만들어서 일본군 양성소로 만들려고 한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광수나 홍난파, 안익태등 조선의 지식인들이  일제시대가 영원할 줄 알고 일제 말기에 전향들을 많이 하는데
김석원장군도 일제시대가 영원할 것으로 생각한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후  많은 친일파 지식인들이 속죄하게 됩니다.  

김석원은 친일행적이 명명백백한 사람이지만 장군으로써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런 이유로 한국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합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이순신이고 그런 이유로 
xx 중고등학교의  교훈이 '의에 살고 의에 죽자'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합니다. 

흥미롭게도  3.17 부정선거에 대한 
xx 고등학생 4백명이 호크교복 입고 용산에서 경찰과 맞짱을 뜰때도 김석원 장군이 진두지휘 했었습니다. 이승만정권의 비리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면 의를 아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도 한데 갈팡질팡하네요.
자신만의 소신이 강한 분인듯 합니다. 


xx고등학교는 몇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국내 최초로 교련을 실시한 학교이기도 합니다. 설립자가 장군인 덕에  매주 월요일 아침 넓다란 운동장에 모여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습니다.  또한 매년 효창공원과 국립묘지인 국립 현충원에 가고요. 물론 저도 효창공원에 갔었습니다. 또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지요.  진정성이요? 그딴거 없었죠. 가뜩이나 잠이 모자른데 순국선열의 묵념을 하면서 졸았습니다.  

게다가 교련은 얼마나 빡세게 하는지 제가 군대가서 느낀게  어떻게 고등학교때 배운 제식훈련보다 못하냐 였습니다. 
공군이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고 해도 
xx 고등학교때 배운 제식훈련보다 못하다고 느꼈는데 그만큼  xx 고등학교 시절 교련시간은 빡셌습니다.  이런 군사적인 모습이 많이 남은 이유인지는 모르나 육사, 해사, 공사에 매년 입학하는 학생들도 많았고 현재  xx 고 출신의 육해공 장성들이 아주 많습니다.

김석원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재학생 당시에도 참 말이 많았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친일파라는 소리가 많았지만 어느 하나 당당하게 선생님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친일파라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었죠. 전 친일파라는 사람이 들어간 교가를 부를때면  손발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원석두님~~~ 하는 부분에서는 마치 김일성 찬양가 같다고 할까요?

위 가사보면 원석두님 대신에 김일성이나 김정일 넣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물론 김석원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크게 다르고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분명 잘한 점도 있고 못한 점도 많은 분이죠.  잘한 점은 칭찬받고 못한 점은 욕을 먹어야겠죠. 따로따로 생각을 해야 하는데 워낙 이분이  과오도 크고 업적도 크고해서 평가가 많이 엇갈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전 친일행적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문을 들어서면 살아생전에 만든 김석원과 원윤수 두 설립자의 흉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3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교문앞에서 시위를 하고  mbc보도에도 나오면서  동상은 다른곳으로 옮겨집니다.

2003년 경 야근을 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xx 고등학교와 인천의 모 고등학교가 나오는데 친일파가 세운 학교! 라는 자막이 나오더군요. 그런 학교를 다니는 제가 뭔 죄를 진것처럼 느껴지더군요.  xx 고등학교를 다닌 학생이 뭔 죄가 있겠어요. 어차피 뺑뺑이로 근거리 학교에 배치된 것 뿐이죠. 그래도 친일파 학교라는 주홍글씨는 여간 달갑지 않네요.

 

개교 75년이 된  xx 고등학교,   건물은 두동이었습니다. 앞동은 수년전에  새로 지어졌습니다.
원래는 하얀색 2층짜리 일본식 건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하얀색 2층짜리 건물이 기억나네요.  학교 시설은 꼬졌지만 추억만은 꼬지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이문세의 소녀와 사랑이 지나가면을 같이 부르면서  칠판에 낙서하면서 장난치고 놀던 그 친구들이 생각나네요.




원석두님의 동상은 이 철문 뒤로 옮겨졌다고 하더군요. 
옮겼다는 것은 친일파라는 지적에 대한 댓글이겠죠.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교가도 좀 바꿨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김석원이라는 사람이 대단한 업적,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저런 찬양가는 좀 그렇지 않나요. 왜 뺑뺑이로 들어간 학교에 들어가서  왜 설립자를 찬양해야 합니까?   
xx 고등학교에 공짜로 다녔으면 찬양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이런 내부비판은 없는지 지금도 원석두님~~~ 이라고 외치네요. 전 교가 1학년때만 조금 부르고 2,3학년때는 립싱크를 했습니다. 부르기도 싫고 해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나중에는 따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xx 고등학교는 오래된 나무들이 참 많습니다. 교문앞에 이 나무들이 명품이죠. 거대한 그늘을 만드는데 저 그늘이 얼마나 시원했는데요




뒷건물은 4층짜리 건물이고  제가 다녔을 88년도랑 똑같은 건물이네요.  저 건물도 시설은 좋지 않았죠.  뭐 어쩌겠어요. 학교가 돈이 없으니 새로 건물 짓지도 못하고요.




본관과 후관 사이에는 큰 굴뚝이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굴뚝을 보면서 유사시에는 미사일 사일로가 되어 미사일이 발사된다는 등 전혀 쓸모 없어 보이는 굴뚝이 큰게 있었죠.  소각장용이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자리에 최신식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멀티미디어 학습관인가 뭔가 하는 건물들이 각 초중고등학교에 많이 생겼습니다. 다양한 멀티미디어기기와 컴퓨터실을 늘리고 교실등을 넣어서 만든 건물인데 이 건물들은 교육청에서 예산으로 내려보내줘서 만드는 건물들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학교들이 이런 최신식 건물들을 하나씩 품고 있죠.

본전생각난다고 하나요?  우리때는 서무실(지금은 행정실이라고 하죠)에 286컴퓨터 한대 있었는데 ㅋㅋ


후관 건물 뒤에는 작은 운동장이 있었습니다. 
xx고등학교의 최고의 매력은 넓다란 운동장입니다. 다른학교의 두배나 넓은 운동장이 있죠. 하나는 야구부가 쓰기에 거의 사용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운동장 참 넓었습니다. 뭐  xx중학교와 고등학생들이 운동장을 함께 사용하면 그나마도 좁고 짜증나면 고등학생들이 중학생에게 괜한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참 넓디 넓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소 운동장 같은 짜투리땅도 많았고요.

여기서 짬뽕등의 간이 야구를 많이 했었습니다.  한번은 테니스공을 나무배트로 쳐서 4층 건물 너머로 날려먹고 테니스공 주인에게 머리숙인적도 있네요.  
xx고등학교는 운동부가 참 유명합니다.

야구부, 검도부, 유도부,   야구부 이전에는 축구부가 있었습니다. 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의 박종환 감독이 한때는 
xx고등학교 축구부의 코치로 있었던 적이 있었고 축구도 꽤 잘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구로 전환하게 되죠.
이후 xx고등학교는 야구부를 이끌게 되는데  군산상고나  충암고, 광주일고, 선린상고에 비한다면 아주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닐때 약간의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죠.  

김도완이라고 기억되는 선배가 있던 시절 전국4강인가에 올라갔습니다.
또한 제 동기인 강병규가 있을때는 전국대회 결승까지 가기도 했고요. 야구부 이야기는 다시 하도록 하죠. 

유도부도 전국에서 날리기도 했지만 유도부보다는 검도부가 전국단위에서 놀았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xx고등학교 들어오면  강제적으로  유도와 검도 둘중에 하나를 해야 했습니다.  하기 싫어도 배워야 했고 전 유도를 배웠습니다.  유도복 사서 지금은 식당으로 변한 유도관에서 전방 후방 엎어치기등을 배웠죠. 

지금은 하나도 기억 안납니다. 차라리 검도를 배웠으면 했습니다. 지금은 다이어트할려고 배우는 분도 있을 정도로 인기인 검도를 공짜로 배운다는게 어딘데요.  그래서 죽도 들고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나중에는 죽검으로 시범 단체 군무를 펼치는데 참 멋졌습니다. 

검도, 유도 공통점이 있죠. 둘다 일본이 잘하고 우리의 국기 태권도처럼 일본의 국기이기도 합니다.
뭐 유도선생님은  첫날  유도가 한국것이라고 설파했지만 뿌리는 한국일지 몰라도 체계화 시킨것은 일본이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될지도 모르겠지만 김석원이라는 설립자가  일본군 장교출신이라서 강제적으로 학생들에게 유도나 검도를 배우게 한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뭐 심하지는 않았지만 xx고등학교 다니면서 가끔 군사학교를 다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일전의 포스트에서 말했지만 전 운동부 아주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런 편견을 깨는 친구를 고3때 만났습니다.
같은 반이지만 수업도 안들어오고 들어와도 껄렁거리기나 하는 유도부나 야구부와 달리 검도부인 그 친구는 저와 참 친했습니다.  먼저 다가왔고 절 많이 챙겨주고 하는 모습에  운동부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고 그 친구와 참 많이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나네요.




 책상 교체작업을 하고 있네요. 이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외부인력들이 각 교실의 책상을 교체하고 있었습니다.

 
이 건물이 바로 예전에 강당겸 유도장이었습니다.  
88년 당시에 학생들의 최대 불만은 퍼세식 화장실이 아니였습니다. 최대 불만은 강당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학교가 강당이 있었고 그 강당에서 운동도 하고 행사도 하곤 하잖아요. 그런데  땅만 우라지게 넓고(?) 강당하나 없는 xx고등학교에 대한 열패감이 아주 컸습니다.  뭐 이 유도장이 강당역활을 하긴 했지만 아주 초라했죠

이런 이유로 당시에 전국의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학예회를 했었던  모 프로그램이 xx고등학교에는 안왔던것으로 기억됩니다. 여의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쩝.. 여건이 안되니 어쩔 수 없었죠.

xx고등학교는 야구부말고 또 유명한게 있는데 xx방송제였습니다.
고등학교축제의 하이라이트였죠. 지금도 방송제 같은것 하나요?  제 친구가 방송반이었는데  매일 맞고 살았습니다.
방송반 군기가 엄청나서  수업끝나면 방송반에 가서 살더군요.  방송제에서는  깔깔깔 유머같은 콩트들이 소개되었는데 이게 아주 재미있습니다.  

친구가 살짝 수업시간에 보여주었는데 그거 읽다가 웃음 참느라 혼났습니다.
지금이야 그런것 해도 몸개그나 독설 혹은 리얼이 아니면 거의 웃지 않죠. 요즘 xx고 방송제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네요.  xx고 방송제는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서 많은 학생들이 그거 보고 들을려고 유도장에 모였습니다.  

지금은 유도장이 학생식당이 되었네요.  예전엔 도시락 2개씩 사서 학교에 갔는데 이제는 급식시설이 대 보급되었고 학생식당도 생겨서 도시락문화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뭐 도시락을 꼭 4교시 끝나고 먹던 준수한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보통은 1교시나 2교시후에 다 해치우고 정작 점심시간에는 나가서 놀거나 낮잠을 잤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봤습니다.  책상이 안쪽에 몰려 있네요. 다음 교실에도 똑 같았습니다. 뭐지 원랙 책상이 뒤에까지 꽉차야 정상인데..



뒤를 돌아보니 사물함이 있습니다. 대학생이나 있다던 사물함,  갯수를 세어보니 36개입니다. 책상갯수와 얼추 맞네요
그때 알았죠. 아~~ 한반에 정원이 36명에서 30명인가 보구나 하고요.

격세지감이네요. 수업시작전에 63번까지 이름을 부르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30번대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중 80%가 대학에 진학을 하니 정말 세상 살기 편해졌습니다. 물론 서울대 ,연고대를 갈려면 박처지게 공부해야죠. 하지만 80년대 후반에는 대학 가고 싶어도 전문대까지 포함해서 한반 60명중 30명정도만 진학을 할 수 있었고  서울안에 있는 대학은 한반에 5명정도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렇다고 xx고등학교가 공부를 못하는 학교는 아니였습니다.
물론 저 강남의 8학군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안들었죠

 시설 참 좋아졌네요.

 
그런데 새책상이 이전의 책상과 디자인이 거의 똑같습니다. 의자는 앞부분이 약간 구부러져 있어서 약간 다르지만 기본 디자인은 20년전이나 다른게 없네요.  참 이 책상디자인도 정말 안바뀌네요.  가장 효율적인 디자인이라서 그런가 보네요


 

그리고 놀란것은 이 평판TV였습니다.  예전엔 교실마다 빔프로젝트 TV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평판TV가 보급되는 것은 첨 봤습니다.  예전엔 교실에 TV가 뭡니까?  교련시간에 비온다고  시청각실이라고 써 놓고 15인치 TV하나 올려놓은 곳에 가서 플래툰을 보던 생각이 나네요. 

 
xx고등학교와 함께 xx중학교가 있습니다. 학교 뱃지가 달려있네요.  xx고의 뱃지는 육,해,공을 형상화한 지,덕,체 삼각형 모양의 뱃지입니다.  어딜가나 군과 관련된 것들이 많죠. 그래서 국내 최초로 교련을 실시한 학교이고 그걸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xx고등학교의 자랑인 넓은 운동장입니다. 다른 학교의 2배 이상은 큽니다

 
xx중학교 옆에도 작은 운동장이 있었는데 위와같이 철망을 쳐 놓앗네요.


 
운동기구?  ㅋㅋ 이거 전국 산이란 산에 다 있는데 여기도 있네요

 
 한쪽은 이렇게 야구장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야구장을 가진 학교도 드물죠.  원래는 더 컸는데 학교 재정 마련을 위해 그나마 땅을 판것이 이정도입니다. 

야구이야기를 좀 더 해보죠. 90년 xx고등학교는 강병규라는 불세출의 야구선수가 있었습니다. 제 동기입니다.
그렇다고 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냥 동기일 뿐이죠. 이 강병규는 투수였는데  140km 미터대이 빠른 볼로 예선부터 본선까지 혼자 다 던졌습니다. 대체 투수가 없기에  으레  다른 고등학교 투수들이 그렇듯 혼자 매일 나와서 완투쇼를 했습니다. 또한 타격도 아주 잘했죠.

이렇게 전국대회 결승까지 올라갔고 우리는 동대문운동장으로 향했습니다. 결승에서 대전고와 붙었는데 아쉽게도 패배하고 맙니다. 당시 준결승과 결승은 TV로도 중계를 해주곤 했고  패배하고 돌아오자 부모님이 아쉽게 되었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강병규는 이후 OB베어스에 입단하고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초고교급투수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었죠. 이후 야구보다는 예능프로그램에서 활약하더니 MC가 되었고 한때는 정말 잘나갔죠. 그러나 안좋은 사건에 휘말리게 된 후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xx고 출신의 야구선수들이 많은데  스위치히터였던 박종호도 xx고 출신이고  차명석, 최태원, 최경환, 권용관, 고영민, 
박경수, 박병호등이 있습니다. 박병호 선수는 잘 기억합니다. 2천년도 초인가 xx고등학교가 전국우승을 밥먹듯 했던적이 있는데 그 주연배우가 바로 박병호라는 거포였습니다.  LG 트윈스 요즘 정말 잘하죠. 저도 LG트윈스 끊었다가 올해의 활약에 고무되어서 매일 저녁 중계방송을 찾아보고 있네요

박경수, 박병호 이 두 후배의 활약 기대해 보겠습니다.  박경수는 가끔 역전타를 많이 날려서 인상깊지만 수비가 영 불안해요. 한 경기 두번의 에러를 본적도 있고요. 박병호는 우타거포인데 아직 주전자리를 꿰차지 못하고 있습니다.  LG트윈스의 거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참고로 저도 야구 좀 했습니다.  공속도야 일반인 속도였지만 고등학생 당시에 유일하게 커브를 던질 줄 알았기에 주전투수가 되었죠. 커브도 컨트롤이 되는 커브라서 많은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 낙차큰 커브를 던지지 못합니다. 던지는 방법은 아는데 왜 안될까요?  실밥에 두손가락을 걸치고  어깨를 비틀면서 회전을 주면 되는데요

당시 야구대백과사전에서 역회전볼, 슬라이더, 커브를 책으로 배웠고  커브는 완벽마스터를 했고 역회전 볼도 가끔 시도했는데 컨트롤이 안되서 문제였습니다. 스큐류볼이라고 했던 그 변화구는 팔을 반대로 비틀어서 던져야 했기에 팔에 무리가 많이 갔습니다 

 당시 낙차가 얼마나 컸냐면  분명 눈으로 향하던 공에 상대 타자들이 머리를 숙이거나 타석에서 벗어난 후 포수미트를 보면 정확하게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제 커브가 수직이 아니라 슬라이드처럼 옆으로 흐렀는데 슬라이더와 커브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어서 (원래 커브가 그렇지만) 눈으로 향해오던 공이  스트라이크에 들어오면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뭐 타자 앞을 지나갈때는 볼이였다느니 하면서요. 그럼 제가 스트라이크 존에서 떨어지는 커브를 던지면 헛스윙을 하고 죽죠.
지금은 당시 팔을 혹사시켜서 당시처럼 공을 던질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수는 할 수 있습니다.  유격수가 쓰는 어깨 근육과 투수가 쓰는 어깨근육이 다른가 봅니다. 투구폼으로 해서 내리 꽂으면 어깨가 아파서 못던지지만 유격수로 던지는 송구는 잘 던집니다.  그나마도 이제는 하지 않습니다

 
이 넓은 운동장,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하네요.  달라진 풍경이 있다면 저 뒤에 대나무 같이 올라온 아파트가 달라졌다면 달라졌다고 할수 있겠네요

 



의에 죽고 의에 살자,  그 의가 변함이 없었으면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면 그게 의가 아니겠죠
진리는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불변함이 있어야지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면 진리가 아니겠죠


 운동장 한켠에서 교정을 바라보는데 뒤에 숲이 보입니다. 저 숲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린 휴일 오후 고등학교때 친구들과 뒷산을 올라갔습니다. 물론 철조망으로 쳐져 있었죠.  뒷산에 올라간 이유는 뒷산에 동굴이 하나 있다는 것 입니다.  한국전쟁때 방공호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 더운 여름날 동물체험을 했는데 아주 오싹했고 누군가가 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습니다

저 뒷산 개방을 하면 좋을 듯 한데요.  개인 사유지인가요? 차라리 근처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좋다고 생각되는데요. 참 저 산이름이 용마산입니다.  용마산을 위성지도로 보니 거대한 저택이 있는데 누구의 땅일까요? 두 설립자의 후손드인가요?


그런데 xx중학교 뒤에 격납고 같은 건물이 보입니다. 호기심발동이 걸려 가봤습니다



 요즘은 중학교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가나보네요
건물의 쓰임새는 나와있지 않지만 대충 감은 오네요

 
뒤로 돌아 가보니 정체가 밝혀 졌습니다. 강담 겸 체육관
xx고등학교의 숙원사업인 강당이 드디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용마산도 xx고등학교의 원석학원소유였던것 같습니다. 땅부자네요.  그런데 이제서야 강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75년 역사에 처음으로 강당을 짓는 역사적인 공사현장이네요.  감격스럽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아름다운 친구들 이름이 떠오르고  그 다음에  몇몇 찌질한 선생님들의 폭정이 떠오릅니다.
스승의 날에 반장에게 통장을 던져주며 입금해오라는 수학담임선생님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것 입니다.
반면 항상 우리편에서 서주었던 소장파 선생님들도 생각나고요. 88년에는 전교조사태가 일어났던 해이기도 합니다. 전인교육을 외치면서 교육혁명을 외쳤던 전교조,  학생들을 이념화 시킨다면서 학부모들과 교총과 교육청은 전교조를 불온세력으로 몰아부치고  전교조 소속 교사를 해고시킵니다.

그해 개봉한 '죽은시인의 사회'를 본 후 피카소 극장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많은 고등학생들이 중간고사를 끝나고 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죠.  그 울음소리 평생 잊혀지지 않을거예요.
영화내용이 그 당시 전교조 사태와 너무 비슷했거든요.

공부잘하는 공부머신보다는 사람이 되야 한다고 말했던 선생님들, 그런 혁명적인 모습이 당시는 용납이 되지 않았죠. 지금이야 전교조가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xx고등학교는 전교조 소속 교사가 당시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제로 해임당했던 선생님도 없었죠.
하지만 그 느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불의에 맞서서  싸웠던 독일어 선생님에게서 의를 배웠습니다. 아 이명우 선생님도 생각나네요. 이명우 선생님은 대학가요제인가요? 거기에서  '가시리'로 상을 받았고 몇년전에 7080콘서트에서 다시 뵈었는데
여전히 정정하시더군요. 이명우선생님은 스타선생님이었죠.  그렇다고 공부를 못가르치냐? 아닙니다. 정말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몇 안되는 선생님이었죠.

조전혁의원이 작년에  전교조 교사 명단을 공개했죠?
전 그 공개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내가 믿고 따르던 선생님들이 전교조 소속이라서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50대가 된 1학년때 담임선생님도 여전히 학교에 계시고요

내 동기녀석은 xx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더군요.  이런 사립학교들은 학교 졸업 후에 모교에 선생님으로 돌아가기도 하죠.
또한 사립비리도 참 많고요.  돈만 주면 고등학교 교사가 되기도 하고 참고서 리베이트 비리도 많고, 재단비리도 참 많습니다. 얼마전 명문 충암고의 비리를 보면서  역시 한국 사학은 썩을대로 썩었다고 느껴지네요. 

이사장 조카가 행정실장에 있고 교장은 친인척이고 뭐 이런게 한국사학의 족벌세습화의 문제이자 한국재벌의 부정과도 링크가 됩니다.  그렇다고 xx고등학교 재단이 비리재단이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학교다닐때  학생들 사이에는 학교의 비리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물론 의심만 했죠.  

온갖 비인도적인 폭력과 폭언과 부정을 중고등학교때 많이 봐왔던지라 학교에 대한 추억은 크리 좋지 않습니다.
다만 학교이외 즉 친구들에 대한 추억만이 아주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이런글 쓰면 또 xx고등학교 출신 선후배들이 저에게 안좋은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모교라고 해서 항상 최고다. 훌륭하다하는 식의 주례사같은 의식없이 무조건 좋아해야 한다는 것은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것은 좋은것이고 나쁜것은 나쁜것이지  무조건 내 모교라고해서 아름다고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 xx고등학교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학교입니다.
친일파 학교라는 원죄가 있는 학교이면서도 야구 잘하는 학교로도 알려졌기도 했고요.  고등학교 시절이 그립긴 그립네요. 
정말 그때는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 백지상태라서 뭘 하든 할 수 있었는데 이젠 너무 많은 부분이 칠해진 도화지가 되었네요.  

많은 경험이 삶에 도움이 되더군요. 많이 경험하는 후배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좋은 것을 경험하던 나쁜 것을 경험하던 경험이 많다는 것은 확실히 사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경험후 느낌을 정리하시고요


이상으로 xx고등학교 탐방기를 마칩니다. 

 
덧붙임 :  예상을 했습니다. 김석원 장권에 대한 제 글이 때론 선배님들을 불쾌하게 했을수도 있고 잘못된 정보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시기 위해 김석원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료는 여기에 계속 추가로 올릴겠습니다. 

먼저 김석원 장군이 자신의 일본군으로써의 활동을 스스로 반성했느냐 안했느냐가 가장 중요하겠죠. 아무리 친일파 명단 100인에 올랐다고 해도 단순가담자와 적극가담자는 구분해야 할 것이며  적극가담자라고 해도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석고대죄하면 어느정도 정상참작(?) 해야 할 것 입니다. 한 선배님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자료가 없으니 어떻게 소개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 자료가 자서전이라서 신빙성도 의심이 됩니다.  

73년 경향신문에 김석원 장군이 인터뷰한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내가 겪은二十世紀(이십세기) 【題字(제자)·金錫源(김석원)씨】 

지금의 경향신문이라면 이런 식으로 뜨드미지근한 인터뷰를 하지 않았겠죠. 지금은 경향신문이 진보신문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한화그룹 소속이던 시절에는 조중동과 비슷했죠. 위 네이버의 뉴스라이브러리의 73년 경향신문 인터뷰를 읽어보니  자신의
일본군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군을 격파했다느니 하는 무용담만 있는데  그 중국군과 
조선의 독립군이 같이 연합을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독립군 토벌은 직접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석원 장군의 활약이 
클수록 독립군에게 큰 해가 되었습니다.  

또한 위 기사를 보니 해방 후에 일제시대에서 활약했던 조선인 육해공 동지회를 결성했다고 나옵니다. 그 육해공이 독립군의 
육해공이 아니죠.  바로 일제시대에서 활약했던 육해공입니다. 한마디로 일본 앞잡이들 입니다. 당시 서울시장은 일본군 
출신이라면서 행사 장소인 '서울운동장'을 내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서울시장이 개념시장이었네요

이렇게 되자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일본군 출신 육해공 동지들 4,700명이 모였는데요. 그 주선자가 김석원장군입니다.
그 모습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잘했다!! 라고 했는데  참 가관입니다.  일본군 출신들을  발본색원해서 뿌리를 뽑아도 시원찮은데 
한나라의 대통령이 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의 예비역 모임을 잘했다고 칭찬하네요

또 다른 자료가 있으면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판단은 각자 하셔야겠지만  지금 자료 찾을수록 이 김석원 장군에 대한 좋은
기사가 별로 없네요. 다만 이 김석원 장군은  이후에  고위직들이 한국전쟁전에 임진강에서 북한과의 밀거래를 한것을 내부
고발하는등  불의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는 성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덧붙임2 :  선배님의 제보로  평소의 그의 성품과  교육자 김석원으로써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료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73년 7월 21일 동아일보 기사 
 
전재산을 학교에 기증한 김석원씨   

 위 기사를 보면 교육자 김석원은 대쪽같은 성품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군 김석원은 일제시대의 황군으로  한국전쟁의 큰 공헌등 
양과음이 다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교육자로써의 (해방이후) 성품은 대쪽 같네요. 자신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남기지 않고 모두 학교에 기증했고
도서관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ㅠ.ㅠ 제가 학교 다닐때는 도서관이 있느지도 몰랐습니다.  책 한번 빌려 본적이 없네요. 선배님 말 들어보니
이후에 학교 경영을 잘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좀 안타깝네요.

   덧붙임 3  
 몇몇 선배분들이 저에게 이 글 지우라고 협박을 하네요. 김석원 장군에 대한 평가는 각자 판단할 문제 아닙니까?
 저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2003년경에 MBC뉴스데스크에서 친일파 학교라고 소개된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김석원 장군의 한국전쟁때의 활약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김석원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검색해 보세요. 친일파라는 글은 수두룩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글에는 전혀 반응도 안하면서
  동문이라고 저를 비판하나요?
  아니 xx고등학교 졸업하면 무조건 xx고등학교 칭송해야 하나요? 그게 법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xx고에 대한 좋은 추억이 있는 사람이 있고 나쁜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안좋았던 기억들을 부정하고
   거짓으로 학교가 좋았다고 해야 하나요?  그걸 원하는 건가요?
    제 글에 정 비판을 하고 싶으면 조목조목 논리와 합당한 지적을 하십시요. 구체적으로 이건 역사적이고 구체적 사실이 아니다
   라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를 제시하십시요. 그럼 얼마든지 글을 수정하겠습니다
   하지만 강압적으로 후배라는 식으로 전혀 이해가 안가는 주장을 하면 절대로 이 글은 수정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김석원 장군의 훌륭한 업적을 담은 신문이나 글을 링크하면 얼마든지 소개하겠습니다.

덧붙임4 

학교를 다니면서 3.19의거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고 닳도록 들었지만 김석원, 원윤수 이 두 설립자에 대한
친일행적은
 전혀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과거에 부정한 행동을 했다면 자식된 도리로써
그 부정을 무조건 모르척 하고 살아야 
자식된 도리입니까?

한국은 유난스럽게 내부고발자에 대한 구타가 심합니다. 제 글을 창피해 하는 동문들이 많은데요.
그 창피함의 근원은 이건가요? 
친일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의 부정을  한동안 그 학교에
몸을 담근 적이 있는 준거인으로써 동네방네 창피스럽게 떠드는건 
책임감 없는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는 후배 니가 난 정말 창피스럽다! 
이겁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XX고등학교 출신들이 이 두 설립자에 대한 친일행적을
잘 모르고 졸업합니다. 
지금도 모르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모르는 것을 알린다고 해서 그게
나쁜행동이라고 지적하는 것 보다 남들에게 혹은 우연히 
아버지(설립자)의 부정을 인터넷으로 혹은
다른 곳에서 알게 되면 더 배신감 드는것은 아시나요?
차라리 학교에서 그런 과거까지 다 알려주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명명백백한 사실이기에 어떠한
가감도 없이 알려주는게 재학생에 대한
도리 아닐까 합니다.


또한 교가에 대한 부분은 아직도 여러 민족연구 단체나 여러 사람들이 손가락질 합니다
교가는 설립자 찬양가인데 의식이 있고 친일이 아닌 항일을 국가 기조로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면
 더 상위의 개념으로써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설립자에 대한 비난이 아닌 비판을 왜 거기에 몸 담았던 동문과 재학생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나요?
이런 해석은 설립자를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증거 아닐까요? 엄연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게 제 마지막 XX고등학교에 대한 바람입니다. 이젠 이 XX고등학교라는 준거집단에서 탈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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