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가 많지 않은 요즘 영화관입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 궁핍기에는 옛 영화들이 있어서 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안 본 영화 중 좋은 영화들이 꽤 많습니다. 나름 영화광인데도 아직도 못 본 영화들이 많네요. 그런데 이 영화는 주변에서 추천하는 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영진위가 만든 <한국영화 100선>에도 없고요.
그런데 이 영화 저에게 있어 인생 영화라고 할 정도로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고 놀라운 영화였습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생각하면 이 영화가 한국 영화 역사에 큰 점을 찍는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에서 최초로 시도하거나 영화사에 남길 정도로 엄청난 임팩트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영화가 공감대가 아주 아주 높은 영화 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억척스러운 엄마를 비난하던 나영. 제주도에서 20살의 엄마를 만나다
이 2004년 개봉한 <인어공주>는 흥행에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2004년 그해에 지금은 사라진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과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등등 꽤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검색을 하면 흑인 배우가 연기를 한 실사 영화 <인어공주>나 애니 <인어공주>가 가득 나와서 '전도연의 인어공주'라고 검색해야 겨우 나오지만 전 이 영화가 감히 말하지만 디즈니의 <인어공주>보다 100배 더 재미있게 봤네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영화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애잔함과 우리 엄마도 아빠도 20대 시절이 있었다는 단순한 명제를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과 스토리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와서 볼까 말까 하다가 너무 볼 게 없어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좋은 영화인 줄 몰랐네요. 안 본 분들이 있고 특히 40대 이상 나이 든 부모를 둔 분들이라면 적극 추천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20대 중반의 김나영(전도연 분)은 은행에서 창구직을 맡고 있습니다. 뉴질랜드 연수 기회가 생겨서 상당히 들떠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만 오면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전라도 사투리를 야무지게 쓰는 엄마 조연순(고두심 분)은 생활력이 만랩이라서 억척스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별 필요도 없는 걸 주워와서 사용하려는 그 억척스러움에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또 욕은 얼마나 맛있게 하시는지요.
나영의 엄마는 목욕탕 세신사입니다. 반면 아빠인 김진국은 집에서 담배피다가 아내인 조연순 여사에게 구박을 받는 천상 우리네 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구박하면 같이 싸우지 않고 그냥 잔소리를 다 받아줍니다. 이렇게 두 부부가 매일 같이 싸우고 큰소리가 나다 보니 나영은 남자친구에게 부모님 밑에서 사는 것이 너무 싫다고 말하죠. 뉴질랜드 가는 여권이 나오고 오랜만에 가족끼리 회식을 하던 중 아빠가 웁니다.
"이제 좀 쉬고 싶다"
그말을 남기고 아빠가 사라집니다. 나영은 뉴질랜드로 가는 걸 포기하고 사라진 아빠를 찾으러 제주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20살 엄마를 만나게 됩니다.
나영은 아빠를 찾으러 제주도 우도에 도착한 후 지나가던 집배원에게 길을 물어봤는데 돌아보니 1970년대의 자전거를 탄 집배원을 만나게 됩니다. 친절한 집배원은 길을 안내해 주죠. 그렇게 나영은 엄마가 나고 자란 집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20살 엄마와 더 어린 외삼촌을 만납니다. 어리둥절하게 되죠. 그런데 이 영화는 무슨 시간 여행 소재의 영화가 아닙니다. 그냥 나영이 제주도에서 20살 엄마의 기억을 되짚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나영은 20살 글도 못 읽고 못 쓰는 항상 밝고 맑은 엄마를 보게 됩니다.
20살 엄마를 만난다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설정에 푹 빠져들게 하는 영화 <인어공주>
다들 나이들어가면 늙어버린 부모님의 20대 시절을 보게 됩니다. 가장 쉽게 접할 기회는 사진 앨범이죠. 그 앨범 속 엄마와 아빠는 너무나도 젊고 잘 생겼습니다. 그러나 지금 옆에 계신 부모님을 보면 많이 늙은 모습에 마음이 아픕니다. 태어나보니 20대 또는 30대 부모님부터 만난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부모님 모습을 사진 속에서 주로 봅니다.
그러다 가끔 술을 드시면 기분 좋아서 20대 연애시절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때의 연애담은 별거 없습니다. 중매로 결혼하신 분들은 더더욱 없죠. 그리고 평생을 싸우십니다. 평생을 제 부모님도 그러셨고 많은 분들이 그러실 겁니다. 가끔 잉꼬부부라고 하는 분들 정말 평생 화목하게 사는 가족은 많지 않습니다. 제 주변을 봐도 우리 가족도 그랬으니까요. 왜 그렇게 열심히 싸우셨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렇다고 싫어서 싸우기보다는 안 맞으셔서 싸우시더라고요. 마치 나영의 부모님처럼요. 제 경험과 영화 속 모습이 겹치니 제가 더 몰입하게 보게 되었네요. 현실은 시궁창 같지만 나영은 이 두 사람이 처음 사랑을 하던 20살 엄마를 만나면서 엄마의 첫사랑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20살 엄마는 고아였습니다. 버려진 아이를 마을 사람들이 키워서 20살이 되었고 이제는 숨비 소리 내는 해녀가 되었습니다. 어린 동생은 학교를 다니지만 여자라서 그런지 학교에 다니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도 그랬고 1950년대 전후의 많은 여자 분들이 학교를 가지 못했습니다. 간다고 해도 초등학교가 전부죠. 이런 20살 엄마가 한 남자를 좋아합니다. 지나가던 집배원 총각. 말은 못 걸고 좋아하는 내색도 못합니다.
이는 집배원 김진국(박해일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지만 내색을 못하다가 딸 나영의 주선으로 한글을 배우고 가르치는 선생님과 제자가 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길어지다가 집배원 총각이 육지로 발령이 나면서 헤어집니다. 이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에 장탄식이 나옵니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영화 <인어공주>
전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잘 생긴 것은 잘 알고 있고 늙지 않는 인간 미이라인 것도 잘 알지만 그렇다고 빛이 날 정도의 전형적인 미남 배우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시쳇말로 존잘입니다. 제가 수많은 영화에서 박해일을 봤지만 이 영화 <인어공주>에서 가장 광채가 나는 외모를 보여줍니다. 이는 역할 때문이기도 한데 한국의 <일 포스티노>라고 할 정도로 영화가 굉장히 맑고 아름답고 순수합니다.
<밀양>으로 세계적인 여배우가 된 전도연이고 <밀양> 말고도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고 더 가치가 높은 영화들이 있지만 감히 말하면 <인어공주>가 가장 전도연 필모의 정점에 있어야 하지 않나 할 정도로 놀라운 빛을 보여줍니다. 위 장면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의 표정인데 얼굴에 광이 난다고 할 정도로 사랑이 가득 느껴집니다. 연기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1인 2역을 하는데 그 1인 2역 모두 빛이 납니다. 한 배우가 엄마와 딸을 연기하는데 어쩜 이리 잘하는지요.
이외에도 고두심의 연기도 대단합니다. 중년의 배우와 이제 막 빛을 발하는 두 여배우의 연기가 화면 전체를 잡아 먹습니다. 이외에도 이 영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많습니다. 먼저 음악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익숙한 음악이 나옵니다. 수많은 광고에서 들었던 그 노래요. 음악 감독은 <봄날은 간다>와 <8월의 크리스마스>등의 음악을 맡은 조성우 감독입니다. 조성우 음악감독은 최근까지도 활동을 하지만 이 2000년대 초 중반이 절정이었나 봅니다. 이 당시 노래들이 너무 좋네요.
그리고 촬영입니다. 우도의 돌담을 누비면서 다니는 박해일의 표정을 어찌나 그리 잘 잡는지요. 특히 술 먹고 모자 뒤집어 쓰고 흔들거리면서 내려오는 장면을 담는 장면이나 동남아에 가서 재촬영까지 한 바닷가 장면이나 물속 장면 등등 한 장면 한 장면이 우편엽서로 사용해도 손색없는 빛나는 풍광이 있습니다. 여기에 스토리도 담백하면서 묵직하며 신파로 흐르지 않게 잘 통제를 한 박흥식 감독님의 연출도 꽤 좋네요. 박흥식 감독님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조연출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러모로 <8월의 크리스마스> 느낌이 많습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한 장면에 담는 쌍둥이 설정 영화들을 참 많이 봤지만 <인어공주>의 CG는 거의 티가 나지 않네요. 20살 엄마와 현재의 나영을 전도연이 한 장면에서 같이 연기하는데 싱크로율이 아주 뛰어납니다. 특히 입과 대사과 정확하고 주고 받는주고받는 대사의 타이밍이 아주 좋아서 몰입감이 더 증가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테니스 공을 놓고 연기를 했고 대사 주고받는 싱크를 위해서 녹음한 대사를 틀어 놓고 촬영을 했다고 하네요. 동시 녹음이라서 주변 소음에 여러 번 NG가 났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실내 촬영이나 세트 촬영을 많이 하고 야외 동시 촬영이라고 해도 주변 소음만 제거하는 기술이 있어서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우도에서 6개월 동안 온 스텝들이 우도 주민들과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제주도 우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부모님들의 청춘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맑은 감동이 가득한 영화 <인어공주>
지나가는 말로 말했지만 영화라는 것이 내 경험과 연결되면 더 많은 감정을 쏟아내게 됩니다. 이 영화를 2004년 봤다면 이렇게까지 추천하거나 영화 후반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저도 나이가 들고 부모님의 나이가 되다 보니 부모님들의 20대 시절을 가끔 떠올려 봅니다. 또한 최근 제가 경험한 일 때문인지 더 마음 아프게 다가오네요.
엄마가 처녀였을 때, 아빠가 총각이었을 때가 있었다는 걸 쉽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말로 설명하면 설명되어지지도 않고요. 그러나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이 그 모든 것을 설명하죠.
모든 생명에는 절정이 있습니다. 그 빛나던 순간을 우리는 사진으로 참 많이 남깁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자녀과 손주까지 그 과거를 바로 떠올리게 합니다. 그게 사진의 힘이죠. 영화 <인어공주>의 스토리는 단순합니다. 20대 딸이 20대 엄마를 만난다는 설정. 그런데 이걸 너무나도 순박하고 아름답고 맑게 담았습니다. 이 좋은 영화를 이제야 봤다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할 정도네요. 영화 마지막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슬픈 장면도 아니고 슬픈 대사도 없지만 그냥 우리네 부모님들 생각을 담은 둑을 무너트리네요.
특히 엄마가 누워있는 아빠를 보고 방문을 열고 하는 넋두리는 엄마가 잔소리를 하고 구박을 해도 다 애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해주는 명장면입니다.
다만 이 영화는 20대가 아닌 내가 부모가 된 이후에 보면 더 좋고 나이가 많은 분들이 보면 더 좋습니다. 이 좋은 영화를 왜들 그리 주변에서 추천을 안 했나 했는데 본 사람이 적네요. 하지만 본 사람들은 다들 칭송을 합니다. 정말 2004년에는 한국 영화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놀라운 영화들이 매달 쏟아져 나왔네요.
한가지 궁금한 점은 제주도 출신인 엄마가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아마도 전라도 사투리가 더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이야 제주도 방언을 그대로 사용한 <우리들의 블루스> 같은 드라마도 나오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도 사투리는 못 알아듣는 것이 많기에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한 듯하네요
참 왜 인어공주냐고 하면 집배원이 연순에게 육지로 떠나면서 준 책이 인어공주이기도 하고 해녀가 실존하는 인어공주이기도 하고요. 그런 인어공주가 육지에서는 목욕탕 욕조에서 나와서 세신사를 한다는 설정도 참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영화가 곳곳에서 유머러스한 장면이 많아서 웃기고 울리는 장면이 많네요. 고두심이 침을 목욕탕 바닥에 뱉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해녀들이 침을 뱉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해초에 침 뱉어서 물안경 닦으면 김도 안 서리고요. 디테일한 장면도 잘 담았네요. 그리고 이선균도 나영의 남자친구로 잠시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네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잘 보셨다면 이어서 볼 만한 영화 <인어공주>였습니다. 이런 맑고 예쁜 영화가 요즘 한국 영화에서 많이 안 보인다는 것이 너무 아쉽네요.
별점 : ★ ★ ★ ★ ★
40자 평 : 찬란했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20대에 대한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