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봉도 안 하는 코시국이지만 코시국 전에 한국 영화 대부분은 스릴러 영화들이 참 많았습니다. 초반에는 어리둥절하게 하고 후반에는 반전 뒤통수를 때리는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스릴러 영화 홍수 속에서 사라진 장르들이 참 많습니다. 로맨스 영화와 로코물 장르가 거의 안 보입니다.
로코물 대부분을 TV 드라마가 흡수해서일까요?
그래서 뛰어난 로맨스 영화를 뒤적거리다 보면 과거로 과거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2012년 <건축학개론>을 지나가다가 보면 유난히 1998년 ~ 2004년 경에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로맨스 영화들이 참 많습니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2000년 <시월애>, 2001년 <봄날은 간다> 같은 명작 멜로 영화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명작 반열에 올리기에는 좀 애매하긴 하지만 대중적 인기는 무척 높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곽지용 감독의 <클래식>입니다.
지금도 로맨스 여주인공인 손예진, 조승우 주연의 영화 <클래식>
손예진. 이 배우는 참 오묘합니다. 무릇 배우란 아우라가 있어야 하는데 손예진은 데뷔 당시부터 아우라가 콸콸콸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네요. 매일 오후 10시에 퇴근하는 IT 업체에서 근무하다가 토요일 밤마다 술에 취해서 일요일 오전 오후 시체가 되어서 거실에서 뒹굴던 때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동공이 커지게 한 배우가 손예진입니다.
2001년 MBC 드라마였던 '선희 진희'에서 주연을 맡은 손예진을 보고 저런 배우가 있었나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후 2002년 영화 <연애 소설>로 단박에 영화 주연을 맡아 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배우였습니다. 그럼에도 경력이 짧았지만 사계절 드라마 시리즈에서 <여름 향기>의 주인공을 맡고 2003년 <엽기적인 그녀>로 동아시아에서 크게 알려진 '곽재용'감독이 연출한 영화 <클래식>에 주연을 맡습니다.
이렇게 급속하게 성장하는 배우도 드물지만 2003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여전히 톱 클래스 배우, 그것도 여전히 로맨스 드라마 여주인공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놀랍고 놀랍네요. 올해로 39살인데 여전히 30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런데 20대 초반의 2003년에는 어땠겠어요. 그냥 얼굴에서 광이 날 정도죠. 손예진을 단숨에 톱스타 반열에 올린 영화가 바로 2003년 개봉한 <클래식>입니다. 여기에 지금도 탑 배우인 조승우, 이제 막 얼굴을 알린 조인성이 영화의 조연배우로 나옵니다.
1968년의 사랑 이야기를 2002년에 꺼내들다
2002년에 사는 지혜(손예진 분)은 아빠와 엄마의 연애편지를 정리하다가 바람에 날린 편지를 줍게되고 그 편지를 읽어보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는 자연스럽게 엄마 아빠의 연애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1968년 경기도 수원 인근 지역에 사는 고등학생 준하(조승우 분) 앞으로 하얀 피부의 재선 국회의원의 딸인 주희(손예진 분)이 지나갑니다. 주희는 준하에게 귀신이 나온다는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귀신의 집 탐험을 하고 나오다 소나기를 만나게 되고 저녁이 되어서야 배를 타고 섬에서 나옵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을 통해서 친구에서 연인으로 감정이 발전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분의 차이가 있습니다. 주희는 준하 친구 태수(이기우 분)와 정략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있는 집안이라서 서로 아들 딸을 결혼시키려고 하죠. 이에 태수는 주희에게 보낼 러브레터를 준하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을 하죠. 그렇게 준하는 누군지도 잘 모르고 주희에게 러브레터를 씁니다.
태수는 주희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집안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태수는 준하에게 저녁에 사교 모임에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했고 그 사교 모임에서 주희를 다시 만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만 태수는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지 모릅니다. 모르는 것은 이뿐이 아닙니다. 태수는 준하와 주희가 서로 좋아하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고 친구의 사랑을 뺏었다는 이유로 괴로워합니다.
영화 <클래식>은 2개의 서사가 동시에 진행됩니다. 엄마 아빠의 러브레터를 읽으면서 시작되는 1968년 사랑 이야기와 2002년의 대학생 지혜의 짝사랑이 출발합니다. 공통점은 엄마인 주희와 딸인 지혜를 손예진이 모두 연기를 합니다.
자연스럽게 엄마 주희와 딸 지혜의 사랑 이야기에 빠지게 되는데 두 사람의 사랑 방정식이 다릅니다. 엄마 주희는 집안의 반대라는 걸림돌로 인해 준하와의 사랑이 험난하기만 합니다. 반면 2002년의 지혜는 짝사랑하는 상민 오빠(조인성 분)에게 마음을 내 비추고 싶지만 친구인 수경이 상민 오빠 옆에 찰떡같이 붙어 있습니다.
2개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방식인데 영화 마지막 장면은 감동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좀 오글거린다고 할 정도로 우연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다소 오글거리는 클래식 스토리를 덮어주는 뛰어난 O.S.T들
야구는 투수 놀음이고 영화는 감독 놀음입니다. 특히 한국은 감독 본인이 시나리오까지 쓰는 음악으로 치면 싱어송라이터들이 많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대부분의 유명 감독들은 직접 시나리오를 씁니다. 이 <클래식>의 감독은 곽재용입니다. 지금의 10,20대들은 이분 잘 모를 겁니다. 그러나 30대 이상은 이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죠.
대표작으로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 <엽기적인 그녀>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곽재용 감독의 필모에서 정점을 찍을 때 연출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 이후로 2006년 <데이지>로 크게 데인 후에 일본 영화 연출을 하는 등 일본에서 활동하고 계시네요. 이 중에서 <엽기적인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고 2001년 당시 막 한류 1차 붐이 일던 중국에서 대박이 터지면서 큰 인기를 끕니다. 지금 생각해도 <엽기적인 그녀>는 아주 잘 만든 영화로 쾌활한 영화하면 바로 떠오르는 영화입니다.
곽재용 감독 영화들의 특징은 다소 오버스러운 스토리가 오글거리게 합니다. 이는 실생활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나 이야기로 분명 리얼리티는 떨어지지만 그 오버스러움이 맥주의 거품처럼 적당히 있어서 거북스럽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창의성은 좀 떨어집니다. 영화 초반 시퀀스는 누가 봐도 황순원 작가의 단편 소설이자 국민 소설인 '소나기'의 오마쥬로 느껴지고 후반 이야기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듯한 이야기들을 섞어 놓은 느낌입니다. 섞었는데 아주 잘 섞어서 어떤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잘 섞었네요. 그만큼 대중성 높다는 소리겠죠.
이 오버스러운 스토리의 안주로 곁들여지는 것이 O.S.T인데 노래 선곡 솜씨가 너무 좋습니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 영화도 영화도 인기 높았지만 더 높았던 건 주제곡인 '비 오는 날의 수채화'입니다. <엽기적인 그녀>도 신승훈의 'i believe'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요즘 영화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리지널 스코어도 거의 없지만 기존에 있던 곡을 삽입하지도 않습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일까요? 영화가 대박 나면서 노래도 대박나는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 이 2000년대 초였습니다.
영화 <클래식>은 '한성민의 사랑하면 할수록'이 주요 테마곡으로 사용됩니다. 이 노래는 푸른하늘의 가수 유영석이 작사, 작곡을 한 노래로 그 선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연세대 교정에서 촬영한 빗속에서 조인성과 손예진이 빗속에서 뛰는 장면에서 나온 자탄풍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도 당시 엄청난 히트를 했습니다.
곽재용 감독은 미장센도 좀 오글거리지만 그림이 되는 장면을 아주 잘 압니다. 그래서 명장면들이 꽤 많습니다. 이 빗속 장면은 많은 드라마에서 참 많이 따라 했습니다. 정말 솜털 가시지 않는 풋풋한 20대 초 이미지를 영상으로 박제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18년 만에 본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노래는 이 노래들이 아닙니다.
바로 가객이라고 하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녔음을'입니다. 이 노래는 중요 장면에서 2번 나오는데 2번 모두 눈시울을 붉어지게 하네요.
오래 지날수록 그 향이 더 진해지는 클래식 같은 영화 <클래식>
영화 <클래식>은 엄마 아빠의 촌스런 그러나 가슴 절절한 이야기를 촌스러움과 순수함을 진하게 담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 자체가 18년이 지난 지금 봐도 촌스럽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다소 오글거리는 오버와 몇몇 장면은 너무 심한 우연이 아쉽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스토리도 연기도 연출도 노래도 모두 좋습니다.
특히 월남 파병 장면과 전투 장면까지 나올 때는 1970년대 초의 청년들의 고통을 담은 사회적인 면도 살짝 담깁니다. 전투 장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미군의 UH-1 헬기가 아닌 다른 헬기가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이 좀 아쉽지만 이런 여러 흠들이 영화 재미를 떨어뜨리지는 않습니다.
영화 연출도 좋았던 점은 1968년 사랑 이야기를 담을 때는 흑백이 아닌 사진이 빛에 노출되어서 바래진 세피아톤으로 담습니다. 현재는 컬러로 나오고요.
영화 제목처럼 클래식 음악도 꽤 나옵니다. 여기에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괴테 / <연인의 곁>
이라는 괴테의 시를 이용해서 1968년과 2002년 사랑을 링크시켜 주는 모습도 좋네요. 18년이 지났지만 손예진, 조승우, 조인성은 여전히 빛이 났고 영화는 더 빛이 나네요. 정말 정말 잘 만든 영화입니다. 요즘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한국 멜로 영화가 거의 없는데 한국 멜로 영화 전성기 시절의 영화를 보고 싶다면 영화 <클래식>을 추천합니다.
영화 클래식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18년 만에 다시 봤는데 여전히 오래된 보석함을 열어본 느낌이네요. 그 재미와 아름다움이 빛바래지지 않고 더 빛이 나네요. 제가 서두에 명작 반열에 넣을 수 없다고 한 이유는 이 영화의 후반의 우연이 너무 과하고 전체적으로 여러해석을 할 부분이 없는 점이 없어서였는데 18년 만에 다시보니 여전히 대중지향적인 영화는 변함이 없으나 18년이라는 세월이 이 영화에 은은한 광택을 나게 하네요. 여기에 이런 영화가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점에 명작 반열에 올려놓고 싶네요. 물론 제가 올리가 안 올리고 할 권한은 없지만 제 영화 창고에는 명작 영화 카테고리로 자리 이동시켰습니다.
별점 : ★★★★
40자 평 : 엄마 아빠의 러브레터를 읽다가 그 시절 순수함을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