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메라사진/사진에관한글

노동자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구로공단 과거와 현재의 사진전

by 썬도그 2015. 6. 29.
반응형

가산디지털단지가 구로공단인 시절부터 근처에 살았습니다. 근처에 살았다고 구로공단을 들어가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딱 한 번 구로공단 안으로 들어갔다가 묘한 풍경에 화들짝 놀라서 나온 기억이 있네요. 그때가 90년대 초였습니다. 대학교 여름 방학 때 친구와 알바 자리를 찾기 위해서 벼룩시장을 뒤적이다가 구로공단 근처에 알바자리가 있어서 친구와 걸어 갔습니다.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구로공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연잖게 들어간 구로공단은 고요했습니다. 정말 고양이 새끼 한 마리 지나가지 않고 모든 거리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가 평일 낮시간대라서 그렇겠지만 아무도 없는 거리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그때 알았죠. 여기가 공단이구나. 공장만 가득한 곳, 기계의 부속품 또는 또 하나의 학교 같은 공장이 가득한 공단

이후 구로공단을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이 구로공단이 점점 변화 하는 과정을 살짝 봤습니다. 
구로공단은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서서히 지식산업 센터로 변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9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더 이상 공산품 제조가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해서 한창 불고 있던 IT열풍을 구로공단에 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구로공단은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로 변신을 하고 지하철 역명도 디지털단지로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줄여서 구디와 가디로 불리우고 있죠. 그리고 정말 죽순처럼 거대한 고층 빌딩이 들어서게 됩니다. 아파트형 공장이 무거운 기계를 돌리는 공장을 점점 대체하고 있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가산디지털단지는 현재 의류, 애니메이션, IT업체들이 가득 들어서고 있습니다. 특히 의류 아울렛 매장이 과할 정도로 많이 들어서 있습니다. 동대문도 의류 쇼핑센터가 많지만 가산디지털단지도 꽤 많습니다. 

터줏대감인 마리오 아울렛부터 패션 아일랜드, W몰 그리고 몇년 전에 생긴 현대아울렛이 있습니다. 현대아울렛은 가산 하이힐이었는데 모기업의 위기 때문인지 현대아울렛에게 위탁을 했네요. 이 현대아울렛에서 구로공단 시절을 돌아볼 수 있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사진전 소식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집 근처라서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려봤습니다. 


사진전 이름은 '구로공단 과거와 현재 사진전'입니다. 6월 22일부터 6월 30일까지 하는데 내일 전시회가 끝이나네요. 꼭 가서 볼 정도의 큰 사진전은 아니긴 하지만 나름 그 시절을 간접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외부에는 1985년 구로공단이 전성기던 시절의 공단 근로자들의 나들이 사진들이 가득하네요. 



그리고 구로공단의 대규모 동맹파업 기사도 보입니다. 
구로공단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출을 통해서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고자 1964년부터 1973년까지 10년에 걸쳐 총 3개의 단지를 조성합니다. 바로 구로 1공단, 2공단, 3공단이죠. 이 공단은 전국에서 기업에서 파견된 버스를 타고 올라온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에서 노동집약적인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무전기, 가전제품, 의류봉제 제품 등을 만들었죠

지금 우리가 입는 유니클로 같은 패스트패션이나 대부분의 옷들이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80년대 한국은 자유진영국가의 공장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미국에 저가 의류나 저가 가전 제품과 자동차를 수출했습니다. 지금이야 그 역할을 중국이 하고 있고 점점 인도나 인도네이사아와 캄보디아와 베트남으로 넘겨주고 있습니다. 





구로공단 과거와 현재는 이 공간에서 노동을 했던 노동자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사진전입니다.




구로공단의 근로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올라온 여공들은 노동 운동이 뭔지 자신들이 어떤 처치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조금씩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각성을 하게 됩니다.

이런 노동 운동 과정은 영화 '구로 아리랑'에 가득 담깁니다. 이 구로 아리랑은 대표적인 보수 논객이자 소설가인 이문열의 구로 아리랑이라는 소설이 원작입니다. 아이로니컬하죠. 정권 비판적인 노동 운동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소설을 쓰던 소설가가 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보수 논객이 되었네요.  이런 작가가 한 둘이 아닙니다. 김지하 시인도 마찬가지죠.

늙으면 다 보수적이 되나 봅니다.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납니다. 이 구로동맹파업이 유의미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최초의 노동자 연대투쟁이었습니다. 지금이냐 동맹파업이 흔하지만 예전에는 감히 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시겠지만 군부독재정권에서 파업하는 것이 쉽지 않죠. 그럼에도 했습니다. 

대우어페럴이 철야 농성을 2번이나 했고 조용히 끝이 났습니다. 대우어패럴 임금교섭은 잘 타결 되었지만 갑자기 남부경찰서에서 노조간부를 연행해갑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정부의 공권력은 참 무식하고 공명정대하지 않았습니다. 공권력은 항상 자본가 편이죠. 자유민주국가에서 자유는 인권의 자유가 아닌 자본의 자유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네요

그렇게 조용히 끝날 수 있는 일을 경찰이 건드리면서 벌집 쑤셔 놓은 꼴이 됩니다. 
부당한 공권력의 침입에 항의하기 위해 주변 공장들의 근로자들이 연대를 하고 함께 투쟁을 합니다. 이전에도 노조는 각 공장마다 있었습니다만 항상 각개 격파를 당했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되겠다면서 연합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작은 분쟁은 큰 분쟁이 되고 역사에 기록되게 됩니다. 

그렇게 동맹파업으로 파업이 들불처럼 퍼지자 전두환 정권은 이 들불을 막기 위해서 전경 부대를 배치하고 탄압을 시작합니다. 


단전, 단수와 함께 음식물 반입을 금지 시키고 폭력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도 동원된 깡패들이 노동자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만 다르지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는 비슷하네요. 

얼마 전에 본 영화 '소수의견'에서는 경찰과 용역 깡패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합동 작전을 벌이더군요. 공권력이 사용자 편을 든다는 자체가 공권력이 공명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공권력은 오늘도 자본가의 앞잡이 역할을 합니다. 

물론, 불법 파업이나 회사의 사정을 무시하고 월급을 더 받겠다는 때쟁이 파업은 저도 반대합니다만 합리적이고 정당한 파업까지 빨갱이로 몰아 부치지는 말아야죠. 


그래서 전 현대자동차라는 귀족노조의 파업은 역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노동자 문제의 해법을 자본가들이 발견하게 되네요. IMF 이후 급속하게 늘어난 비정규직을 대량 생산해서 노동 문제를 사용자 VS 노동자에서  정규직 VS 비정규직으로 바꿔 놓았으니까요

영화 '카트'에서처럼 의식 있는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돕는 노동자가 있지만 극히 일부입니다. 지금은 비정규직이 시위를 하면 정규직이 방패막이를 하거나 먼 산 쳐더보듯 합니다. 물론, 비정규직이라는 제도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쉽게 짜를 수 있다는 것은 또 쉽게 고용이 된다는 소리이기도 하니까요. 경기에 따라서 노동자들을 쉽게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은 크게 보면 경쟁력 있는 산업 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산업 구조의 기본은 최저임금을 1만원 정도로 올려서 먹고 살게는 해줘야죠. 5000원대의 최저임금으로 한달 벌어서 그 돈으로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문제에요. 한국의 최저임금이 낮아도 너무 낮습니다. 경기 안돌아간다고 징징거리는 기업들이 많은데 물건 살 돈이 없으니까 경기가 안 도는거예요. 

최저임금 1만원의 기적을 믿지 않는 사회가 한국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시절이 더 좋았다는 소리도 들리긴 합니다. 하루 12시간 이상 철야 근무를 하지만 비정규직들은 아니였으니까요. 또한, 돈 벌 생각만 있으면 어디서든 돈을 벌 수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절에 땀 흘리면서 돈 벌어서 아파트 산 현재의 50대 이상 분들은 요즘 젊은 것들은 쉬운 일만 하려고 한다고 구박을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3D업종은 이미 외국인 근로자들이 저임금으로 꽤 차고 있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잖아요. 그렇다고 질 좋은 일자리가 많은 요즘도 아니고요.

아무튼 노동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그 고통의 깊이는 비슷할 것 같네요. 노동을 해도 고통, 안 해도 고통입니다. 


 



큰 평지에 공장이 가득했던 구로공단, 이 당시의 모습을 영화 구로 아리랑이 비슷한 시기에 잘 담고 있네요. 거의 매일 지나가는 곳이라서 저 노동자의 표정 보다는 주변 건물에 눈길이 더 가네요. 



이 노동 운동은 유행이 아닙니다. 90년대에도 사람만 달라졌을 뿐 파업은 계속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현주컴퓨터 파업도 보이네요. 



이런 위험한 방식의 파업도 많았습니다.  한국만 이럴까요? 유독 파업할 때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고공농성이나 이런 위험스러운 파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세상에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한국은 목소리 큰 사람의 말을 더 잘 듣잖아요. 
또한, 이런 시각적인 효과가 큰 시위 방식이 좀 더 널리 멀리 전달되기도 하고요



이 사진은 최근 사진입니다. 문자로 해고 통보를 보낸 기륭전자 파업 시위 사진입니다. 공장 안에서 파업 시위를 하는 노동자가 공장 밖에 있는 노동자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 기륭전자의 문자 해고 방식은 아무리 비정규직이 법으로 정해졌다고 해도 눈을 마주치고 해고 통보를 해야 하는 기본적인 예의마저 말살 된 방식입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기계의 부속품으로 여기는 시선이죠. 



그렇게 기륭전자 시위는 수년 간 이어졌습니다. 기륭전자는 가산동의 공장을 이전 시킵니다. 무려 1895일 간의 장지 투쟁끝네 2010년 11월 정규직 고용을 핵심으로 노사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2013년 5월 복직하지만 회사는 야반도주를 해버립니다. 



전시장에는 영상 매체도 있는데 85년 구로동맹파업 당시 근로자였던 분들의 인터뷰가 보입니다. 
한 분의 인터뷰가 생각나네요

20대 초반의 몇 년은 인생으로 보자면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때 만난 근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연대의 힘은 잊혀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고요. 


가리봉오거리 밑 가리봉로데오거리는 시위를 하는 분들의 푯말이 보입니다. 건물이 바뀌고 사람은 바뀌었지만 삶의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네요. 아마 지금이 더 혹독한 노동 환경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가난해지면 점점 보수화 되고 자기 안위만 챙기게 되잖아요. 그래서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연대의 끈이 다 끊어진 섬들과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가 된 듯 합니다. 실제로 이 가산과 구로디지털단지의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중하위 근로자가 무려 40.9%로 2011년의 33.3%보다 높아졌습니다. 즉 가난한 노동자가 더 늘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근속연수도 정규직도 5년을 넘지 못합니다. 장기 고용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지만 이렇게 자주 직장을 바꾸면 그 직장에 대한 충성도나 경륜 같은 것을 바라기 힘듭니다. 



사진전을 보고 나오면서 기륭전자가 있었던 곳을 지나가봤습니다. 현대아울렛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곳입니다. 이곳은 지식산업센터라는 아파트형 공장 건물이 올라서려고 했는데 한라가 자금난이 있는지 준공일이 2년이나 지났지만 빈터로 남아 있습니다. 



건물은 거대해졌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네요. 


반응형