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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세가지색 블루 감상기 (자유에 대한 교향시)

by 썬도그 2007.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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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색 블루 1994년 4월 국내 개봉


이 영화 앞에 항상 따라다니는 세 가지 색이란 단어는  이 영화가 시리즈임을 암시한다.
폴란드 출신의 영화계의 거장인 크쥐스토프 키에로브스키 감독이 빚어낸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시리즈처럼 3편이 있다.

블루, 화이트, 레드  프랑스의 3 색기의 색깔인데 각각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블루에도 자유, 평등, 박애가 다 스며들어있고  큰 주제인 자유가 가장 돌출되어
보인다.

그해 칸느영화제상을 받은 이 작품은 전형적인 유럽 영화의 사유와 메타포가 가득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프랑스 감독과 프랑스 사람들은 왜 이런 걸 우리 프랑스
감독이 못 만들고 폴란드 감독이 만들었냐며 한탄했을 정도로  영화는 세련되고 그 영상미와
 음악의 조화는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영화보다 먼저 본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열연을 했던 프랑스의 대표적인 배우
줄리에트 비노쉬는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까지 받는다.

저 포스터는 십수 년이 지나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포스터다. 그 시절 길거리에 붙어있던
저 포스터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면서 아득해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1990년대 초반은 EU란 유럽공동체가 막 그 모습을 드러내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국내에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한 영화이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것은 흥행을 보장받았던 시절이었는데 요즘은 칸에서 큰상을 받아도
국내에서 성공하기도 드물고 그런 악순환으로 들어오지도 않는 경우도 많다.
아카데미상도 이젠 흥행 보증과는 별개인 것 같고. 오히려 상 받은 작품들은 지루하고 고리타분
하다는 딱지를 붙여주는 꼴이 된 것 같아 씁쓸해진다.  은유법이 사멸해가는 시대적 특성과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21세기 키치적인 시류인듯하다.


이 영화를 잊지 못해 블루, 화이트, 레드 세트 DVD를 지난달에 인터넷에서 구입하였다.


영화 영상을 보면서 감상문을 진행하겠다.

영화에서는 영화 제목처럼 블루가 많이 나온다  클래식 작곡가인 남편과 딸 안나 그리고 여주인공 줄리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린다

그러다 브레이크 파열로 저렇게 큰 사고가 나고 딸 안나와 남편을 잃는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줄리는 약을 먹고 자살을 결심하나 차마 죽지 못하고 약을 뱉는다
그런 그를 간호사는 조용히 쳐다본다.


딸과 남편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있는 줄리에게 장례식 영상을 보여준다.
남편은 EU 통합을 기원하는 교향곡 작곡을 부탁받았고 그 곡을 쓰는 와중에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편의 죽음에 애도한다.


퇴원한 줄리는 곤한 낮잠을 자다가 남편이 작곡한 음악 환청에 깬다. 
이 장면에서 푸른빛과 음악이 조화롭게 표현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명장면이다.
꼭 빛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매일 고통과 절망 속에 살던 줄리는  남편이 죽기 전에 외도를 했다는 걸 알게 된다.

분노심과 절망감에 줄리는 남편이 작곡하다 만 악보를 쓰레기차에 넣어버린다
배경음악은 저 악보가 구겨지면서 같이 구겨지듯 늘어지는 음악이 된다 이 장면도
인상 깊은 장면중 하나

가방에서 꺼낸 파란색 캔디를 마구 씹어먹는다. 이보다 더 암울할 수 있겠냐며
세상을 씹어먹듯이 이영화는 소품에서 파란색을 많이 사용한다. 달리 블루겟는가


평소에 줄리를 흠모했던 남편의 친구를 불러 하룻밤을 보낸다.  이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자기를 치유할 무엇인가를 찾는 모습 같다.

그리고 줄리는 살던 집을 정리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간다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끊은 채로

새로이 사간 건물 2층에 거리의 여자가 산다. 주민들은 그 거리의 여자를 내보내기 위해서 주민들의 전체 찬성
을 받길 원한다. 하지만 줄리는 그런데 관심 없다. 이게 똘레랑스 정신인가?

이 장면은 재미있는데 다음 작품인 화이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화이트에서는 할아버지가 나오는데 감독의 무슨 메타포 같은데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감독은 여기저기 시리즈물의 재미를 여러 곳에 숨겨놓았다. 잘 찾지 못하면
넘어가는 장면들이 많다


2층에 사는 거리의 여자다. 줄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 줄리 때문에 쫓겨나지 않게 되어
으므로 친구 한 명 없던 줄리에게 유일한 친구가 생겼다.


이 사람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에  고급 자동차에서 내려 저렇게 하루 종일
피리를 분다. 노숙자처럼 길바닥에서 자기도 하고 줄리에게 무언가 집착하는 것 같다는
도사 같은 말도 한다.


줄리 집 창고에 쥐가 새끼를 쳤다.


그런 쥐를 잡기 위해 다른 집에서 고양이를 빌려다 집에 집어넣는다


가족을 모두 잃은 자신이 쥐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줄리는 자괴감을 느낀다
그런 그를 2층에 사는 거리의 여자는 엄마처럼 감싸 안아준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서로 알아보나?

이 장면도 숨은 그림 찾기다.  파란색 풀장에 하얀색 수영복을 입고 빨간 튜브를 팔뚝에 찬
아이들이 풀장으로 뛰어든다.  어떤가? 세 가지 색이 한 화면에 나온다.
이것도 감독이 숨겨놓은 장면이다.

곤히 자고 있는 새벽에 2층에 사는 루씰은 도와달라고 전화를 줄리에게 한다
자기가 공연하는 퇴폐영업장소에서  자신의 친아버지가 왔다는 것이다.
줄리는 루씰에게 꼭 이런 직업을 해야 하냐고 묻지만  루씰은 이 직업이 좋다고 한다
더 이상 줄리는 건물주인이 사인 받으러 왔을 때처럼 남의 직업에 관여하지 않기로
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TV를 보다가 남편의 친구이자 자신을 흠모하던 사람을 보게 된다.
남편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줄리밖에 없다며 줄리가 남편이 다하지 못하고
떠난 부분을 해주었으면 하는 내용의 방송을 보게 된다.


남편 친구인 올리비에는 줄리에게 사랑을 구속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뭔가에 얽메이고 삶의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자꾸 뭐에 엉켜있던 삶에
줄리는 자신의 집착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드디어 남편의 외도 당사자인 남편의 애인을 만난다 그녀는 법조인이었으며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
줄리는 그런 그녀에게 재산을 나눠준다.
이게 바로 관용이란 것인가?  우리나라 같으면 '사랑과 전쟁'의 소재로 쓰일만하고
머리끄덩이 잡고 패대기쳐야 할 장면인데



남편 친구인 올리비에와 줄리는 다시 미완성인 교향곡을 완성하기로 한다.
이장 면도 손가락으로 저렇게 악보를 읽어나가면 그 악보대로 음악이 깔려 나온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음악도 아주 훌륭하다. 단조로운 멜로디 속에 금관악기의 강한
비트가 나온다

그리고 무슨 감정인지 모르던 올리비에를 받아들인다.


영화 마지막 3분은 음악이 흐르면서 지금까지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남편의 외도로 태어난 저 새 생명도 파란 관용의 색에 의해 칠해진다

마지막 장면들이다. 

줄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일까?

자유란 무엇일까?

속박으로 인해 편안함이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 하나의
계약이 생기고 그 계약은 서로의 행동에 제약을 주고 책임을 요구한다.
자유보단 서로의 속박을 원하는 게 필부필남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줄리가 깨닫게 되는
자유는 그런 속박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어 내고  자신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 것보단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자유를 택한다. 죽은 남편도 자신의 손에 가지고 있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그가 사랑한 또 한 명의 여자가 있었고 그런 여자를 학대하고 고소하고 괴롭히기
보단  관용으로 대한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새로운 사랑인 올리비에를 맞아들인다.
진정으로 올리비에를 맞이한 건지는 확신이 안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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