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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전시회

추천 사진전 박정희 시대의 사진표상과 기억의 소환

by 썬도그 2017.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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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감으로 마감되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마감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50대 이상 분들에게는 박정희는 종교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럼 박정희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 박정희 시대를 되새김질 하는 좋은 사진전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2017년 8월 21일부터 9월 12일까지 강남역 1번 출구 바로 앞 미진빌딩 22층에 있는 <스페이스22> 대안공간 또는 사진전문 갤러리에서 아주 흥미로운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를 되돌아보는 기억 소환전인 <박정희 시대의 사진표상과 기억의 소환>입니다. 기획은 이경민 사진작가가 했네요. 

이경민 사진작가는 사진아카이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사진아카이브연구소에 있던 박정희 시대를 돌아 볼 수 있는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사진가 구보 씨의 '경이의 방'이 사진전 제목입니다. 여기서 '경이의 방'을 보고 경이씨의 방을 소개하나 보다 했는데 여기서 경이는 Wonder를 말합니다. 경이롭다의 그 경이죠. 15~18세기 유럽은 수집 붐이 일었습니다. 유럽 귀족들은 유럽 상선들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물물교환한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붐이 일었습니다.  그 진귀한 물건을 담은 방이 '경이의 방'입니다. 

박정희 시대를 담은 '경이의 방'이네요


스페이스22는 꽤 큰 갤러리입니다.  메인 전시공간을 뒤로하고 카페와 같은 작은 공간부터 들렸습니다. 


동상의 시대 기념의 시대

덕수궁 안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두 소년 소녀가 있네요. 도덕 교과서 표지입니다. 이 도덕 교과서가 뜬금없이 나온 이유는 아마도 저 뒤에 있는 동상과 함께 도덕을 엄청나게 강조한 박정희 시대라서 배치한 것 같습니다. 정작 대통령 본인은 안가를 들락거리던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이었죠. 


한 강연에서 50~70년대 특히 70년대에 많이 세워진 동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박정희 시대에 전국에 많은 동상이 세워진 것이 국민 계몽과 충효를 반공과 함께 국가 기조로 내세운 박정희 정권의 강압에 의해서 세워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그 시대의 하나의 시대의 트렌드였다고 하네요. 동상이 많이 세워지기 전에 한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그 전시회는 석고로 만든 한국 역사를 빛낸 위인들을 석고 동상으로 만들었는데 비가와서 다 흘러 내렸다고 하네요

그 이후에 많은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남산 주변과 도심 곳곳에 동상이 세워졌죠. 대표적인 것이 이순신 동상입니다. 저는 그 동상의 시대를 힐난했지만 정치적 목적은 없었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비판한 동상이 바로 이승만 동상입니다. 위 사진은 파고다 공원(현 탑골 공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입니다. 이 동상이 웃긴 것은 이승만 본인이 대통령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동상으로 만들지 않죠.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을 이승만이 지시했고 남산과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남산과 탑골에 있던 이승만 동상은 시민들에 끌어내려졌고 질질 끌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이승만 동상은 한 개인 주택 뒷뜰에 있던 것을 담은 사진을 강연에서 소개했습니다. 

동상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이 이 박정희 시대의 사진 트랜드였나 봅니다.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에 세워진 을지문덕 동상으로 1953년 사진입니다.


경남 창원에 있었던 이순신 동상입니다. 1952년 사진입니다. 6.25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시대였지만 사진을 찍는 여유도 있네요. 사진이 귀한 시절이라 한 장의 사진도 그냥 찍지 않고 이렇게 탑을 쌓아서 촬영을 했습니다. 


사직동 종로 도서관 앞에는 율곡 이이 동상과 신사임당 동상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는 이 동상은 동상을 많이 세우던 60~70년대에 세워진 동상입니다. 


초등학교에는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많았습니다. 1968년 11월 삼척 울진 지방에 침투한 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던 이승복 어린이, 어린 시절 반공 어린이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이 사건이 조작이 되었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80년대까지는 이승복에 대한 거룩함이 가득했습니다.


정치인이 사진수정사를 만났을 때 

1971년은 박정희 정권이 입지를 굳힘을 넘어서 다음 해인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발표합니다. 대통령 연임을 넘어서 영원히 해먹을 수 있는 극악의 조치죠. 이 유신체제에는 많은 딸랑이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딸랑이 정치인들이 가득 담긴 족보 같은 정치인 도감이네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등등 참 많은 정치인이 정부를 견제하는 국회의 역할을 망각하고 공화당 의원들은 행정부의 딸랑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준하 같은 의원도 있었습니다. 



모든 정치인이 박정희 대통령의 호위무사는 아니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상대가 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박정희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자 박정희는 김대중을 바다에 수장하려고 했었죠. 그러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그 위기를 넘겼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옆에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있네요. 


왼쪽은 당시 46세였던 공화당 국회의원 박태준입니다. 나중에 한일협정으로 받은 일본의 보상금으로 세운 포항제철의 사장이 되죠. 그 옆에는 모윤숙입니다. 우리에겐 시인으로 유명하지만 국회의원이기도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모윤숙은 대표적인 친일파입니다. 영화 암살에도 다루었지만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 주요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아직까지 한국은 친일청산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친일파 세력이 존재하고 있어서 여전히 친일청산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은 당시 44세인 신민당 의원인 김영삼입니다. 야권 세력의 아이콘이 되는 김영삼 의원이었지만 김대중과의 라이벌 구도 때문인지 죽을 때까지 김대중 정권을 비난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 새시대 새나라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1970년대는 새로운 것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시대였습니다. 


많은 잡지들이 새롭다는 새를 붙였습니다. 



 새마을 새나라가 국가 재건의 표어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봉건적인 한국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서 농촌의 초가집을 슬레이트나 함석지붕의 새로운 집으로 바꾸는 국가 개조 작업을 합니다. 신작로를 닦고 치수 관리를 하고 내 마을을 내가 직접 가꾸는 시대를 열죠. 

많은 사람들이 이 새마을 운동으로 마을이 변하고 나라가 변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젊은 분들이 50대 이상 분들의 박정희 향수를 조롱하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이 새마을 운동으로 하루 하루 달라지고 새롭고 편리해지는 변화되어가는 한국의 모습을 본다면 이게 다 '박정희'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는 독재자였지만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고 보릿고개를 없애준 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과 과를 동시에 거론하지 못합니다. 잘못이 많아도 공이 더 많으면 무조건 옳다라고 말하고 반대로 공이 많지만 잘못이 더 많으면 나쁜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2개로 나눠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판도 많지만 경제적인 발전 성과는 인정하고 싶습니다. 반대로 정치와 인권 탄압은 최악이었죠. 



많은 잡지가 새를 붙여서 나왔습니다. 저에게는 새로 시작하는 잡지가 새소년이 기억나네요. 어린이 잡지로 꽤 인기가 많았습니다. 부록도 많아서 어린이들이 많이 샀어요. 

새나라, 새마음. 새마을 모든 것이 새롭게 변했습니다. 문제는 새로운 것은 무조건 옳고 낡은 것은 무조건 틀렸다 식의 이분법적 사고로 전통도 낡은 것으로 간주해서 전통 파괴도 참 많았습니다. 보존할 것은 보존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해야 하는데 전통이고 나발이고 무조건 틀렸다고 판단하고 보존할 것까지 다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심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이제서야 그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 몰랐다면서 전통 찾기를 하지만 이미 다 사라져 버렸죠. 요즘 서울시가 옛 것 찾기를 하고 있지만 이게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마도 새마을에서 가장 큰 변화는 초가집이 슬레이트 집으로 바뀐 것입니다. 정부는 아파트처럼 주택 표준 모델을 배포해서 이렇게 지으라고 표준을 정해줬습니다. 지붕을 주홍색으로 하면 벽은 연회색으로 하라고 되어 있네요. 아마도 이게 색채 미학적으로 어울리나 봅니다. 


이 70년대 당시에 지어진 농촌 집들이 아직도 남아 있고 농촌의 집들이 비슷비슷한 이유도 여기서 기인합니다. 기와로 지으면 더 좋겠지만 건축비가 많이 들어서 기와 모양의 함석 지붕으로 지어진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함석집이라는 식당도 많잖아요. 몇 년 전에 지방 여행을 갔을 때 농총 마을 집들이 온통 기와라서 놀랐는데 가까이가서 보니 기와가 아닌 함석이더라고요. 



반공의 시대 간첩의 시대 

공산당을 반대하고 간첩을 잡자라는 반공반첩. 수시때때로 방송에서는 간첩을 잡았다는 방송이 소개되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신조 일당의 습격에 놀라고 친일파라는 색을 지우기 위해서 반공의 깃발을 휘둘렀습니다. 한국의 친일파들이 반공의 깃발 아래 모인 이유가 다 있죠. 

반공의 깃발은 아직도 펄럭이고 있습니다. 빨갱이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퀴즈대회에서 빨갱이라고 말한 서울대생이 아직도 생각나네요. 
정부 반대하면 다 빨갱이라는 우리 세대의 슬픈 모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신체제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던 박정희 정권은 총화유신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유신시대에 많은 시위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유신은 영원할 것 같았지만 김재규의 총에 맞고 죽었습니다. 

간첩들도 참 많았습니다. 영화 <자백>에서는 간첩이 아닌 사람까지도 간첩으로 만든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김기춘이라는 공작 정치의 대가가 애먼 사람까지 간첩으로 몰았었죠. 그렇다고 북한 간첩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북한 간첩도 꽤 있었습니다. 

간첩이 잡히면 간첩의 소지품을 나열해서 보여줬습니다. 권총과 라디오와 달러가 각종 신분증이 나열된 장면을 소개했습니다. 


간첩들은 라디오가 필수였습니다. 음악 방송 듣는 용도가 아닌 단파 라디오로 난수방송을 청취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AM 라디오를 이용해서 무작위 숫자를 불러주면 간첩이 그 방송을 해독해서 지령을 하달 받았습니다. 

간첩들은 소니나 금성 라디오를 이용했습니다. 금성은 현재 LG전자입니다. 금성전자는 라디오를 잘 만들던 회사로 나중에 TV도 만들었습니다. 가전제품은 금성이라는 소리는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난수 방송 이용 방법입니다. 최근에도 난수 방송을 하고 있나 보네요.

금성라디오라는 시도 있네요. 그 유명한 김수영 시인의 금성라디오입니다. 
'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게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이 문장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게와 기계의 언어 유희가 아주 대단하네요. 아내가 라디오를 산 것에 대한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네요. 


스페이스22는 대안공간입니다. 갤러리나 미술관이라는 제도권에 걸리지 못한 사진들을 소개하는 곳이기도 하죠. 사진 전시회 수준이 꽤 높고 흥미로운 사진전이 많이 열립니다. 강남에는 많은 갤러리가 없습니다. 특히 사진 갤러리는 전무하다고 할 정도로 문화 인프라가 높지 않습니다. 예술의 전당이 있긴 하지만 거긴 돈 되는 예술만 걸리는 상업 예술의 총아입니다. 그래서 전 예술의 전당 전시회를 최근에는 가지 않습니다. 

보도 사진 좋아하는 제가 라이프 사진전을 보지 않는 이유죠. 오히려 전 이런 스페이스22 같은 곳에서 소개하는 사진들이 좋습니다. 스페이스22는 작은 카페 같은 공간도 있습니다. 한쪽에 커피 머신이 있는데 500원에 양질의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사진 잡지도 실컷 볼 수 있습니다. 강남역에 가면 항상 들리는 곳인데 정말 추천하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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