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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세상에 대한 쓴소리

슬픔은 근거없는 기쁨이 아닌 한쪽 어깨를 빌려주는 공감으로 덮어야 한다

by 썬도그 2015.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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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집에 우환이 있냐?"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 표정이 어두운가 봅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 선배들이 가끔 내 우울한 표정을 보고 우환이 있냐고 묻곤 했죠. 뭐 잘 웃는 편은 아니지만 농담도 잘하고 남들만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웃는 것 보다 우울한 쪽이 더 가깝네요. 물론, 짜증도 같이 동반하죠. 짜증과 우울을 동반한 먹구름이 저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 그게 너무 좋습니다. 얇은 우울은 감기와 같아서 날 죽이지 않는다면 사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아니 남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전 슬픔이에요. 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어요

네! 전 슬픔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우울함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가 좋아요. 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한 번은 친구가 실연을 당했다고술자리에서 말하더군요. 다른 친구들은 걱정마라! 잘 될꺼야 더 좋은 여자 만날거야 식으로 말했습니다. 보통 안 좋은 일 당하면 이런 식을 말합니다. 

하지만 전 압니다. 그런 근거 없는 긍정, 대책 없이 무조건 잘 될거야라는 무성의한 말을 잘 압니다. 물론, 친구들은 성의 없고 영혼 없이 한 말은 아닙니다. 최선의 말이 그런 말이였죠. 그런데 슬픈 일을 당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그런 긍정의 말들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둘 만 있을 때 내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내 실연 이야기를 말했더니 그 친구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했냐? 어떤 말도 도움도 안 되고 니가 뭘해도 그 슬픔에서 헤어나오긴 힘들 것이라면서 견디는 수 밖에 없다는 무신경한 듯한 말을 했습니다.  운동으로 잊어라. 다른 여자를 사귀어라, 다른 일에 집중하라 식의 수 많은 세상의 흔한 조언은 다 부질없다면서 니가 어른이고 영혼이 더 강해지려면 그냥 견디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니가 사랑한 시간 만큼 잊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그 친구에게 어깨를 빌려줬습니다. 펑펑 울더군요. 아시죠? 울고 나면 감정이 정화 되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압니다. 슬플 땐 울어야지 억지로 웃게 만드는 것이 더 독이 됩니다. 


심리학 교재로 사용해도 좋은 영화인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이의 역할을 아주 잘 설명한 애니입니다. 주인공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상징하는 빙봉이가 울고 있자 기쁨이는 타박에 가까운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빙봉의 슬픔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어깨를 빌려준 슬픔이가 치유해 줍니다. 

그게 슬픔의 힘이에요! 전 그 힘을 압니다. 깊은 슬픔을 겪어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잘 인지하고 먼저 다가갑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공감 때문입니다. 내가 겪어 봤으니까 남의 슬픔도 잘 알죠. 그리고 그 슬픔을 콘트럴 할 수 있는 방법도 압니다.

그 친구 나중에 술 한잔 하자면서 저만 부르더군요. 그리고 그때 고마웠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다 잘 될거야라고 했는데 너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긍정의 소리 보다는 견딜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면서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지 몰랐다면서 지금 자기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뭐 안 좋은 일만 생기면 까칠하고 우울한 저를 찾더라고요. 흥미롭게도 전 그런 부탁이 들어오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내가 필요하구나!라는 내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스스로 느끼면서요. 



슬픔을 위로해주는 것은 슬픔이의 어깨라는 공감


서울대생, 학내 온라인게시판에 유서 남기고 투신 사망 기사보기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이 기사 때문입니다. 이 기사에서 가장 가슴이 아팠던 부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으로 괴로워할 때는 근거 없이 '다 잘 될 거야' 식의 위로는 오히려 독이다" 
라는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주변에 슬픔을 공감하는 사람이 없었나 봅니다. 그의 선택을 옹호할 수 없지만 그의 슬픔과 분노가 모니터 너머의 저에게까지 전달이 되네요

슬픔의 치유제는 공감입니다. 근거 없는 긍정은 오히려 무신경으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니 마음 다 알어. 니 잘못이 아니야. 나도 그래 봤어. 힘들겠지만 그게 삶인 걸 어쩌겠니. 내가 널 지켜보고 있을께. 내 어깨에 기대라는 말이 도움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공감대를 가져야겠죠. 그래서 슬픈 사람 앞에서는 같은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군대 훈련병 시절 그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혼자서 견디었다면 제 정신으로 훈련소에 나올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모두가 고통을 받고 있고 서로의 공감대가 형성이 되니 담배 한 개피도 나눠피면서 희미하게 웃잖아요.

문제는 이 한국 사회가 공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사건 사고 특히 고위층과 금수저 같은 사회지도자층에 있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공감 능력이 없는 것을 숱하게 봅니다. 그럴 때 마다 이 나라는 안되겠구나라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금수저야 조선시대도 50년대도 60년대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금수저가 흙수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모습이 얉아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판검사들이 저소득층에 대한 이해심 부족으로 사회 통념에 반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이죠. 

최근에는 흙수저끼리도 서로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보수주의자들로 변하고 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윌 헌팅'의 마음을 열어주는 열쇳말은 "니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였습니다. "다 잘 될거야"는 그 다음에 할 말입니다. 근거 없는 희망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덮어놓고 희망가를 부르는 세상입니다. 그 희망가에 넌더리를 치고 쓴 웃음을 지으면 넌 왜 그리 매사 부정적이지라는 말을 하죠

감히 말하지만 그런 맹목적 긍정주의자를 가까이 두지 마세요. 당신에게 위로할 능력도 관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한 쪽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을 옆에 두십시요. 그 사람은 당신이 탄 고통의 배에 함께 노를 저어줄 사람입니다.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치료될 때가 많습니다. 슬픔은 울 수 있는 어깨와 시간이 치료제입니다. 어쩌면 슬픔은 우리를 더 강하게 해주는 감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 슬픔이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슬픔을 거부하지 않고 내 감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견디면 슬픔이 날 잡아 먹지는 못할 것입니다. 벗어나려고 할 수록 더 빠지는 것이 슬픔이죠.

그래서 슬픔을 더럽고 추하고 벗어나야 하는 추악함 그 자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역설적이게도 슬픔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오히려 슬픔을 자기화 해서 내가 콘트럴 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울을 감기처럼 달고 살지만 내 영혼을 슬픔이가 콘트럴 하게 하지는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두서 없는 글로 흐르니까 머리속에서 짜증이가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하네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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