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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사진/사진에관한글

한국 사진이 동시대예술(컨템퍼러리 아트)에 속하지 못하는 이유

by 썬도그 2015.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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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예술을 이러저러하다고 정의를 내리면 그 정의를 벗어난 예술이 나온다. 그게 예술이다"
12월 25일로 끝이 나는 2015 서울사진축제의 심포지엄 프로그램 중 이영준 예술 평론가가 강의 중에 한 말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예술을 가만히 지켜보면 색다른 것, 밑도 끝도 없지만 처음 보는 것, 이전에 없던 것을 만들어서 보여주면 열광을 합니다. 닥치고 새로운 것이라고 할 정도로 요즘 현대 예술을 보면 새로운 가치, 새로운 시선,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영준 예술 평론가 아니 소개란에는 기계비평가, 사진판독전문가로 되어 있는 분의 강연을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이번 글도 강연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제 의견도 중간 중간 끼어 넣겠습니다. 


사진은 왜 동시대예술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가!

이영준 평론가는 아주 발칙한 제목의 강연을 했습니다. 사진은 왜 동시대 예술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가!
여기서 동시대 예술은 보통 컨템퍼러리 예술이라고 하죠. 현대 예술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현대 예술은 현재 예술이 아닌 고전 예술과 가치가 판이하게 다른 예술을 현대 예술 즉 동시대 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럼 현대 예술이라고 하는 동시대 예술의 가치는 무엇이냐! 잘은 모르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것으로 추측해보면 기존의 가치를 모두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20세기 예술 즉 동시대 예술은 이전 예술이 재현의 예술이었다면 20세기  동시대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진은 재현이 생명인 예술로서 재현을 하지 않고 재현을 포기한 동시대 예술로 인정받기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 생활 사진가들이 하는 사진은 재현에 천착하는 재현 사진이죠. 그래서 실물처럼 나오면 사진 잘 찍었다고 하잖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실물 보다 더 예쁘게 나와야 잘 찍었다고 하죠. 포토샵이나 필터를 사용해서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데 이는 재현력이라는 기둥 위에 보정이라는 판타지를 입힙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사진은 재현을 기반으로한 판타지입니다. 즉 가공을 조금씩 합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사진은 재현력이 강한 매체입니다.

얼마나 강한지 사진이 발명되자마자 초상화 그리던 화가들이 밥줄 끊기겠다고 역정을 냈고 실제로 화가들은 붓을 내 던지거나 사진으로 하거나 아니면 인상파 화가나 표현주의 또는 입체파처럼 사진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재현하거나 마음 속 여행을 떠나서 사람 마음 속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 예술이라고 하는 동시대예술의 발화점이 된 것은 사진입니다. 
따라서 사진은 태생적으로 예술의 부류가 될 수 있지만 현대 예술로서 인정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사진이 현실을 실제로 제대로 재현하냐?고 물으면서 현실은 3차원인데 2차원으로 담은 사진이 제대로 된 재현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고지식한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조각같은 3차원 예술은 제대로 된 재현이라고 하지도 않잖아요. 3D프린터로 똑같이 재현해도 그것도 재현이 아니라고 하겠죠. 이런 시선으로 보면 세상 모든 매체는 세상을 100% 재현하는 매체도 예술도 없습니다. 현재는 복사할 수 없는 원본 그 자체이고 다른 카피들은 다 아류이거나 현재에 대한 오마쥬겠죠. 

위 내용 중에 재현은 감정이입을 낳기 때문에 안 좋다는 말이 눈길을 끄네요. 그 이야기는 밑에서 더 하겠습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살가두도 재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세바스치앙 살가두 사진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사진의 뛰어난 재현력을 잘 이용하는 작가인데 그 현실의 고통을 담음을 넘어서 그 사진이 너무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현실이 아닌데 아름답다는 감정을 이끈다고 해서 비판을 받고 있긴 하죠.

아무튼 살가두는 세상을 참 재현을 잘 합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한국 사진잡지에서 아프리카를 담는 사진들을 보면서 왜 한국 사진잡지들은 아프리카만 자주 다루지?라는 의문을 보입니다. 그런 사진들이 대부분 감정 이입을 요구하는 사진이라고 하네요. 색다른 시선이긴 한데 사진잡지가 아프리카 사진을 보여주는 이유는 감정 이입하라고 그래서 많이 사 보라고 하는 목적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네요.

다만, 우리는 그런 의도를 모르고 사진잡지를 보는 것이 크겠죠. 



안드레아스 구어스키라는 작가도 사진의 재현력 극단까지 밀어 올린 작가입니다. 거대한 사진을 통해서 북한의 아리랑 축제의 매스게임을 촘촘하게 재현했습니다. 



<안드레아스 구어스키, 아리랑 축제>

안드레아스 구어스키는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입니다. 그의 사진은 현실을 너무 잘 재현한 사진들이 많죠. 특히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현대 사회의 반복 패턴을 잘 잡아냅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사진은 대부분이 큽니다. 사람보다 큰 크기로 전시를 하죠.

그거 아세요? 같은 사진도 초대형 인화해서 전시하면 사람들의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 크기에 압도 당하죠. 또한, 크게 인화하면 비현실적으로 보여집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구어스키 사진은 관광사진이라면서 재현을 너무 잘해서 초현실적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묘한 느낌은 저도 느껴봤습니다. 이런 대형 사진들이 주는 마력이라고 할까요?

반대인 작가도 있죠. 대한항공과 법적 소송까지 갔던 '마이클 케나'의 삼척 솔섬 사진은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네요. 전 큰 사진인줄 알았는데 무슨 수첩 크기의 사진도 있고 얼굴보다 작은 사진이 많았습니다. 너무 작아서 흥미로웠던 풍경사진입니다. 




예술은 저항해야 예술이라고 합니다. 
예술은 정의하면 그걸 벗어나는 예술이 나온다. 그러나 사진은 유명 사진작가도 남이 찍은 것을 똑같이 찍는다라면서 동시대 예술이 추구하는 재현하지 않거나 색다른 시선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네요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이 강의 전주에 들었던 구본창 사진작가도 제주도의 한 유명한 폭포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자기도 거기가서 촬영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남이 찍은 피사체를 사진작가가 촬영하는 것을 예술이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고 동시대 예술로는 인정받기 힘들 것입니다. 



동시대 예술 즉 현대 예술의 대표주자 중 한 사람이 마크 로스코입니다. 
이 전시회 전 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좋은 전시회라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에 남겼더군요. 

강신주 철학가는 "마침내 그림이 해냈다"라는 말까지 하면서 마크 로스코전을 칭찬했습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그게 블랙 코미디라면서  동시대 예술이라고 하는 컨템퍼러리 아트는 어떤 것도 느끼지 말라고 만든 작품들인데 거기서 뭘 느꼈다는 것이 아이로니컬 하다고 말했습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가 예술을 보고 뭔가를 느꼈다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과 저 예술작품의 공통점 찾기를 한다고 합니다. 맞는 말이죠. 우리는 어떤 예술 작품을 보면 자신의 경험이라고 하는 데이터베이스를 총 가동해서 내가 본 것과 비슷한 것을 찾아서 대입하고 뭐랑 비슷하다면서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를 동일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작품이나 추상화를 보면 비슷한 것이 거의 없어서 막막해하죠. 그래서 짜증 나기도 하고 멍하게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뭐라도 느껴보려고 억지로 껴맞추기 시작합니다. 이런 연상 작용을 동일시라고 합니다. 
마크 로스코는 동일시 하지 말고 색만 보라고 담은 그림을 사람들이 느꼈다는 자체가 마크 로스코의 의도를 모르는 소리라고 하네요. 

이런 식의 의도였는지는 솔직히 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시회 가서 추상작품이 있으면 그냥 스치듯 안녕합니다. 예전엔 뭔가 느껴보려고 했는데 다 부질없어 보이더라고요. 전 추상 예술 감상할 시간에 구상 예술이나 동일시하기 편한 예술품을 더 오래 많이 봅니다. 동일시 하기 가장 좋은 예술이 바로 사진아닌가요? 

그래서 전 사진도 기록 사진이 좋습니다. 동일시하기 얼마나 좋습니까? 반대로 사진인데 추상 예술품처럼 담은 사진들은 오래 안 봅니다. 물론, 그런 추상 예술을 통해서 내 생각과 시선과 느낌이 더 확장할 수 있을 수 있지만 구상 예술로도 느낄게 넘치고 넘칩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원자 모델을 떡하니 꺼내더니 이게 실제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2장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왼쪽이 실제 원자 모델일까요? 오른쪽이 실제 원자 모델일까요?라고 묻더군요. 속으로 씩 웃었습니다. 며칠 전에 양자역학 공부하면서 불확정성의 시대라는 개념을 주입했습니다. 정답은 오른쪽 사진입니다. 

원자, 전자, 중성자가 뛰어노는 미시세계는 0과 1처럼 똑 부러진 세계가 아닙니다. 전자가 빛의 속도로 원자 주변을 도는데 우리의 눈으로 보면 오른쪽처럼 보입니다. 전자의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계산할 수 없고 대충 이 근처에 전자가 돌아다닐 확률이 80%다 50% 식으로 확률로만 존재합니다. 

즉 양자의 세계는 확률의 세계입니다. 있다, 없다, 존재한다 안 한다 이런 식의 2분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있다가 없다가 있다가 없다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식으로 확률의 세계죠. 그래서 나온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잖아요. 



이 이야기를 왜 했냐면 이 거시세계도 미시세계처럼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 라는 의문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과학자들도 어느 정도 가능성을 믿고 있는 초끈이론(세상은 파동으로 이루어졌다)에서 나온듯한 평행우주론도 있긴 하죠.

많은 철학가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인식하는 이 세상이 실재이고 실존할까? 라는 의문을 하죠. 


사진으로 말하면 각각의 렌즈가 보는 세상이 다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망원렌즈로 담은 세상과 광각렌즈로 담은 세상이 다르다른 것이죠. 이런 주장을 이영준 평론가는 했습니다. 공감이가는 주장입니다. 


 

사진의 재현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사진은 어떤 것이 실재를 재현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위 사진 왼쪽 위 사진은 미국 사진기자가 촬영한 베트콩의 즉결처형 장면입니다. 이 사진은 베트남 반전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죠. 베트남 경찰서장이 건물에 숨어 있던 베트콩 저격병을 끌어내서 기자들이 있는 앞에서 권총으로 즉결 처형을 합니다. 

같은 전쟁 사진이지만 오른쪽 아래는 이라크 아이들에게 미군이 초콜렛 같은 음식을 나눠주는 모습입니다. 두 장면 모두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 2개의 사진 중에 어떤 것을 실재하는 현실을 담았다고 생각할까요?

이런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사진 한 장에 얼마나 많은 논란을 가하고 비난을 하고 감동을 합니까? 정말 사진은 현실을 왜곡하기 가장 좋은 매체입니다. 왜냐하면 왜곡하기 정말 정말 쉽습니다. 그래서 전 재현력은 사진이 아닌 동영상이 보다 정직하게 재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한 순간만 촬영하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양심이 투철한 사람이 세상을 촬영해야 합니다. 

사진은 재현력이 뛰어나지만 어떤 사건 사고를 왜곡하는데도 가장 많이 애용되는 매체입니다. 



정치인들이 사진 정치를 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미지 왜곡하기 가장 쉽기 때문에 자주 애용합니다. 위 사진은 수해 지역을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보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서 창문 부분이 포토샵으로 합성했는데 이게 발각되면서 세계적인 조롱꺼리가 되었습니다. 




그럼 재현하지 않는 사진은 뭐가 있을까? 말을 하면서 이영준 평론가는 가브리엘 오르스코의 사진을 소개했습니다.




브리엘 오르스코는 세상을 재현하지 않습니다. 위 사진은 식료품점에 가서 수박 위에 고양이 캔을 올려놓고 촬영했습니다.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색다른 시선으로 담았습니다. 


이 사진은 개가 꼬리질을 하자 빗자루처럼 바닥의 먼지를 쓸어내면서 작은 반원을 만들었네요. 제목은 도그 써클입니다. 이렇게 현실을 그대로 담는 것이 아닌 색다르게 보는 것이 재현이 아닌 사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영준 평론가는 한국 사진작가 중에 재현을 하지 않는 사진작가로 노순택을 꼽았습니다. 노순택의 얄읏한 공 시리즈는 현장을 재현하지 않고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담았다고 하네요


<노순택, 얄읏한 공 시리즈 중에서>

평택 대추리는 미군 기지가 들어서는 곳입니다. 이곳에 살던 농민들은 강제로 이주를 당해야 했습니다. 
농민들의 시위와 이를 막는 경찰의 대치가 매일 일어났고 그런 긴장감이 흐르는 곳에서 노순택 사진작가는 달처럼 둥근 레이다돔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레이다돔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면서 현실을 희화시켰습니다. 엄중한 현실이 아닌 그 현실을 약간 비튼것이죠. 이런 색다른 시선에 많은 사람들이 노순택 작가를 극찬을 합니다.

물론 희화시켰다는 것은 제 의견입니다. 전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진이 아직도 널리 멀리 퍼지는 것 아닐까 하네요. 그냥 보도 사진처럼 촬영했다면 이 대추리는 그냥 잊혀진 동네, 과거 시위를 좀 했던 곳으로 끝나겠지만 이걸 비틀었기 때문에 아직도 이렇게 이 블로그에서 소개를 하고 있겠죠. 재현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생명력이 길어진 사진이라고 할까요?



이 사진도 그렇습니다. 현대미술관 서울분관은 옛 기무사 건물이 있던 곳에 세워졌습니다. 그 기무사 건물을 해체할 때 노순택 사진작가는 그 해체 과정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허물어지는 건물들 사이에서 철근 콘트리트가 노출 되었는데 이걸 내장이라고 바라봤습니다. 생긱것 보면 내장 같아 보이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시선 색다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농담 삼아서 내장 같이 생겼네!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농담을 시각화 하는 힘이 노순택 작가에게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것을 오브제라고하나요? 원래의 용도로 해석하지 않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이게 바로 동시대예술의 시선이 아닐까 하네요.

같은 것도 색다르게 보니, 새로운 시각. 이런 것이 현대 예술의 핵심 같아 보이네요. 그러나 한국 사진들은 그게 약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공감이 갑니다. 대부분의 사진전 사진들이 재현을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시선의 확장을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면에서 한국에 재현이 아닌 현대 사진을 심은 사진작가가 구본창 사진작가가 아닐까 하네요. 지금은 재현 예술쪽으로 갔지만 88년 5월 18일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8명의 사진작가가 뭉쳐서 만든 '사진, 새 시좌전'이 한국 사진의 큰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동시대예술로 인정받기 힘든 재현의 예술 사진,럼에도 재현이라는 숙명을 거부하고 세상을 재현하지 않으려는 사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진들이 많아지면 사진도 동시대예술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그걸 떠나서 한국에서 사진을 예술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에전보다 많아져서 좋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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