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기생충이 호명 되었을 때 칸 영화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이탈리아 감독 '앨리스 로르워쳐'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앨리스 로르워쳐 감독>
'앨리스 로르워쳐' 감독은 국내에서 잘 알려진 감독은 아닙니다. 1981년 생의 이탈리아 여성감독인 '앨리스 로르워쳐'가 심사위원에 들어간 이유는 '앨리스 로르워쳐'가 연출한 영화 <행복한 라짜로>로 2017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대상격인 황금종려상만 눈여겨 보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 중 하나인 한국 영화 <시>가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듯이 대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대상 못지 않게 좋은 영화에게 주는 상이 각본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앨리스 로르워쳐'감독이 기생충 수상에 눈물을 흘렸던 이유가 뭘까요? 한국 영화와 전혀 연관도 없고 봉준호 감독과의 인연도 없는 이 이탈리아 여성 감독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영화가 표현법은 상당히 다르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빈부격차입니다. 영화 <기생충>이 대저택과 반지하라는 수직적인 공간의 대비로 빈부 격차를 담았다면 <행복한 라짜로>는 시간으로 빈부격차를 담습니다. 이 <행복한 라짜로>가 이번 주에 개봉을 했습니다.
전기도 잘 안 들어오는 이탈리아의 소작농의 을로 사는 라짜로
명확하게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가끔 등장하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나 트럭을 보면 1970년대 이탈리아 담배 농장에서 50여 명의 소작농들은 오늘도 고된 노동을 합니다. 하루 종일 담배 농사를 하고 담배 잎을 말려서 고리대금업자 같은 관리자에게 주지만 관리비 등등을 제외하면 돌아오는 것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빚 밖에 없습니다. 일을 할수록 빚이 쌓이는 부조리한 노동 구조 속에서 이 소작농들은 이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질 못합니다.
마침 커플이 생겨서 마을 밖으로 나가겠다고 하자 다들 측은한 얼굴로 쳐다 봅니다. 마을을 나가려면 자신들의 상관이자 절대자인 담배 농장의 주인인 후작 부인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당연히 마을 밖으로 벗어나는 걸 관리자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육 당하는 느낌입니다.
이런 모습을 성과 같은 대저택에서 내려다보면서 "개돼지들에게 자유를 풀어주면 자신들이 비참한 노예임을 깨닫게 돼"라면서 이 소작농들이 갇혀 사는 것이 이들에게 행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작농들은 하루 종일 일하지만 빚만 늘어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고 분노가 치밀지만 마을 밖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기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합니다. 마실 술도 없어서 나눠먹고 전기도 넉넉하지 못해서 전구를 빌려가면서 끼는 부족한 것 투성이인 인비올라타 마을. 이 험악한 마을을 영화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담습니다. 무엇보다 영화 전반부가 엄혹한 현실과 달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 하나 '라짜로' 때문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이 한 장의 사진 때문입니다. 놀랬습니다. 너무나도 선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담배잎 사이에 피어 있습니다. 피어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아름다운 청년입니다. 영화 속 라짜로도 아름답고 착한 청년입니다. 너무 착해서 바보가 아닐까 할 정도로 착합니다.
이 50여 명의 소작농들은 평생 후작 부인의 을로 살았지만 이 을들이 가장 만만하게 여기는 청년이 라짜로입니다. 라짜로는 친엄마, 친아빠가 누군지 모르고 사는 순박한 청년입니다. 이런 순박한 청년을 마을 사람들은 마음대로 해도 화도 불평불만도 내지 않기에 라짜로를 종 부리듯 하대를 합니다. 먹을 것을 나눠주지도 않고 라짜로가 여자아이들에게 선물로 받은 커피를 구해서 커피 먹을래?라고 물었더니 타 달라고하고 타오면 도망가 버립니다.
후작 부인은 이런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을로 살면서 라짜로라는 을을 만들어서 착취하는 저들도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홀대나 하대에도 라짜로는 화를 내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웃고 다니면서 궂은 일은 혼자 다 합니다.
갑과 을을 모두 비판한 영화 <행복한 라짜로>
영화 <기생충>의 초기 제목은 데칼코마니였습니다. 빈자와 부자 모두 삶의 외형은 다르지만 그들의 욕망은 비슷하다는 것을 잘 담은 영화입니다. 특히 착해서 가난하고 악질이라서 부자가 된 것이라는 흔한 이분법 적인 구도가 아닌 가난과 인성은 상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줬습니다.
박사장의 을로 기생하는 기택 가족이 또 다른 을을 내쫓는 과정이나 전에 살던 가정부를 을로 취급하는 모습을 통해서 을의 갑질도 비판했습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더 간결하고 쉬운 구도로 이 모습을 담습니다. 항상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짜로를 을의 집단체인 소작농 주민들이 자신들의 하인 취급합니다. 그렇다고 아주 심하게 다루는 건 아니고 너무 착해서 막대해도 좋은 청년이다 보니 무례한 부탁까지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비교 대상이 있으면 그 사람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죠. 라짜로라는 최저점이 있기에 소작농들은 중간계층으로 느끼고 있던 것 아닐까요? 자신들은 침대에 자면서 라짜로가 열병에 걸려서 침대에 누워야 하는데 침대는 성큼 내주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손을 내민 후작 부인 아들과 의형제를 맺다
라짜로는 정말 순박한 청년입니다. 내가 본 영화 중에 라짜로보다 더 순박하고 착한 캐릭터는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순박미가 철철 흐릅니다. 또한 편견도 없습니다. 후작 부인인 아들인 탄크레디를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못마땅해 하는데 비해 유일하게 자신이 먹던 빵을 나눠주는 사람은 라짜로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탄크레디는 그렇게 마음씨가 좋은 청년은 아닙니다. 라짜로가 준 빵을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줍니다. 어쩌면 이런 행동에 많은 상처를 받을 수 있음에도 라짜로는 개의치 않습니다. 탄크레디는 사기꾼 기질이 강합니다. 엄마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 놀라운 사기를 칩니다.
라짜로와 짜고 납치극을 벌입니다. 물론 라짜로는 이런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따뜻하게 대해준 탄크레디를 따릅니다. 탄크레디는 이 순박한 청년 라짜로에게 진심반 거짓반으로 배다른 형제라고 말합니다. 순박한 청년 라짜로는 탄크레디의 농담을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영화는 이 자작 납치극 이후에 급격하게 변하게 됩니다. 납치 자작극을 보고 소작농을 관리하던 관리자의 딸이 핸드폰으로 탄크레디 납치를 경찰에 신고를 했고 이 담배 농장 마을은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행복한 라짜로가 눈물을 흘리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전반부가 좀 지루하다는 말을 합니다. 전 전반부가 너무 아름답고 목가적이라서 좋았고 후반부에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서 좋았습니다. 스포라서 말은 못하지만 전반부의 담배 농장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소작농들은 마을을 떠나게 됩니다.
보통 이렇게 강제로 이주하게 되면 많지도 않은 마을 사람들이 라짜로를 찾아야 합니다. 라짜로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라짜로를 유심히 보던 안토니아 말고는 아무도 라짜로를 찾지 않습니다. 라짜로는 열병을 앓다가 경찰 수색 헬기에 놀라서 낭떠러지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깨어난 후 마을에 도착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자 후작 부인 저택의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들을 이사짐센터 인부로 오해하고 같이 돕고 걸어서 마을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20년 이상이 훌쩍 지난 현재에 도착합니다. 시간 여행이라면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재미를 주기 위한 시간 여행물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 전반과 후반은 성경과 비슷합니다. 나사로의 이탈리아 발음이 라짜로라는 것에 알 수 있듯이 가난한 나사로 이야기와 죽은 후 부활한 나사로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로 보여집니다.
열병을 앓고 부활한 듯한 라짜로는 여전히 행복한 얼굴로 돌아다니다 자신과 함께 지냈던 담배 농장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자신의 배다른 형제라고 믿는 탄크레디도 만납니다. 그러나 라짜로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나무를 보다가 눈물을 흘립니다. 무엇이 라짜로를 슬프게 했을까요?
외로운 늑대 라짜로. 배금주의 세상에 긴 눈물을 흘리다
영화 <기생충>과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주제는 비슷한 빈부격차로 심해진 자본주의 세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나 결은 좀 다릅니다. <행복한 라짜로>는 중세시대의 풍경인 영주에게 착취 당하는 소작농들의 모습을 통해서 계급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이 사람들을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 놓았더니 직접적인 착취 당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구조화되고 넓어져서 누가 날 착취하는 지 모르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착치에 노출됩니다. 시대와 공간이 달라졌지만 소작민들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세 계급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나 가난과 부자의 경계는 뚜렷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학대를 당하던 하대를 당하던 사람들을 좋아했던 라짜로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 해준 사람은 유일하게 또래였던 안토니아 밖에 없습니다.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마을 사람들은 라짜로를 보자마자 악마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아이 눈에게만 착한 사람이 보인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행복한 얼굴이던 라짜로는 도시의 삶에서 온갖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기가 일상이고 거짓이 난무합니다. 심지어 세상의 밀알이 되어야 하는 종교가 배척의 공간이 되고 거대한 사기극의 도우미가 됩니다. 종교도 썩고 도시도 사람들도 썩은내가 가득합니다. 이 추악한 세상에 라짜로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럼에도 라짜로는 친구를 돕기 위해 마지막 여정을 떠납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늑대가 아주 깊은 상징물로 나옵니다. 영화 초반, 마을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두려움의 존재였던 늑대는 후작 부인 아들인 탄크레디가 늑대 울음 소리를 내자 멀리 있던 늑대가 응답을 하듯 하울링을 합니다. 늑대는 동물 중에서도 가족애가 무척 뛰어난 동물입니다.
외모가 흉폭해 보여서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은 동물입니다. 라짜로는 늑대를 생각합니다. 너무 순박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착하다고 대우해주고 추겨 세워주는 것이 아닌 사기치기 딱 좋겠다. 저렇게 순박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어?라고 하는 시선을 온 몸으로 받습니다.
영화에서 늑대는 그 자체가 신입니다. 우리가 신을 대하는 태도는 경외심이 아주 크죠. 이 경외심에는 공포감도 있습니다. 이 공포를 이용해서 사이비 종교가 태어납니다. xx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라는 간단명료한 명제를 바탕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있습니다.
후작 부인은 사이비 종교인과 비슷합니다. 온갖 공포 장치를 넣어서 얕은 개울물도 공포 때문에 건너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을 만듭니다. 늑대는 이런 사이비 종교인을 바라보는 신입니다. 늑대가 라짜로라는 성인을 깨우고 세상으로 내 보냅니다. 라짜로는 21세기 도시의 삶에 현기증을 느낍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을 합니다.
그냥 눈물이 흐릅니다. 라짜로의 실망감 때문이었을까요? 우울한 표정의 라짜로를 늑대가 이게 현실이야!라고 말하면서 인파 속으로 사라집니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무자극 영화입니다. 따라서 지루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영화 전체가 주는 메시지도 간결하고 은유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란함이 없어서 전체적으로 목가적인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따라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추천하지만 이런 류의 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지루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이 영화는 작게 개봉하고 개봉관도 많지 않아서 이런 시네하우스 영화들을 즐겨 보는 분들이 알아서 많이 찾을 겁니다. 입소문도 아주 좋네요.
영화를 보고 나면 라짜로를 연기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라는 배우를 찾아보게 됩니다. 이 순박한 얼굴은 얼굴 자체로 많은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이 영화로 데뷰한 배우로 1천 명의 오디션을 통과한 배우라고 하네요. 신인 배우라고 하기엔 너무나 연기를 잘 하고 무엇보다 얼굴 자체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영화가 끝나고도 생각나게 하네요.
<행복한 라짜로>를 보고 나니 행복하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이 라짜로의 눈동자에 비추어집니다. 가난했지만 모두가 가난해서 함께 먹을 것을 나누고, 비록 자신을 하대하지만 공동체라는 삶 속에서 행복해 했던 라짜로가 가난한 사람만 가난하고 사기가 난무하고 거짓과 편견이 가득한 21세기 도시의 삶에서 지친 표정을 짓는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그래도 우리는 라짜로 같은 성인의 삶을 롤 모델 또는 등대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닌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위한 삶의 항로일 겁니다. 추천하는 영화 <행복한 라짜로>입니다
별점 : ★★★★
40자 평 : 삶의 착취는 시대와 공간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