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잔뜩 겁을 집어 먹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많이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불었습니다. 편하게 말을 하라는 말에도 안절부절 못하자 옆에 있던 여자 분이 다독여줍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름은 유가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국정원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을 당하고 거짓 자백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 애먼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다가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고문을 통해서 거짓 자백을 넘어서 중국의 출입국 문서까지 조작했다가 들통이 난 사건입니다.
당시 이 '유우성 간첩조작'사건과 이후 터진 또 다른 간첩조작 사건이 발각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 언론사의 집요한 추적이 있었습니다. 그 언론은 대안 언론으로 유명한 '뉴스타파'입니다. 이 뉴스타파는 MBC와 KBS 등에서 정권 비판 뉴스를 하다가 찍혀서 해직당한 언론인들이 모여서 만든 대안언론으로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운영이 되는 곳입니다.
한국 대부분의 언론들이 정부 찬양적인 기사를 쓰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 가운데 절대권력과 맞서 싸우는 몇 안되는 곳입니다. 특히, 국정원이라는 간첩도 뚝딱 만들어내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을 상대로 집요하게 따져 묻고 사건의 진실을 캐낸 곳입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을 추척하는 과정을 다큐로 담다
유가려씨가 변호인단의 도움으로 고문에 의해 거짓 증언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거짓 증언도 거짓 증언이지만 그 거짓말이 서울에 사는 오빠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었고 국정원이 오빠와 함께 사는 길은 자신들이 시키는대로 위증을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순진한 유가려씨는 법정에서 검사들의 질문에 맞다고만 합니다.
그렇게 유우성씨는 서서히 간첩으로 만들어져갑니다. 그러나 유가려씨가 구타를 당하고 위증을 강요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뉴스타파와 변호인단은 국정원이 또 다시 간첩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뉴스타파 최승호PD는 국정원 합동심문소를 찾아갑니다.
영화 <자백>은 유가려씨의 자백으로 시작해서 국정원 합동심문소에서 자살한 한종수씨를 추적합니다. 최승호 PD는 한종수씨와 친분이 있다는 동생을 만납니다. 같은 심문소에 있다가 한종수씨가 자살을 한 사건을 알고 있는 이 사람의 태도가 아주 놀랍습니다. 국가가 하는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했겠냐면서 한종수가 본명이 아님에도 고문이 있었던 것도 모두 수긍합니다.
전 이 한종수를 형님으로 부르는 사람의 태도가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불쌍한 형님이 죽었는데 뭐 국가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냐는 방관자 태도는 나에게 피해 줄까봐 경계를 하면서도 또 형님의 무덤가에 소주를 뿌리는 모습은 이해가 가면서도 안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취재진의 도와달라는 손길을 뿌리쳐 버리자 한종수씨 자살 사건은 오리무중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서 유우성 서울시공무원 간첩 사건은 2심으로 넘어갑니다. 2심에서는 1심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인 중국에서 보내온 북한의 출입국 기록문서가 제출이 됩니다. 그리고 그 출입국 기록문서의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최승호PD는 중국 국경지역으로 갑니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가 잘 아는 또는 모르는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을 차분하게 추적합니다.
반성하지 않는 절대권력자들의 후안무치
영화의 결과는 뉴스 검색만 해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언론사의 집요한 추적으로 진실이 가려지게 되고 결국은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을 쇄신하겠다면서 사과를 합니다. 사과 참 안하는 대통령이 사과를 할 정도면 엄청나게 큰 잘못을 한 것이죠.
그럼에도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든 국정원과 특히 2명의 검사는 반성하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1개월 감봉이라는 아주 가벼운 징계로 끝나버립니다. 최승호 PD는 이 간첩조작단 사건을 유우성 간첩조작사건이 처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70년대에 서울대로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이 간첩으로 몰린 '학원 침투 간첩단'사건의 피해자를 찾아서 일본으로 향합니다. 갖은 고문으로 정신병을 앓게 된 피해자는 최승호PD 앞에서 거의 쓰지 않던 한국말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때는 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간첩조작 사건에는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서 사과를 요청합니다. 이에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를 넘어서 수사한 적이 없다는 황당한 말을 합니다. 이 말에 영화관은 실소가 터집니다.
이뿐 아닙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당시 일어난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에 대해서 사과의 말을 해달라고 했더니 다 지난 일이고 오래전 일을 나에게 왜 물어보냐고 합니다. 후안무치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나네요. 절대권력은 절대 썪는다고 하는 말도 생각나네요.
사과 한 마디면 됩니다. 그 사고 한 마디가 피해자들의 웅어리진 마음을 풀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 합니다. 이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닮았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 편지를 쓸 수 있냐는 말에 털끝만큼도 없다고 말한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과하면 가오가 떨어지나요? 아님 뻔뻔해야 세상 살기 편한가요? 2명의 검사, 김기춘, 원세훈 그리고 수 많은 한국 언론들의 후질근함이 영화 <자백>을 통해서 낱낱이 밝혀집니다.
대한민국이라는 폭력을 목격하다
간첩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100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절대권력기관인 국정원은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나면 지금까지 간첩을 조작으로 만든 사건 리스트가 스크롤에 올라옵니다. 놀라운 것은 재심을 통해서 수많은 간첩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판결이 났고 지금도 재심으로 통해서 간첩 조작 사건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정부 때 70~80년대 간첩 조작 사건이 가장 많이 밝혀지네요.
그 간첩 조작 사건은 2013년에도 자행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소 뉴스타파라는 제 4의 권력인 언론이 있는 한 쉽게 일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존 언론이 아닌 뉴스타파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자백> 자체는 큰 재미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지를 목도하게 하는 힘이 좋은 다큐입니다. 영화가 끝이나면 간첩 조작 사건 리스트가 흐르고 그 다음에 '뉴스타파'를 후원한 사람들의 리스트가 오릅니다. 펀딩을 통해서 영화를 제작한 영화들을 몇 번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원자 명단이 가득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리스트를 한 2분 이상 봤는데 아직도 ㄱ에서 ㄴ으로 넘어가지 않더군요.
그 후원자들이 있기에 오늘도 뉴스타파는 진실을 향해서 정주행을 할 수 있나 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가한 폭력을 목격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진실을 위해서 무소의 뿔처럼 질주하는 최승호 PD의 묵직함을 느낄 수 있는 다큐입니다.
별점 : ★★★
40자평 : 무소불위의 절대권력기관의 후안무치함을 고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