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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창고

봉준호 감독의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한국 1세대 시네필에 대한 헌정 다큐

by 썬도그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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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유명하면 별 걸 다 넷플릭스 다큐로 만들 수 있구나는 반감이 컸습니다. 봉준호 감독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그렇기 이 분들을 다큐의 소재로 담을 정도인가 하는 반감이 확 드네요. 그렇잖아요. 봉준호 감독이 아무리 시네필 1세대이고 그가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우던 서교동에 있던 노란문이라는 영화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가 소재가 될 수 있을까 했죠. 그런데 보다 보니 그 시절 제 모습도 떠오르더라고요. 시네필 1세대. 네 저도 시네필 1세대입니다. 물론 자칭이죠. 

1995~1996년 개봉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와 희생이 초대박을 내던 그 시절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지금은 이런 예술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 조차 안 되겠지만 개봉한다고 해도 많아야 2만 정도 관객이 들면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유독 예술 영화가 대박을 낼 때가 있었습니다. 1992년 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지금 봐도 난해한 스토리임에도 한국에서 흥행 1위를 기록해서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술 영화가 1위?

이때부터 조짐이 있었죠. 그리고 그 절정은 80년대에 만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1995년, 1996년 국내 최초 예술영화 전용관인 동숭 시네마텍에서 개봉을 했는데 1995년에 개봉한 <희생>이 무려 11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고 1996년에 개봉한 <노스텔지아>는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11만, 5만가지고 겨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는 단관 개봉이었고 오로지 300석 규모의 동숭 시네마텍 지하 상영관에서만 기록한 기록입니다. 지금처럼 영화관이 많지도 시설이 좋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영화는 개봉이 아닌 비디오로 직행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무려 2개의 영화 중 <희생>은 기억이 안 나는데 <노스텔지아>는 군대 휴가 나와서 봤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영화 마니아입니다. 다른 취미는 그냥 마니아라고 하지만 영화는 시네필이라고 하죠. 저는 자칭 1세대 시네필로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영화가 산업으로 태동하던 90년대 후반의 폭발적인 성장세와 인기, 해외에서의 한국 영화에 대해 놀라워하던 2000년대 초반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지금이요? 지금의 한국 영화 시장은 너무 산업화되고 할리우드화 되어서 재미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기획 영화들이 난무하지만 90년대 후반, 2천 년대 초반의 그 다양한 소재와 뛰어난 영화들이 한 해에도 수십 편씩 쏟아져 나오던 그 시절이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봉준호 감독을 키운 영화 동아리 노란문에 대한 이야기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사진작가 중에는 사진학과 출신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문학과 출신 사진작가들이 많아요. 사진은 카메라는 표현의 도구이지 그 사진이 카메라가 스스로 인간의 생각을 담지 못합니다. 따라서 뛰어난 생각력이 있는 분들이 사진을 잘 찍고 작가가 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영화학과가 많이 생겼지만 세계적인 영화감독들이 영화학과 출신들이 아닙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박찬욱 감독은 서강대 철학과 출신이고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 출신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영화계는 도제 시스템입니다. 학교 학과  출신 다 필요 없고 유명 감독 연출부에 들어가서 연출을 직접 배웁니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을 키우다가 조연출이 되고 감독이 되는 것이죠. 최근에는 미술감독이 연출을 하고 카메라 감독이 연출을 하는 모습에 이제는 이 도제 시스템이 무너진 건가? 아니면 워낙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서 누가 연출해도 되나 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이 봉준호 감독은 어디서 영화를 배웠을까요? 전 90년대 말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명한 한국 감독들을 배출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가 큰 산파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 영화 아카데미가 영화계의 서울대 같은 곳이었죠. 그런데 이 봉준호 감독이 영화의 열정을 키운 곳이 따로 있네요. 바로 노란문이라는 곳입니다.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노란문은 어떻게 보면 영화 연합 동아리 또는 연합 커뮤니티였습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모여서 영화 보고 토론하고 비평하고 심지어 연출까지 하는 등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했던 서교동에 있던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전 봉준호 감독이 영화 동아리 출신인지는 몰랐네요. 저는 사진 동아리 출신으로 지금까지 사진 관련 글을 이 블로그에 올리고 있습니다. 
뭐든 깊게 파다 보면 그 분야에서 인정받게 되는 것은 영화계나 사진계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 때 저도 사진계에서 제 블로그가 꽤 유명했었다고 해요.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2023년 10월 27일 오픈한 넷플릭스 다큐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에 봉준호 감독이 나오기에 호기심에 봤습니다. 처음에는 봉 감독이 형형하고 인사를 하는 모습에 영화계 분인가 보다 했는데 아닙니다. 누가 봐도 일반인입니다. 그럼 영화 관련일을 하는 분들인가 했는데 아닙니다. 여기에 많은 분들이 줌으로 참여하는 모습에 뭐지? 했는데 이분들이 영화 동아리인 <노란문>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활동했던 동아리 멤버들이더라고요. 

순간 제 92년 사진동아리 시절이 너무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M.T 가고 먹고 놀고 마시면서 지냈던 시절이요. 다른 점은 사진 연구는 일도 안 하고 먹고 놀고 마시기만 했네요. 그때의 후회 때문인지 지금은 누구보다 많은 사진 관련 정보나 이야기를 캐고 블로그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 모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네요. 그냥 자기들 추억만 소개한다면 이건 다큐가 되기 어려울 텐데요. 처음에는 뚱하게 봤습니다. 그러다 마음이 풀어진 것이 이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노란문이 형성되던 90년대 초부터 중반에서 후반까지의 한국 시네필 1세대들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시네필 1세대 감독들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추억팔이를 좀 하자면 한국 영화가 칸과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90년대 초중반에 발현되기 시작한 1세대 시네필 덕분입니다. 한국 영화의 3개의 거탑 중에 2명이 1세대 시네필 출신입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대표적이죠. 이창동 감독은 워낙 인터뷰를 안 하시고 소설가 출신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90년대 초에 어떻게 시네필들이 나오고 이전에는 없었을까 할 수 있는데 이게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90년대 이전에는 영화를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고 영화가 산업화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충무로에서 도제 시스템을 뚝딱뚝딱 만들어 내놓던 시절이었죠. 그나마 60년대에는 한국이 동아시아를 호령하는 영화 강국이었지만 박정희 정권 들어선 후 언론 및 문화 탄압과 사전검열이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전두환 정권은 더 노골적으로 탄압을 해서 에로 영화들만 줄곧 만들어서 한국 영화는 사람들이 닥치고 외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87년의 한국 영화는 입장료가 2,000원, 외화는 2,500원으로 입장료도 차이가 났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런 환경에서 무슨 시네필이 나오겠어요. 그리고 영화를 마음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봉 감독도 말하지만 주말에 하는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와 명화 극장 이 3개의 방송에서 틀어주는 외화가 전부였죠. 비디오가 어디 있었으며 VOD 서비스, 스트리밍 서비스가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다 환경이 바뀝니다. 바로 비디오 시장이 열립니다. 

비디오 VCR이 가정에 보급되고 동네마다 비디오가게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중 '영화 마을'과 '으뜸과 버금'은 말로만 들었던 해외 명작 영화를 수시로 소개했습니다. 그때 본 '여인의 향기(원제 브라질)'이라는 영화나 각종 유명한 영화들을 숱하게 봤습니다. 한국에 소개 조차 안 되었던 수많은 명작 영화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자 여기저기서 시네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유명하고 어려운 영화 보기 배틀이 있을 정도로 각종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렇게 수 많은 영화들을 직접 보고 배우고 스스로 체득한 영화 체력을 스스로 키운 세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들은 일취월장해집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이 시네필들은 기존의 충무로에서 길러진 감독들과 영화인들이 아니라서 자유분방하고 혁신적인 스토리와 영상 기법들을 선보이기도 했죠. 

90년대 한국 가요가 폭풍적인 성장을 한 것이 팝송을 섭취한 세대들이 선도한 것처럼 80년대 후반 비디오 시장이 열리고 해외 유명 영화들을 직접 보고 연출 공부를 한 시네필 1세대들이 90년대 후반부터 2천 년대 초반까지 쏟아져 나오면서 한국 국 명작 영화들이 이 시기에 엄청나게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고 다큐에서는 담기지 않습니다. 다만 시네필 1세대를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한 현재 영상자료원 원장인 김홍준 감독과 밤의 영화 대통령이던 정은임의 영화음악도 살짝 소개되네요.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정성일 영화 평론가는 한국 시네필들을 이끈 큰 어르신 같은 분입니다. 

다만 이 90년대 후반 2천년대 초반에 등장한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이 5명의 감독이 아직도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라는 점은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이 5명이 무려 20년 넘게 한국 영화를 대표하다뇨.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야 하는데 이게 없네요. 그래서 한국 영화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다만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이 탄탄해져서 영화 만듦새의 기본기는 무척 탄탄해졌네요. 

봉준호 감독의 숨겨 놓은 25분짜리 단편 애니를 통해 본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열정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봉준호 감독의 첫 단편인 <백색인> 이전에 숨겨 놓은 25분짜리 스톱모션 애니인 Looking for paradise라는 소개하면서 진행됩니다. 1초에 24장의 필름이 돌아가는 8mm 필름 카메라로 영화 제작하기가 쉽지 않자 히타치의 비디오카메라로 단편 영화를 만드는 과정 그 비디오카메라로 결혼식 촬영해서 푼돈 벌던 모습까지 이 봉준호라는 시네필이 영화를 제작하고 함께 감상하고 그 모습을 후원한 안내상과 우현 배우이자 선배의 모습까지 그 시절 우리가 그리워하던 모습이 자박자박하게 깔리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 아름다웠던 90년대 초 중반의 영화 시네필들의 이야기에 푹 빠졌습니다. 

몇 권 안 되는 영화 관련 책을 사서 읽고 매일 밤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듣고 비디오 가게에서 예술 영화 골라보고 예술 영화를 일부러 찾아가서 보던 그시절이에. 다큐를 보다가 내 모습이 계속 반영되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네요. 노란문이라는 영화 동아리를 통해서 시네필 1세대들에게 대한 헌정 다큐 같다고 할까요?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Looking for paradise 스톱모션 단편의 마지막 장면은 올림픽 공원에 있는 나홀로 나무에서 끝이 납니다. 30년 전 나무는 왜소하더라고요. 좋은 다큐입니다.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90년대 초 중반의 영화 열정을 잘 담았습니다. 

트뤼포 감독의 시네필 3단계에서 1단계가 같은 영화를 여러번 본다에서 2단계는 영화를 보고 난 후 감독 이름을 적는다, 3단계가 영화를 직접 제작한다고 하죠. 이 말은 정성일 평론가가 좀 왜곡해서 소개한 것이고 3단계는 내가 감독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직접 영화를 연출하는 것이 시네필의 궁극적인 종착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시네필 1세대가 배출한 보물 같은 감독입니다.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전 시네필 2단계로 감독 이름을 적어보니 이혁래 감독이네요. 2022년 <미싱타는 여자들>을 연출한 분이네요. 다큐 연출 잘하시는데 다음 다큐도 기대하겠습니다. 이혁래 감독님 기억하겠습니다. 덕분에 그 시절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네요. 

별점 : ★ ★ ★ ★
40자 평 :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열정과 온기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90년대 초, 시네필들의 공동체인 '노란문 영화 연구소' 회원들이 30년 만에 다시 떠올리는 영화광 시대와 청년 봉준호의 첫번째 단편 영화를 둘러싼 기억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평점
9.4 (2023.10.27 개봉)
감독
이혁래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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