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안에는 서울이 또 있습니다. 바로 종로구 중구가 서울 안에 서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와 시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 여기에 다 몰려 있습니다. 그렇게 몰려 있는 것이 박물관 여행하는 분들에게는 아주 좋죠. 다만, 같은 서울인데 주거용 지역과 문화용 지역이 따로 있다는 것이 균형 발전 면에서는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건 하나의 작은 바램일 뿐 박물관들이 몰려 있어서 하루 만에 5개 이상의 다양한 박물관을 둘러 볼 수 있습니다.
종로구에는 4대 고궁이 있습니다. 여기에 박물관도 참 많습니다. 먼저 경복궁 안에 고궁 박물관과 민속 박물관이 있습니다. 아이들 교육에 참 좋은 곳이죠. 서울교육박물관은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뭐 규모도 작고 위치가 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죠. 그러나 여기 아이들하고 손잡고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많습니다. 위치는 삼청동 입구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습니다.
서울교육박물관의 콘셉은 '아빠엄마 어렸을 적에'입니다. 1960~80년대 풍경을 박제해 놓았네요. 입구에는 70년대 흔한 구멍가게가 있네요
스마트폰도 게임기도 흔하지 않았던 70년대 학교 앞에는 뽑기가 있었습니다. 설탕 끊여서 만든 뽑기에 여러 모양을 찍어서 주면 그 모양을 그대로 따서 주면 하나 더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서울교육박물관은 2개의 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양한 디오라마와 사진과 물건으로 추억을 돋게 하네요.
70,80년대 운동회 풍경이네요. 운동모가 백색과 청색이 있는데 이걸로 구분해서 청군,백군으로 구분했습니다. 홀수반, 짝수반 나누거나 10반까지 있으면 5반까지 청군, 6반부터 백군으로 했던 기억이 나네요.
추억의 4종 세트네요. 왕자파스와 공책. 저거 사용했던 분들은 80년대초나 70년대 후반에 초등학교에 다닌 분들일거에요.
솜사탕 자전거 옆에는
산동네 디오라마가 있습니다. 1960년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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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빵 장수와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옵니다. 산동네는 빈민촌들이 많았습니다. 서울 자체가 산이 많은 지역이긴 하지만 산동네에 빈민가가 형성되었던 이유는 대부분이 주인이 없는 땅을 개간해서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도 있습니다. 또한, 지방에서 올라온 분들이 산 기슭에 무허가 건물을 짓고 살기도 했고요. 여기에 도시 개발을 한다고 불도저로 도심의 빈민가를 밀어버리자 빈민들이 서울 변두리 지역인 산동네로 이동해서 산 것도 있습니다.
이유가 어쨌건 산동네의 삶은 지금처럼 삭막하지 않았습니다. 콩 한 조각도 나눠 먹고 불행한 일이 일어난 집은 십시일반으로 동네 사람들이 도왔습니다. 또한, 고도 성장기라서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었죠.
디오라마도 꽤 잘 꾸며 놓았네요. 리어커에 달린 놀이동산, 전 70년대가 유년 시절이라서 저 다음 버전인 좀 더 진화된 목마를 탔습니다.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김완기 사진가의 <그땐 그랬지> 사진전도 함께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완기라는 분은 처음 들어보네요. 워낙 이 시대에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분들이 있었는데 당시는 그 사진의 가치가 크지 않았다각 세월이 흐르니 그 가치가 높아져서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록 사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치가 높아지죠.
중형 카메라와 소형 필름 카메라를 주로 사용하셨네요.
스포츠 머리로 깎인 아이들이 비슷합니다. 고도성장기에 독재 정권 시대라서 획일성이 효율적이던 시대이기도 했죠. 표준에 우리의 몸과 삶을 맞혀서 살던 시대였습니다.
이 사진에서 푼크툼 아니 스투디움이 퍼지네요. 요즘은 학교에 난로 대신 스토브가 들어가 있더라고요. 겨울 참 좋아하는 계절인데 저 난로 때문에 너무 짜증 났습니다. 가운데 있는 난로 때문에 난로 주변에 앉으면 너무 더웠습니다. 난로 뒤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조퇴한 적도 있네요.
반면, 구석 자리에 있으면 시베리아였죠.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이 생각나네요. 난로 주변에는 1등부터 15등까지 배치하고 15등 이외는 주변에 앉게 했던 정말로 비교육적인 선생님이 떠오르네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려요. 어떻게 어른이자 선생님이 그런 악랄함을 보였는지. 뭐 지금도 그런 시선으로 아이들을 보는 선생님들 있겠죠. 반면, 제자들이 난로 끄는 것을 어려워하고 고생을 하자 항상 도와주던 선생님도 생각나네요
1969년 안산초 풍경입니다. 애국조회 시간인 듯하네요. 매주 월요일에 학생들 운동장으로 다 불러내서 훈화를 듣는데 저렇게 짜증나던 행사도 없었습니다. 영양가도 없는 말을 어린 아이들이 뙤약볕에 듣고 있는 시간도 지루하지만 얼마나 아이들이 많은지 교실로 들어갈 때 먼지란 먼지는 다 집어 먹었어요.
지금은 애국조회 대신 TV로 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한 반에 학생이 20명도 안 된다고 하니 정말 아이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현재의 40대 초중반이 제 2차 베이비 붐 세대인데 이 40대 아빠 엄마들의 아들 세대인 10대들이 현재 40대의 반 정도 밖에 없다고 해요. 인구 감소가 아주 심각합니다. 현재의 40대가 은퇴하는 60대가 되는 2030~40년대가 되면 노인 2명을 아들 세대 1명이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될 것 같아요.
1960~70년대 흔한 풍경입니다. 고학생들이 참 많았죠. 지금 생각하면 아동 노동이라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지만 이 시절은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작년인가 전주에서 한 중학생이 붕어빵 팔던 모습이 인터넷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 교회에서 붕어빵 팔 수 있게 리어커를 마련해 주었고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 학생들이 방학 때 마다 붕어빵을 팔았다고 하네요.
이에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직도 고학생이 있나? 경제대국 11위인 한국이지만 여전히 그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네요.
이 사진을 보니 방과 후에 석간 신문 돌리던 형이 생각나네요. 나보다 2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매일 땀 흘리면서 신문을 돌리더라고요. 어머니가 그 형에게 올때 마다 음료수나 빵 같은 것을 줬어요. 나중에는 동아일보와 함께 소년동아일보를 살짝 넣어주더라고요.
사진이 이래서 좋아요.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내 추억의 푼크툼가 나오니까요.
누군가는 펌프에서 물을 먹던 사진에 추억이 피어나겠죠.
서울교육박물관에서는 교복 변천사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크 교복은 참 이상했습니다. 친일파 어쩌고 떠드는 어른들이 왜 학생들에게는 일본 교복을 입히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어린 마음에 참 어른들은 이중적이다라고 강하게 느꼈어요. 일본 방송,영화 수입을 철저하게 막으면서 정작 교복은 일본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 이런 모습은 현재도 한국에서 친일파가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외치면서 동시에 위안부 문제를 협의도 없이 대충 넘기는 현 정권, 그런 정권을 국민 과반이 지지하는 모습. 참 아이러니합니다. 저 세일러 교복도 참 그렇죠. 일본 해군들이 입는 것을 여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자체가 군국주의의 산물입니다.
교복과 교련복 그리고 80년대 패션인 청자켓을 입고 사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난로 때던 학교 교실을 재현한 디오라마도 있고요
소풍 풍경도 재현했네요. 소풍은 역시 김밥 먹는 재미죠. 소풍에 대한 추억이 딱히 즐거운 것은 없었습니다. 워낙 소풍을 비슷한 곳에 몰려 가는지 엄청난 인파로 왕릉 같은 소풍지가 무슨 집단 야외 식당이 되었어요. 뭘 그리 몰려 다녔는지 요즘은 반 별로 투표해서 결정해서 간다고 하는데요. 이게 좋죠.
학교 앞에 있던 만화경이네요. 돈을 내고 들여다 보면서 한 컷 한 컷 넘기면서 봤네요. 사진은 3D 사진이었어요. 호기심에 한 번 본 기억이 나네요.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학교 뱃지도 달고 이 표어도 달고요. 인간 전단지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저런 걸 학생들이 달고 다닌다고 무슨 효과가 있었을까요? 다 추억이다라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참 괘씸한 행동들이 많아요.
계란이 올려져 있으면 미소가 없으면 우울했던 도시락. 지금은 학교 급식으로 인해 사라진 풍경이네요. 저는 대방초등학교 나왔는데 5학년 때 급식 시범학교로 지정되어서 급식을 먹었어요. 지급 급식과 다른 점이 꽤 많았습니다. 신기하게도 급식의 주식이 밥이 아닌 빵이였어요. 빵에 잼 발라서 먹는 게 주식이고 국이나 스프가 있고요. 가끔 밥이 나왔죠.
참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당시는 급식 배급을 학생들이 직접 다 해야 했어요. 우유 당번, 빵 당번, 식기 당번, 저는 다 해봤는데 식기 당번이 엄청나게 짜증났죠. 아이들이 급식을 다 먹고 트라이를 비우지 않고 넣어서 식기를 4층에서 1층 그것도 급식실까지 가져가야했죠. 당번 했다고 선생님이 뭔가 혜택을 주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은 학생들이 식당으로 가거나 식당이 없는 학교는 급식을 직접 교실 앞까지 가져다 줍니다.
교실을 재현한 공간도 있네요. 시골 분교 스타일로 재현해 놓았네요.
반대편 전시관에 들어가 봤습니다.
제가 가지고 놀던 물총과 프로펠러 장난감이 있네요. 저 플라스틱 물총은 몇 번 쏘면 끝났어요. 너무 꽉 누르면 앞에 꼭지가 튀어 나와서 물이 그냥 쏟아져서 낭패감과 쪽팔림이 함께 했던 기억이 나네요
두번 째 전시관은 고등학교 입시 풍경과 공부 풍경을 디오라마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뺑뺑이네요. 지금은 중학생 대부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예전엔 연합 고사를 보고 커트라인을 넘어야 했어요. 그렇게 통과한 인문계 학생들은 근거리 학교를 배정합니다. 그 배정을 할 때 저 뺑뺑이를 돌렸죠. 지금은 컴퓨터가 하지만요.
학교가 중요한 이유는 학교의 기풍 때문입니다. 한국 같이 사립학교가 많은 나라는 그 사립학교 기풍과 선생님이 중요해요. 공립 학교는 4년마다 이동을 하지만 사립은 평생 한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지내잖아요. 전 사립 고등학교 나왔는데 좋은 추억도 많고 안 좋은 추억도 많아요.
좋은 선생님들도 많았지만 악덕 교사도 참 많았어요. 여전히 한국에서는 학연이 심합니다.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라고 하면 선배가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잖아요. 참 좋은 모습임과 동시에 이게 굴레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들려볼 만한 곳입니다. 서울 도심에 있고 삼청동 입구에 있어서 겸사 겸사 들어가 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