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기 보다는 변화를 기다리는 세상에 사진이 마중물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변화 욕망이 없으면 아무리 충격적인 사진이라도 세상을 움직이지 못하고 묻혀 버립니다. 그러나 엄청난 사진은 세상 변화에 큰 영향을 줍니다. 많지 않지만 그런 사진들이 있습니다.
<사진가 도로시아 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인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이 대폭락합니다. 흔히 말하는 세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납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수많은 이민자들은 이 대공황에 큰 타격을 받습니다.
미국은 큰 고통을 받습니다. 1차 대전으로 생산 인력과 공장을 크게 늘렸다가 소비가 계속 이어지지 않자 미국은 잉여 공산품 속에서 경제 공항으로 허덕이게 됩니다. 경제 공항이 있었던 1929년부터 10년 간 미국 전역은 큰 경제 고통에서 허덕입니다.
이 경제 공항을 지켜보던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케인즈의 '수정 자본주의'를 받아들여서 경제를 시장에 맡기는 것이 아닌 정부의 적극 개입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시도할 수 없습니다. 근거와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미국 노동안정국은 미국 전역의 농촌의 피폐한 모습이나 미국의 노동 현장의 현실을 촬영할 사진가들을 모집합니다. 도로시아 랭, 벤 샨, 워커 에반스, 칼 마이던스, 아서 로스스타인, 러셀 리, 잭 델레노, 루이스 하인 같은 사진가를 미국 전역에 보냅니다. 도로시아 랭은 1935년에서 1939년까지 이 사진 프로젝트에 참여합니다.
미국 농촌은 1920년대부터 피폐화되고 있었습니다. 농업 기계화와 함께 가뭄으로 농토가 척박해졌습니다. 1936년 랭이 사진 촬영을 하던 시기에는 피폐한 농촌이 가득했습니다.
<이민자 어머니. 1936년. 도로시아 랭 촬영>
1936년 3월 도로시아 랭은 인생 사진을 촬영하게 됩니다. 거대한 완두콩 농장을 본 랭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본 풍경이 엄혹했기 때문입니다. 20마일 정도를 지나친 랭은 차를 돌려서 다시 완두콩 농장으로 돌아 옵니다. 이 완두콩 농장은 2,500명의 노동자들이 숙식을 하면서 농장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로시아 랭은 굶주리고 절망에 빠진 어머니를 발견하고 차에서 내려서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합니다. 총 5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 이 이민자 어머니인 플로렌스 오웬스 톰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델이 된 플로렌스는 7명의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였습니다. 도로시아 랭은 이름도 이력도 묻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나이를 물었습니다. 어머니 플로렌스의 나이는 32살이었습니다. 7살의 딸을 안고 있었습니다.
랭에게 플로렌스는 주위에서 주운 채소와 아이들이 잡은 새들로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로시아 랭은 인터뷰에서 도로시아 랭이 촬영한 자신을 찍은 사진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 듯 했고 5장의 사진을 촬영한 후에 이민자들이 있는 허름한 텐트를 떠났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플로렌스와 그녀의 아이들이 사는 환경은 황폐함 그 자체였습니다. 저 누더기 같은 텐트에서 7명의 아이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5장의 사진 중에서 2장이 샌프란시스코 뉴스에 실리게 됩니다. 이 사진은 미국 정부를 움직였고 연방 정부는 이 완두콩 농장에 긴급 구호 식량을 보내게 됩니다.
1. 초상권 문제
사진 역사상 항상 거론되는 사진인 '이민자 어머니' 사진에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상권 문제입니다. 먼저 이 사진은 도로시아 랭이 이 이민자 어머니에게 초상권을 얻고 촬영한 것이 아닙니다. 이 1936년에는 사진이 흔한 것도 아니었고 초상권 개념도 없었습니다.
한국만 해도 초상권 개념이 생긴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자신의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한 후 크게 부각 되었지 이전에는 큰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도로시아 랭은 차에서 내린 후 다가가면서 연속으로 5장의 사진을 찍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촬영했다가는 쌍 소리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 사진가들은 그냥 막 찍었습니다. 대 놓고 찍고 몰래 찍고 많은 사진가들이 초상권 허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로시아 랭은 이 사진이 농업안정국에 제출되는 것을 알았고 사진이 어떻게 활용될 지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민자 어머니에게 이 사진이 어떻게 활용되는 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어야 합니다. 그런 설명 없이 그냥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후 이 사진은 농업안정국이 보유한 25만 장의 사진 중에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되었습니다.
1955년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인간 가족전>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전시했고 무려 900만 명의 관람객이 봤습니다. 그 사진전에는 이 이민자 어머니 사진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민자 어머니 사진을 극찬했습니다. 강직한 눈빛이 가난에 굴하지 않고 결의에 찬듯한 모습이라고 극찬을 하는 사람도 있고 구도가 완벽하다는 사람도 있고 성모마리아 같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극찬을 하는 이 사진을 모델이 된 플로렌스는 좋아했을까요?
1978년에 한 언론사가 이 플로렌스를 찾아서 인터뷰를 합니다.
플로렌스는 이 유명한 사진인 이민자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줄 곳 가족들은 수치심을 느끼면서 지내왔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1983년 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난 플로렌스는 이민자 어머니 사진은 '하나의 저주'였다고 말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도로시아 랭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진으로 인해 플로렌스 가족이 고통 받았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진가였다면 이 플로렌스 가족을 찾아가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쉬울 뿐입니다. 이 이민자 어머니 사진은 1998년 뉴욕 소더비에서 초기 인화본이 24만 4,500달러(2억 9천만 원)에 판매가 됩니다.
2.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하는가?
<독수리와 소녀. 1993. 케빈 카터 촬영>
사진 윤리를 논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진입니다. 1993년 남아공 사진기자인 케빈 카터는 수단의 기아 현장을 촬영을 합니다. 이 사진은 끔직하고 강렬합니다. 한 소녀가 엎드려 있자 죽음의 냄새를 맡은 독수리가 소녀 곁을 배회합니다. 이 모습을 본 케빈 카터는 사진을 촬영을 하고 이 사진으로 그해 퓰리처 상을 수상합니다.
그러나 이 사진은 큰 논란이 발생합니다. 독수리를 쫓아내지 않고 사진을 찍었냐는 비난이 입니다. 이에 케빈 카터는 당혹스러워 합니다. 실제로는 저 사진을 촬영한 후 독수리를 쫒아 냈습니다. 또한, 저 소녀는 어머니가 배급소에서 먹을 것을 받아온 후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보통, 저렇게 아이들을 들판에 놓고 배급소에서 구호 식량을 받아 옵니다.
그럼에도 이 사진에는 그런 설명이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케빈 카터를 손가락질 합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합니다. 한 티벳 청년이 분신을 했고 그 분신 장면을 사진가가 촬영을 했습니다. 이 사진을 본 소설가 공지영은 불을 꺼야지 사진을 찍었냐고 비난의 글을 트윗에 올립니다. 이에 노순택 사진가는 사진이라는 매체는 순간을 기록하는 매체라서 그 순간이 지난 후에는 촬영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사진은 찰나를 잡아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난을 받더라도 그 순간을 잡아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작은 것에 너무 집착을 합니다. 저 사진을 보고 수단의 비극적인 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수단에 수 많은 구호금과 구호 물자를 보냅니다. 이게 사진의 힘입니다. 저 사진 한 장으로 수 많은 수단 사람들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언론이 수단의 기아를 보도 했지만 움직이지 않던 사람들이 한 장의 사진에 움직였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도로시아 랭의 사진을 통해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강력한 경기 부양책인 뉴딜 정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 완두콩 농장에는 구호물품이 도착합니다. 저 어머니 플로랜스를 포함한 농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구호물품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플로랜스 가족은 이 사진 때문에 40년 간 큰 고통을 받습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 모습이 되었네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려 깊은 랭이었다면 이런 고통을 감지하고 플로랜스를 찾아서 사과나 마음의 위로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없어서 아쉽네요. 사진 조작까지 하는 랭의 심성을 보면 그런 것을 기대하긴 힘든 사진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3. 사진 조작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도로시아 랭이 사진 위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오른쪽 하단에 손가락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아마도 플로랜스의 손가락 같아 보입니다. 텐트 기둥을 잡고 있네요. 그런데 위 사진에는 손가락이 희미해집니다.
도로시아 랭은 1936년 이 사진을 농업안정국에 제출한 후 2년 후인 1938년 이 사진을 회수해 옵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손가락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현재로 말하면 뽀샵 처리를 했습니다. 이는 엄연한 큰 반칙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증명성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진에 어떤 조작도 변조도 위조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진가가가 위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진이 유명해지자 도로시아 랭 본인이 욕심을 부려서 이 사진이 좀 더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해서 좀 더 완벽한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 손가락을 지워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사진 뒤에는 여러 논란들이 많습니다. 그 논란은 결론이 난 것도 있고 안 난 것도 있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는 게 아니나 낼 수 없는 것들이죠. 사람마다 윤리가 다 다릅니다. 또한, 세상을 보는 시선도 다 다릅니다. 그 시선의 다름은 다른 채로 남겨야지 억지로 같은 시선으로 만들면 거기서 파열음이 나옵니다. 이민자 어머니 사진에는 그 어떤 사진보다 많은 논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각자 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